프라하의 봄

1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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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전차소련군이 아니라 폴란드군 전차다.[1]

체코어: Pražské jaro
슬로바키아어: Pražská Jar
영어: Prague Spring
러시아어: Пра́жская весна́
폴란드어: Praska wiosna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당 제1서기 알렉산데르 둡체크[2]에 의해 시발된 자유화 운동.

1.1 당시의 상황

1956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뒤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다. 1960년대의 정체된 경제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으며, 체코 지역에 비해서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68년 1월 총회에서 안토닌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그 자리를 맡아 국가 주요 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그 후 언론·집회·출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잠시 동안의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1.2 소련의 개입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만평.

그러나 소련은 이 상황을 그냥 방치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 하나의 민주화로 끝날 게 아니라 공산권 전체로 파급될 것이 분명한 데다[3] 서방 국가들이 개입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1956년 헝가리 혁명 진압 때처럼 전쟁 상황으로 가면 동유럽의 여론도 나빠지는 건 물론 서방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제압은 하되, 인명피해는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나마 희생이 최소화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소련은 4개월 만인 1968년 8월 20일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앞세우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의 약 20만 대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에 개입했다. 이게 얼마나 큰 규모인가 하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인구가 1,000만명 정도였다. 이런 대군을 투입한 이유는 헝가리나 동독의 봉기로 인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서 서방의 비난을 받은 것으로 인해 또 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봉기가 장기화되면 서방이 이번에는 정말 개입할 수도 있다고 판단, 사전에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4]

8월 20일 오후 11시. 바르샤바 조약기구 지상군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으며 스페츠나츠들이 An-2수송기를 타고 주요 공항과 방송국들을 점거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명한 민주화 인사들을 감금했고 저항하는 자는 살해당했다. 그리고 점거된 공항에 모스크바로부터 날아온 100여기의 An-12 수송기들이 소련 공수사단 소속 수천명의 병력들과 경전차 및 장갑차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삼아서 공산군 기갑사단과 차량화소총사단들이 주요 시설들을 점거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군과 국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정치 보복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 조건으로 순순히 투항했으며. 결국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연행되었다.[5]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구스타브 후사크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투입되었던 폴란드군(3만명의 병력과 2000여대의 차량, 750대의 전차, 592대의 장갑차)과 헝가리군은 1968년 10월 31일에 철군했지만 소련군은 계속 주둔했다.

421px-Prag_Kreuz_f%C3%BCr_Jan_Palach.jpg 팔라흐와 자이츠가 분신했던 장소에 설치된 추모 십자가

JanPalach.jpg 얀 팔라흐

당시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이 유혈사태를 우려해 소련군에 맞서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당부하면서 헝가리 혁명과 같은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소련 침공에 반대했으며, 그 중에는 분신을 한 청년들도 소수나마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얀 팔라흐(Jan Palach)과 얀 자이츠(Jan Zajíc)으로, 프라하의 중심가인 바츨라프 대로 광장에 그들을 기리는 동판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진압군 파견국 중 하나인 폴란드에서도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출신인 리샤르드 시비에츠(Ryszard Siwiec)가 59세의 나이로 바르샤바에서 분신자살했다.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전 세계로 퍼진 상황인데다 사회주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변혁운동이 되어 반스탈린, 반권위주의 운동이어서 기존 좌파 정치세력이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길 꺼린 것과는 달리 68혁명 당시의 신좌파[6]들은 동유럽 내 민주화 세력에게 호감과 연대감정을 표현했다.

그 뒤 구스타우 후사크가 정권을 잡아 소위 정상화(normalizace)[7]를 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다.

