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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르셀로나 역대 감독 | |||||||||||
도메넥 발마냐 (1956~1958) | → | 엘레니오 에레라 (1958~1960) | → | 류비샤 브로치치 (1960~1961) | |||||||
호아킴 리페 (1979~1980) | → | 엘레니오 에레라 (1980) | → | 라슬로 쿠발라 (1980) | |||||||
라슬로 쿠발라 (1980) | → | 엘레니오 에레라 (1980~1981) | → | 우도 라텍 (1981~1983)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감독 | ||||
줄리오 카펠리 (1960) | → | 엘레니오 에레라 (1960~1968) | → | 알프레도 포니 (1968~1969) |
에네아 마시에로 (1973) | → | 엘레니오 에레라 (1973) | → | 에네아 마시에로 (1973)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 |||||||||||
에몬도 파브리 (1962~1966) | → | 엘레니오 에레라 - 페루지오 발카레지 (1966~1967) | → | 페루지오 발카레지 (1967~1974) |
AS 로마 역대 감독 | ||||||
오론조 푸길레세 (1966~1968) | → | 엘레니오 에레라 (1968~1970) | → | 루치아노 테사리 (1970) | ||
루치아노 테사리 (1970) | → | 엘레니오 에레라 (1971~1972) | → | 토니노 트레비차니 (1972~1973) |
이름 | 엘레니오 에레라 가빌란(Helenio Herrera Gavilán) |
생년월일 | 1910년 4월 10일 |
사망월일 | 1997년 11월 9일 |
국적 | 아르헨티나(Argentina) -> 프랑스(France) |
출신지 |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
포지션 | 수비수 |
소속 클럽 | RC 카사블랑카(1931-1932) CASG 파리(1932-1933) 스타드 프랑쎄 파리(1933-1935) OFC 샤르빌(1935-1937) 엑세시오 AC 루베(1937-1939) 레드 스타 FC 93(1940-1942) 스타드 프랑쎄 파리(1942-1943) EF 파리-카피탈(1943-1944) 퓌토(1944-1945) |
지도자 | 퓌토(1944-1945) 스타드 프랑쎄 파리(1945-1948) 레알 바야돌리드 CF(1948-1949) 클루브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1949-1952) 말라가 CF(1952) RC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1953) 세비야 FC(1953-1956) CF 오스 벨레넨스스(1956-1958) FC 바르셀로나(1958-196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60-1968) AS 로마(1968-197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73-1974) AC 리미니 1912(1978-1979) FC 바르셀로나(1979-1981) |
목차
1 소개
카테나치오의 창시자.
세리에 A가 명문 리그로 발돋움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
인테르의 신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와 함께 전술의 틀을 깨부신 역대 최고의 감독 중 1인.
1960년대에 축구판에 큰 변혁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당시 축구계에 유행처럼 번져가던 4-2-4 포메이션을 과감히 거부하고 그만의 수비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그는 리베로로 대표되는 5백 시스템을 구축하여 4-2-4 전술로 밀어붙이는 당대의 강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인테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그의 전술은 4-2-4 전술로 일관되던 축구계를 변화시켜서 궁극적으로 축구 전술이 한단계 진보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전술가로서의 탁월한 면모와는 달리 클럽과 연거푸 마찰을 빚고 선수들에게 모질게 대하여 심지어 선수를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등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에레라는 공식적으로는 1910년 4월 10일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그의 출생기록부가 현존하지 않고 그의 부모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말라가 출신으로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로서 이름을 날렸고 이때문에 당국의 추적을 피해 사방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에레라는 4살 때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이주했고 이후 국적을 프랑스로 변경했다. 이때 그의 부모는 카사블랑카 이민국에 아들이 1916년에 태어났다고 속였다. 그래서 그는 1931년에 실제로는 21세의 나이에 축구선수로 데뷔했지만 사람들은 훗날 그가 밝히기 전까지 15살의 나이로 축구 인생을 시작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1931년 RC 카사블랑카에 수비수로 데뷔한 뒤 이듬해에 CASG 파리로 이적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 리그에서 활동했는데 그렇게 뛰어난 수비수는 아니었다. 다만 1935~1937년 OFC 샤르빌에서 뛰었을 때 국가대표로서 2번 출장한 기록은 있다. 이후 에레라는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프랑스 리그에서 뛰다가 1944-45 시즌에 퓌토로 이적하고 그 곳에서 선수 겸 감독 생활을 한뒤 정식을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3 감독 경력
3.1 프랑스 시절
퓌토에서 1944-45 시즌을 보낸 뒤, 그는 스타드 프랑쎄 파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세 시즌 동안 단 한 개의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고 이후 구단주는 팀을 팔아버리기로 했다. 스타드 프랑쎄 파리 인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에레라는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3.2 스페인 시절
스타드 프랑수아에서 무관의 세월을 보낸 그는 1948년에 1부 리그로 막 승격된 레알 바야돌리드 감독을 맡아 팀을 승점 1점차로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8/49 시즌 당시의 라리가는 유독 치열했는데, 22점으로 12위로 시즌을 마무리한 바야돌리드는 그해 6위를 기록했던 아틀레틱 클루브와 승점 차가 2점에 불과했다.
