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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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1년여의도광장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 범인은 20대 시각장애인 김용제.

2 경위

김용제는 어릴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초등학교집을 나갔고, 몇 년 후에 아버지마저 농약으로 자살했다. 그후 시각장애와 소극적인 성격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결국 초등학교졸업하였다. 그러던 중 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도 예비 음모'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3개월의 복역을 하게 된다.[1] 이후 서울부산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갔지만 시각장애로 인해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김용제는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양말공장에서 해고된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다.

3 경과

김용제는 양말공장을 다니던 시절 사장의 기아 프라이드 열쇠를 복사해서 가지고 다녔고, 그 차를 몰아 복수할 생각을 하였다. 결국 1991년 10월 19일 차를 몰고 여의도 KBS 앞에 나타나 마구 질주하였다. 처음으로 초등학교 5학년 아이와 여섯살 유치원생 한명을 치었고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질주를 하여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21명이 부상을 입었고 200m를 더 달리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고 차가 멈추었다. 그 뒤 시민들에게 붙잡혔지만 뿌리치고 여중생을 인질로 잡았다. 하지만 시력장애로 인해 제대로 대치하지 못했고, 이윽고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4 결과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전 대구의 나이트클럽에서 방화로 인해 16명이 사망하는 거성관 방화 사건이 일어난지라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김용제는 11월 19일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제기하지만 전부 기각됐고, 1992년 8월 1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2명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2]

그런데 김용제에게 치여죽은 당시 유치원생 고 윤신재군의 할머니 서윤범 할머니는 이런 사정을 듣고 되려 범인을 이해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탄원서를 썼으며 기도를 해주시기도 하셨다. [3] 그리고 사형이 집행될때에도 찾아왔다고 한다. 김용제가 죽기전에는 가톨릭을 믿어서인지 이 자리에 온 신부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썼는데 김용제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했다고.

2016년 서윤범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시며 손자인 고 윤신재군을 찾으신다고 한다.
  1. 당시는 아직 군사정권 시절이였다.
  2. 참고로 이게 2014년 12월까지의 대한민국의 마지막 사형집행이다. 이후에는 선고는 하나 집행은 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사형제에 관해 찬반여론이 팽팽하고, EU와 유럽평의회에 범죄인 인도협약을 맺는 대신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제출한 상황을 미루어봐서 앞으로도 사형집행은 쉽지 않을 듯 하다. 그 대신 사형제를 유지하면서 범죄인 인도협약 체결국이 불과 24개국 밖에 되지 않는 일본에 비해 한국은 77개국에 이른다.
  3. 당시 기도 내용이 얼마전 방송에서 나왔다. " 지금도 용제가 정말 새사람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작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