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

5039459018_ccebb15953_z.jpg

<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1937 - 클린턴 데이비슨, 조지 패짓 톰슨엔리코 페르미1939 - 어니스트 로런스

1901년 9월 29일 ~ 1954년 11월 28일

6명의 제자를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 진정한 스승제자농사왕
이탈리아계 미국인 물리학자.

페르미현대 물리학 풍조에서는 드물게도 실험과 이론 양자 모두에서 탁월했던 과학자로, 인공 방사성 동위원소 생성 등의 업적으로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분의 제자 중 무려 6명이 노벨상 수상자인 것을 보면 제자 농사도 잘했다. 겔만, 리청다오, 양전닝 등. 본인은 이 제자들을 "패거리"라고 부르며 몰고 다닌 모양. 본격 이탈리안 마피아 사실 이건 페르미를 자기 휘하로 불러들인 코르비노 교수[1]자기 수업 시간에 물리학과 광고를 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 광고 덕분에 관심 있거나 유능한 학생들이 물리학과로 넘어온 것. 다른 학과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인재 스틸

1901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형이 수술중에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사망한 개인적인 아픔이 있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물리학에서 천재적 면모를 드러냈기에, 1926년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다. 대학 입학시험 답안지는 박사학위 논문 수준이었으며, 『원자물리학 입문』이라는 책을 쓸 때에는 풀밭에 드러누워 쓴 원고를 그대로 출간했을 정도[2]. 게다가 보통의 물리학자들이 실험과 이론 중 하나에 치우쳐 다른 쪽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반면[3], 페르미는 이론 물리학자였지만 필요하면 실험도 깔끔하게 잘 해내는 만능형 물리학자였다. 심지어 닐스 보어와는 다르게 논문이나 책을 쓰는데에도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스타일도 완벽에 가까웠는데, 수학적 기교에서 당대 어느 물리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수식에 의존하기 보다는 직관과 논리에 의해 이론을 펼치고 꼭 필요한 때에만 계산을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여러모로 완전체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아내인 라우라[4]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베니토 무솔리니전체주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고,[5] 이 때문에 1938년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자마자 그대로 미국으로 망명한다.[6] 이후로 미국에서 핵분열 반응을 연구, 1942년 세계 최초원자로시카고·파일 1호를 완성시켜서 원자핵 분열 연쇄 반응을 제어하는 데에 성공한다[7].

핵무기 제조 프로젝트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발적이었는지, 타인에 의한 것인지는 말이 많다. 하지만 원자폭탄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레오 실라드(Leo Szilad)가 페르미에게 독일의 핵무기 연구에 대해서 경고했기 때문(실라드는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끌어들인다)인데다, 연구가 한참 진전된 이후에 실라드[8]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이 "독일은 망해가고 있으니 핵무기 개발은 이제 그만두자"라는 탄원서를 냈을 때 정부측에 설득되어[9] 연구를 지속한 점, 미국 정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을 듣자 수소 폭탄 개발을 결정한 점을 보면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해 보인다. 다만 맨하탄 프로젝트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나 해당 프로젝트로의 참여가 자발적인지 아닌지가 의미가 있을 뿐이지 결국 핵무기 개발이 미국만이 아니라 강대국간의 경주 형태로 진행되었고, 당시로서는 나치독일 이후의 국제정세를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이 안하면 미국도 안해도 된다는 가정은 큰 의미가 없다.

1954년 핵 물리학 관련 실험을 오랫동안 하면서 노출된 방사선에 의해 발병한 으로 타계했는데, 죽음 직전에도 링겔의 떨어지는 물방울을 관찰하며 그 유속을 측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수치화시키는 것을 매우 좋아해, 눈 앞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멀리 산 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거나, 심지어는 속도도 측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페르미 추정 참고.

페르미 사후 발견된 원자번호 100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기려 페르뮴이라 명명된다. 이외 보즈의 이름을 딴 '보존(Boson)'과 상대되는 개념인 '페르미온(Fermion)'도 그 이름을 땄다. 그리고 그의 명언인 '모두 어디 있지?'는 '페르미 역설'이라고 불리며, 왜 전 우주에 우리 인간 말고 다른 지성체가 없는지를 증명하는 강력한 논리적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 물리학자인만큼 본인의 이름을 딴 페르미 감마선 우주 망원경이 2008년 발사되었는데, 엄청난 데이터로 연일 관련 논문을 쏟아내고 있다. 거기다 이 망원경 덕에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는 기행을 저지르고 있다.
  1. 오르소 마리오 코르비노(Orso Mario Corbino, 1876~1937). "코르비노 효과(추가바람)"를 발견한 인물이며 훗날 45세에 교육부 장관과 경제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2. 참고로 이탈리아의 연필에는 뒤에 지우개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3. 대표적인 예로는 파울리를 들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도 자서전에서 본인은 실험에 대해서는 솜씨가 좋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4. 라우라 페르미(Laura Fermi, 1907~1977). 처녀적 성은 카폰(Capon, Capone로 추정). 페르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작가 겸 평화운동가가 되었으며, 남편이 암으로 죽은 이후엔 남편과 자신의 생활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5. 어이없는 점은 미국에 오고서도 이런저런 눈초리를 받았다. 이탈리아계 + 과학자라는 범접하기 힘든 직업 + 원래 주소에 살던 일본인 여자들(…) 등등으로 혹시 나치의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페르미는 열렬하게 미국 정부에 협력했으며(맨해튼 프로젝트 참고) 연구시설 내지 직원 수용소(?)격이었던 로스 앨러모스로 옮기자 뒷담화를 안 들어서 더 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6. 재미있게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과 관련해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페르미에게 스톡홀름에서 전화가 올거다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페르미는 나한테 노벨 물리학상 주려나?라고 하루종일 설렜다고 한다.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스톡홀름에서 온 전화가 아니라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고, 친구를 통해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모든 유대인들을 박해하기로 결정했다라는 법안의 내용을 듣게 되었다고. 그 뒤에 스톡홀름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주겠다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페르미 부부는 설레다가 심란해졌던 하루였다고.
  7. 그런데 이것도 1939년에 시작된 맨하튼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핵분열의 제어야 말로 원자력과 이를 이용한 핵무기의 핵심 기술이기도 하고 플루토늄의 생산은 원자로로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페르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함께 핵폭탄의 아버지로 꼽히게 된다.
  8. 얼핏 보면 페르미와 아인슈타인 등을 끌어들이고 자기는 빠져나간 트롤러(…) 같지만, 사실 그도 적극적으로 페르미를 보좌하여 핵무기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독일의 연패 소식을 듣고 곧바로 연구에서 손을 뗐고, 페르미를 설득하려 했으나...
  9. 페르미는 이 연구에서 손을 떼고 싶다고 했는데, 정부 측에서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게 이 비극을 끝내는 길이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