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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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矣島公園
Yeouido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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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도심에 있는 거대한 시립공원. 이 공원을 기점으로 여의도가 서여의도, 동여의도로 구분된다.

2 여의도광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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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에 촬영된 여의도 광장. 상단의 교량은 마포대교이며, 여의도공항 및 공군기지의 활주로를 활용한 곳이기에 북단 부근에 비행기를 전시해 놓기도 했다.

광장의 기원은 1916년 일제가 건설한 여의도 비행장과 그 활주로.

제트기가 존재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지금처럼 비행장에 여러 부속건물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항공기가 이착륙할 널찍한 아스팔트 활주로와, 가건물 몇 개만 뚝딱 지으면 곧장 비행장이 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인접한 비행장이었으니 만큼, 다채로운 일화가 존재한다.
이곳에 처음으로 항공기다운 항공기가 이착륙했던 것은 1920년의 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가 일본과의 우호 친선을 목적으로 비행하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이들은 신의주 비행장에서만 한 번 착륙할 계획으로, 서울 상공에서는 선회비행만 몇 번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항공기를 하늘에서도 보기 힘든 1920년대라, 서울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결국 여의도 비행장에도 착륙, 항공기 이착륙을 선보이게 된다.
예정에 없는, 일종의 서비스 차원의 착륙이었으나 악단이 항공기에서 내리는 조종사에게 음악을 베풀고(...) 운집한 시민들이 선물과 꽃다발까지 건네자 조종사는 매우 황송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선 상공을 비행한 첫번째 조종사인 안창남도 이곳에서 이착륙과 선회비행을 선보였다. "떴다 떴다 비행기안창남"이라는 노래가 널리 유행할 만큼 이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가 이착륙한지 불과 2년 뒤인 1922년의 일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이 이착륙에서, 안창남이 몰고온 애기(愛機)에는 조선반도가 새겨져 있어 감동을 더했다.

한강에서 홍수가 나면 섬이 잠겨버리는, 비행장으로선 상당한 악조건이 있었으나 서울에 위치한 비행장이라는 접근성은 크게 매력적이었다. 안창남이 이착륙을 선보인 7년 뒤, 여의도비행장은 정식 비행장으로 개장했다. 그리고 일본 - 조선 - 만주를 잇는 항공수송의 허브기지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고질적인 침수문제 탓에, 김포에 비행장이 건설된 뒤로도 번갈아 이용되었다. 김포비행장이 있음에도 완전히 기능을 김포로 이전하지 않은 것은 매력적인 접근성 때문이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된 곳도 바로 여의도공원 부지였다.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 234호에 따라 공군이 창군되었을 때,[1] 1천여 명의 장병과 20여 기의 경항공기로 구성된 공군 최초의 비행단이 존재했다. 앞선 서술처럼 홍수가 나면 대피해야 하는 악조건이 존재했지만, 뛰어난 접근성 덕에 20년 넘게 공군의 최전방 기지로 운용되었다. 2009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의도공원에 공군 창설 60주년 기념탑이 건립되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결국 공군기지가 이전하게 되는데 당시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여의도 개발계획'을 수립한다. 군부대 이전으로 생긴 공터를, 신시가지 건설 및 당시 폭발적인 주거난 해소에 활용할 카드로 꺼낸든 것. 잦은 침수 문제 때문에 결국 공군기지가 이전한 것처럼, 이 침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섬이 폭파되었다. 왜?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을 쌓아야하는데, 재료가 될 토사는 무인도나 나름없던 가까운 밤섬에서 들고 오는게 싸게 먹히니까(...).

당시 여의도 개발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김수근인데, 첫 구상 자체는 매우 입체적인 도시계획이었다. 거대한 활주로가 있던 부지도 어김없이 신시가지로 변모될 예정이었으나... 개발계획을 밀어부칠 서울시장이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짤려버리고, 무엇보다 겨우 제방을 설치하는데도 이미 예산이 거덜난 상황이었다. 그렇다. 1971년의 우리는 제방건설만으로도 돈이 없어 개발계획이 좌초되던 가난한 나라였다(...).