이어 1949년 8월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이적한 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줬다. 그는 1949-50 시즌과 1950-51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고 코파 델레이에서도 1950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52-53 시즌 중반 선수 영입 관련해서 이사진과 마찰을 빚은 에레라는 홧김에 팀을 이탈하고 말라가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말라가에서도 얼마 있지 않고 1953년 1월 데포르티보 라코루냐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잔여 시즌을 치른 에레라는 1953년 여름에 세비야 감독으로 부임하여 1956년까지 팀을 맡았다.
1957년 여름, 그는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CF 벨레넨세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한 시즌을 치뤘고 1958년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1960년까지 2년간 있는 동안 1958-59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보다 승점 10점을 더 얻어 6년만에 우승을 달성하여 레알 마드리드의 연속 우승을 저지했고, 그해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도 치뤄진 엘 클라시코에서 마드리드 원정에서 4-2 완승, 캄 노우 안방에서 3-1로 이겨서 결승에 올라 그라나다를 꺾어 우승컵을 들었고, 1959-60 시즌에도 엘 클라시코에서 마드리드 원정 0-2 패배와 캄 노우 홈경기 3-1 완승을 거두어 우승을 달성했다.
또 에레라호는 당시 유럽을 제패하기도 했는데, 1958~1960년까지 치뤄진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바르샤는 스위스의 FC 바젤에 합계 6-3, 이탈리아의 인테르에 합계 8-2, 유고슬라비아의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합계 4-2 대승을 거두었고, 잉글랜드의 버밍엄 시티와의 결승전에서도 4-1의 압승을 거두었다.
엘 클라시코에서도 막강했다. 에레라가 오기 전의 바르샤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3연패를 당해왔었다. 지난 3차례 동안 바르샤는 엘 클라시코마다 3번 다 한 골도 못 넣고 깨져왔던 것이다. 에레라는 1958년 10월 26일에 자신이 첫 경험한 엘 클라시코에서 첫 4-0 완승을 거둬 기대에 부응했다. 완벽한 수비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을 꽁꽁 묶었고, 에바리스투가 해트트릭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뒤를 공략했다. 1959년 2월 15일 후반기 원정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경기 종료 11분 전 터진 결승골로 1-0 완승을 거두었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득점한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 이름도 에레라이다. 이 경기는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TV로 생중계된 경기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2년 동안 이와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에레라는 당시 회장인 프란세스크 미로-산스(1918~1989)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어느 날 에레라는 미로-산스 회장에게 선수들을 함께 독려하자며 라커룸에 선수들을 불러다놓고 "회장님께서 내게 여러분이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보너스를 주겠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장은 보너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팀 재정 상태도 보너스를 줄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회장 입장에선 곤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팬들과 선수단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에레라는 경기마다 선수들보다 30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하고 난 뒤 그라운드에나가 상대방 팬들을 도발해 경기장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는 선수들이 경기 도중 보다 강한 투쟁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선수들은 매번 공공의 적이 되어 경기를 하는 것에 피로를 느꼈다. 바르샤 팬들과 이사진들은 보다 간결하고 공격적인 축구를 바랐다. 즉, 에레라의 축구는 바르샤의 방향과 매치가 안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선수들과 사이가 벌어진 것이 바로 '암페타민 파동'이다. 에레라는 경기 하루 전에 언제나 팀 선수들과 '티 타임'을 가졌다. 그러나 차를 마시고 부작용을 겪는 선수가 나타났다. 당시 선수인 엔릭 겐사나는 어느 날 집에서 어머니의 부름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이를 이상히 여겨 자신의 친구인 의사에게 성분 분석을 하면서 해당 차에 암페타민이 검출되었고, 겐사나가 이 사실을 선수들에게 알리자 에레라가 사실을 알고는 굉장히 분노했다.[1] 이중 가장 반발한 이는 바로 라슬로 쿠발라였는데, 당시 쿠발라는 차 마시기를 거부하자 에레라 감독이 원정 경기에 쿠발라를 제외시키면서 이사진의 제재가 들어왔다. 이 와중에 1960년 4월 21일 유러피안컵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가 펼쳐졌다. 이때 레알 마드리드의 페렌츠 푸스카스가 홈과 원정에서 혼자 4골을 몰아치는 바람에 바르샤는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이 패배가 명분이 되어 에레라는 1960년 6월 바르셀로나를 떠나야 했다.