1.3 여러 가지 이야기

  • 당시 같은 시기에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벌어졌으며 브레즈네프 서기장 잘못하면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중국 전면 침공은 보류하고, 일단 자기 일부터 챙기자면서 체코 침공을 선택하였다.
  • 프라하의 봄이 좌절된 이후 둡체크는 위에서 말한 대로 잠시동안 소련에 연행되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심을 감안한 소련의 안배로 에밀 자토펙 등 다른 개혁파 인물들과 달리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자토펙 등도 사형당하거나 잔혹한 처우를 받은 사람은 없고, 대부분 징역 좀 살다가 풀려났다.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온 뒤 슬로바키아 산림청에서 잠시 근무했고, 벨벳 혁명이 일어나기 1년전인 1988년에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여튼 생각보다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지낸 덕에 벨벳 혁명 때 빠르게 복권되고 군중들 앞에서 다시 모습을 보일수 있었다. 다만 민주화가 되고 얼마 가지 않아서 199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체코를 빛낸 아이스하키 선수인 야로미르 야그르(Jaromír Jágr)의 등번호는 68번인데, 이는 프라하의 봄을 기리기 위함이다. 야로미르의 조부는 둡체크 서기장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바가 있었고, 그 결과로 프라하의 봄이 끝난 뒤 쿤데라의 소설들은 체코에서 거의 대부분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프랑스로 이주한 후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 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걸작 소설이다.
  • 세계적인 육상선수 에밀 자토펙도 프라하의 봄에 가담했다가 숙청되었고, 벨벳 혁명으로 복권된다. 둡체크가 민주화 얼마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과 달리 그는 20세기 말. 80대 직전까지 장수했다.
  • 체코가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달성한 1990년에는 최초로 프라하의 봄 축제가 개막되었는데, 전야제 행사로 "프라하의 봄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의 피날레에서 체코가 낳은 명 지휘자라파엘 쿠벨릭이 42년 간의 망명생활 끝에 76세의 나이로 고국으로 돌아와 체코 관현악단을 이끌고 스메타나나의 조국 중 저 유명한 블타바(몰다우)를 연주할 때 지휘자, 연주자, 관객 할 것 없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영상
  •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도입부에 이 사건이 언급된다. 작가가 프라하의 고서점에서 중세 수사인 아드소의 수기를 구했지만 프라하에 갑자기 소련군이 진주하는 바람에 급히 몸을 피해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는 사이 번역을 했지만, 중간에 동행자가 원본을 가지고 어디론지 가버렸고, 작자는 원전을 구하려고 했으나 정작 찾아낸 원전은 자신이 번역한 내용과는 전혀 딴 판의 책이었고, 그래서 원본을 영영 구할 길이 없어졌다는 이야기.
장미의 이름은 일종의 액자소설[8]이지만 이는 아드소가 노년에 이 수기를 쓰면서 다시 회고하게 되는 구성. 책의 입수 과정은 그냥 서문에만 언급된 설정이다. 세상에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도 존재한다는 말이 복선으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 서방측은 이 사건에 대한 개입을 검토했지만 사태가 지나치게 빠르게 마무리되는 바람에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68운동[9]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다만 국제적인 비난은 잊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은 이전의 헝가리 봉기와 달리 여론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서방 내 좌파들의 소련에 대한 감정이 크게 나빠졌고[10]] 중립국들 중에도 미국 편에 서려는 나라들이 나오면서 결국 소련도 다시는 같은 방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어쨌건 위성국가들이라도 주권은 있는지라...고르바초프가 동유럽의 민주화 움직임을 막지 못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2015년 5월 말 러시아 TV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대가 온 건 쿠데타 진압을 위해서였으며 고의가 아니었다"라는 식으로 프라하의 봄을 왜곡보도하자 체코 정부에서 불쾌감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푸틴 이후 러시아의 우경화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 지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 중 하나.

2 미국의 영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로 국내에서는 원제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지 '프라하의 봄'으로 제목을 바꿔서 수입되었다. 대니얼 데이루이스쥘리에트 비노슈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자체는 원작을 그다지 잘 영화화한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이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인정받은 듯하다.
  1.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군대는 소련,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5개국 군대였다.
  2. 참고로 둡체크는 슬로바키아 사람이다.
  3. 결국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그 예상이 맞았음이 증명됐다.
  4.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침공군의 주축들이었던 폴란드와 동독도 옛날에 반소 시위를 겪었던 적이 있다. 여담으로 하나 더 얘기하자면 당시 폴란드의 국가원수였던 고무우카는 아예 반소 시위 강제진압의 여파로 스탈린주의파의 위세가 위축된 상황에서 당시 공산당내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발판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 덕택에 주도권을 잡아 집권한 사람이다! 12년만에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된 것. 그리고 2년 뒤에 생필품 가격을 인상하자 인민들의 반발로 인해 기에레크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5. 그래도 헝가리 때와 달리 처형된 사람은 없고, 대부분 징역 혹은 추방으로 끝났다.
  6.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 체제에 영합하고 관료화된 공산당 등의 체제 내 좌파정당에 의해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을 중심으로 발생.
  7. 정책 이름이다. 즉, 프라하의 봄 이전 시대의 정책으로 돌아가겠다는 뜻.
  8. 소설내에서 듣는 이야기나 회고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 대표적으로 김동리의 등신불이 있다.
  9. 다만 프라하의 봄이 진압되었을때 프랑스 총선과 이탈리아 총선에서 여전히 여당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변수는 아니었다.
  10. 게릴라들-총을 든 사제에서 주인공 게릴라 일행이 납치한 미군 장교 맥두걸이 "어차피 혁명해봤자 러시아처럼 될 거다." 라고 조롱하자 게릴라 중 한 명이 "우린 절대로 그 관료주의자 놈들처럼 되지 않는다!" 라고 반박한다. 물론 현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