어쨌건 간에 에레라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라리가 2연패와 페어스컵 2연패, 그리고 코파델레이 우승을 일궈냈고, 60경기에서 46승 5무 9패를 기록, 76.67%라는 높은 승률을 찍었다. 1980년에 그가 바르샤에 돌아와 치른 총 2시즌의 기록이 없었다면 그는 바르샤 역사상 최고 승률의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이 가간 동안 무려 182골을 몰아치고 54골을 방어하여 공수 양면에서 강한 팀을 만들어냈다.
스페인 시절의 에레라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그는 능력이 있는 감독이긴 하지만 지나친 자의식, 구단 이사진 및 스타 선수들과의 충돌로 오랜 기간 한 팀에 머물지 못했다. 그는 탁월한 전술적 혜안으로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가 상대팀 감독과 선수, 팬은 물론이고 자신이 속한 팀의 회장과 선수들에 대한 심리전으로 인해 '심리학자' 내지는 '도발자'라는 수식어가 뒤따라다녔다.
3.3 인테르의 신
위대한 인테르를 창조하다
카테나치오를 완성한 시기
에레라는 팀을 떠난 즉시 이탈리아로 향했고 1960년 6월 인테르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인테르에서 1968년까지 8년간 감독 생활을 하면서 인테르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에레라는 당시 1960년 월드컵 이래 전 유럽에 불어닥친 4-2-4 전술에 대항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사실 이탈리아는 일찍부터 '이기는 축구'를 표방하여 수비적인 전술을 추구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공격적인 4-2-4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 파해법을 연구했다. 에레라는 이러한 노력을 집대성하여 카테나치오를 개발해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카테나치오 포메이션.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에레라가 처음부터 이 전술을 도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실 스페인 시절엔 화려한 공격 축구를 구사했다. 그래서 인테르에서도 처음엔 공격 축구를 실시했다. 그러나 인테르는 세리에 A에서 2년간 3위, 2위를 기록하며 우승을 거두지 못했고 안젤로 모라티 구단주는 세번째 시즌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면 경질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질 위기에 직면한 에레라는 미들필더 한 명을 수비진 뒤로 돌려 스위퍼 역할을 하고 왼쪽 윙백은 공격을 자유롭게 하도록 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전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든 선수들은 내가 어떤 공격을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수직적인 빠른 패스의 축구와 단 3번의 패스로 상대편 골에리어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만약 수직적으로 전개하다 공을 빼앗기면 문제가 안 되지만 횡으로 가다고 공을 놓치면 바로 실점하게 된다.
상단의 그림에는 5-3-2 포메이션으로 되어있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대칭 포메이션이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양쪽 윙백은 중미 두명 보다 더욱 앞으로 치고 나가서 공격을 수행하고 그들이 치고나가서 생긴 공백은 2명의 중미가 각각 커버한다. 그리고 수비 시엔 두 윙백이 수비 진영까지 복귀하여 수비한다. 이때 최후방에 자리잡은 선수는 리베로로서 상대의 역습으로부터 아군의 골 에어리어를 지키기 위해 항시 대기한다. 또한 에레라는 오른쪽 윙어를 이른바 '토르난테(tornante : 귀환자)'로 두었다. 공격시에는 높은 위치에서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시에는 상대 윙어를 대인 마크하며 수비 진영까지 복귀하는 역할이었다 . 이 선수는 왼쪽 윙어보다 훨씬 높은 위치까지 올라와서 공격을 이끌었다.
이러한 그의 전술은 효력을 발휘했다. 그는 1962-63 시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64-65 시즌과 1965-66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1963-64 시즌에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듬해에도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헀다. 또한 인테르는 1964년과 1965년에 2년 연속으로 인터컨테셔널 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1966-67 시즌에 카테나치오의 약점을 꿰뚫고 컨디션과 기강을 유지한 조크 스타인 감독의 셀틱 FC에게 패해 우승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간의 업적을 바탕으로 에레라는 인테르의 신으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3.4 AS 로마 시절
1968년, 에레라는 인테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던 중 로마의 구애를 수락하고 전격 이적했다. 그는 연봉 15만 파운드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급료였다. 그는 1968-69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1969년 3월, 에레라는 로마의 주전 공격수 줄리아노 타촐라의 갑작스런 사망에 연관되면서 입지가 매우 위태로워졌고 다음 시즌에 성적이 10위권 내에도 들지 못하자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3.4.1 줄리아노 타촐라 사망사건
줄리아노 타촐라.(Giuliano Taccola, 1944.6.28 ~ 1969.3.16)
줄리아노 타출라는 1961년 제노아에서 데뷔한 이래 1967년까지 여러 팀을 전전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스트라이커였다.그는 6년간 6개 팀에서 한 시즌씩 치르는 전형적인 저니맨이었다. 그러다가 1967년 로마에 입단한 뒤, 타촐라는 마침내 포텐을 터트려 팀내 주전 공격수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1968-69 시즌, 타촐라는 심장 부위에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고 호소했다. 의사들은 그를 진단하고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그를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레라는 그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의사들이 괜히 과장하는 거라며 그를 1군 멤버에 포함시켰다. 1969년 3월 2일, 타촐라는 U.C. 삼프도리아와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에레라는 그의 부상을 치료하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평상시대로 훈련을 받게 하고 2주 뒤인 3월 16일 칼리아리 칼치오와의 경기에도 투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경기 전 미팅에서, 팀 닥터는 타촐라가 37.4도에 달하는 고열을 앓고 있으니 해열제를 먹이고 푹 쉬게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레라는 그 이외엔 대체할 선수가 없다며 기어이 그를 경기에 출전시켰다.(...) 칼리아리와의 경기가 0대 0으로 끝난 뒤, 타촐라는 라커룸에서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로마 팀닥터는 즉각 응급치료를 한 후 병원으로 후송했다. 그러나 의료진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는 18분 후 사망하고 말았다.
타촐라의 시신이 담긴 운구를 짊어지고 있는 팀 동료들
당연히 이탈리아의 모든 언론 매체는 이 사건을 집중 조명했고 팀닥터가 심장병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시킨 에레라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아무리 승리를 추구한다지만 선수가 고열에 시달리고 심장 부위에 통증이 있다고 호소하는데도 별다른 조치 없이 출전을 강행했으니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했다. 로마 선수들 또한 에레라를 맹렬히 비난하며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검의는 에레라가 타촐라에게 취한 조치들이 에레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타촐라의 아내인 Marzia Nannipieri는 남편의 죽음은 에레라의 잘못된 조치로 인해 야기된 것이 분명하다며 언론에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존경받는 감독이었던 에레라였기에 많은 유명인들이 그를 옹호했고 수사당국과 이탈리아 축구협회 또한 그에게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다며 무혐의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에레라는 이후 감독 생활 내내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라는 악명을 꼬리표로 달고 살아야 했다. 그 후 타촐라의 동료였던 Ferruccio Mazzola는 2004년에 L'espresso과의 인터뷰에서 타촐라는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약물을 복용하라는 에레라의 지시를 받고 이를 복용했다가 그만 심장발작으로 죽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뒤의 이야기인 지라 지금으로서는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는 못할 것이다.
4 말년
로마에서 경질된 에레라는 1973년에 다시 인테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1974년 2월 8일,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축구계를 떠나 치료에 전념했다. 이후 4년간 치료를 받은 에레라는 1978년에 세리에B 클럽인 AC 리미니 1912 감독을 맡았다. 그곳에서 한 시즌 동안 팀을 지위한 에레라는 바르셀로나의 부름을 받고 곧바로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2시즌 동안 팀을 지휘했고 1980-81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그는 71세의 나이에 마침내 은퇴를 선언했다.
감독 인생을 마감한 에레라는 TV 축구 프로그램에 종종 게스트로 출연했고 곧 축구를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인자한 할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 인기를 바탕으로 선데이 스포츠의 아나운서로서 1985년부터 86년까지 활약했다. 그후 그는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997년 11월 9일 베니스에서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평가
엘레니오 에레라는 축구 역사에 길이남을 명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단순히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축구 전술에 한 획을 그을 페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식 축구전술인 카테나치오를 완성시켜 당시 전 유럽에 유행하던 4-2-4 공격 전술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축구 전술은 한 단계 진보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는 축구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줄리아노 타촐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선수들에게 가혹한 짓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들을 박대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무리한 지시를 내렸고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시 심한 징계를 가했다. 급기야 팀닥터가 심장병 위험이 있으니 쉬게 해줘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을 묵살하고 기어이 선수를 출전시키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 점은 두고두고 그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6 수상 경력
6.1 클럽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49/50 - 1951/52)
- 스페인 라 리가 (2) : 1949/50, 1950/51
- FC 바르셀로나 (1958/59 - 1959/60, 1979/80 - 1980/81)
- 스페인 라 리가 (2) : 1958/59, 1959/60
- 코파 델 레이 (2) : 1958/59, 1980/81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60/61 - 1967/68, 1973/74)
- 이탈리아 세리에 A (3) : 1962/63, 1964/65, 1965/66
- 유러피언 컵 (2) : 1963/64, 1964/65
- 인터콘티넨탈 컵 (2) : 1964, 1965
- AS 로마 (1968/69 - 1969/70)
- 코파 이탈리아 (1) : 19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