후임 양택식 서울시장은 당초의 계획을 엎어버린다. 아예 민간에 택지분양을 해버리는 전술을 들고 나온 것. 개발에 돈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예산을 충당하는 수 밖에... 이 과정에서 거대한 활주로는 5.16 광장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비상활주로로 남겨두게 된다. 침수 문제 탓에 공군기지가 이전했는데, 제방공사로 그 침수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물론 군부대로 다시 쓸 생각은 없고, 민간분양으로 확정했으니 공군부대를 원위치시키진 않았다. 그래서 위의 사진에서처럼 광장 북단에는 몇몇 항공기들이 전시되기도 했고, 유사시를 위한 지하 벙커도 마련되어 있었다. 2005년 5월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 공사를 하다가 발견한 벙커가 있다. 명확한 용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대규모 행사 도중 유사시 고위층들이 대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벙커는 발견 당시 담당/소관부처도 없고 관련자료조차도 전혀 없어서 버스환승센터 공사주체인 서울특별시청 관할로 넘어가게 되었다.

옛 공군기지의 활주로를 비상활주로 용도로 써먹을 목적의 레알 활주로 광장(...)이었으나, 평양직할시김일성 광장에 대응되는 성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체로 제3세계권 후진국 정권들은 체제선전을 위해 대규모 정치집회와 퍼레이드를 자주 개최하는데, 도심 한가운데 이런 활주로 광장이 있으면 행사장소로 매우 유용하다. 웅장하고 엄숙한 정치집회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정권을 탈취한 히틀러무솔리니. 천안문광장에 모인 홍위병 수백만명 앞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 등을 생각해보라. 광장에 모인 수십 수백만명 앞에서 거룩한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명의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는 독재정권의 필수요소다.[2]

따라서 70년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선전을 위한 대광장으로도 활용되었다.

물론 체제선전용으로만 쓰인 건 당연히 아니다. 이후 제5공화국에서도 국풍81같은 각종 국내, 국제 행사를 개최하는 대표적 장소로 활용됐다. 요한 바오로 2세도 방한 시 이 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를 시성한 적이 있다. 또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매년 국군의 날에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개최되기도 했다.[3] 대규모 광장의 특성상, 정치가들의 유세의 장으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1987년 김대중#(수십만~130만 규모)[4]을 최초로 해서 김영삼(추산 130만)#, 노태우#(130만 이상) 등의 후보가 세를 결집하는 유세장이 되기도 했다.


사진은 1987년 4월 당시의 여의도 광장.

평소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마음껏 탈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공간이었다. 80년대까지는 놀이동산 같은 시설이 우리나라에 흔치 않았다. 한강시민공원 역시 80년대 중후반에야 서서히 건설되기 시작하는 등, 당시 서울시내의 여가시설이 전무하다시피해 여의도광장은 휴일에 가족단위로 가볍게 놀러다녀 올 수 있었던 여가시설로 꽤나 각광받았었다. 덕분에 광장 주변에 자전거 및 롤러스케이트 대여점도 많았다. 물론 여의도공원으로 바뀐 지금도 이들 대여점들은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절에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널찍한 광장에서 타던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활주로에서 즐기는 개꿀 라이딩

1991년 아스팔트 광장 시절 사회에 불만을 가진 한 사람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당시 여의도 광장에 돌진해서 당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놀던 어린이 2명이 사망하고 어린이 및 시민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이 있다. 당시 기사 문제는 그 다음해인 1992년에도 비슷한 이유로 택시돌진한 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택시운전자격증 제도가 생겼다.

여담으로 자전거 대여업을 하던 사람들이 여의도공원으로 바뀌는 걸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했던 적이 있으나... 그대로 여의도공원이 생겼다.

3 여의도공원으로의 변신


공원 완공 직후의 모습이다.

1993년 민주화 세력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며 출범한 문민정부의 정책은 군사정권 잔재 제거 및 환경친화적 도시계획[5]에 중점을 둔다. 활주로가 그대로 재활용된 아스팔트 광장이라는 미관문제와, 체제경쟁 집회 및 부대사열로 활용된 군사정권의 잔재라는 문제 제기가 시작됐다. 1994년에 수립된 21세기 서울시 개발 플랜에 따라 뉴욕센트럴 파크, 런던하이드파크 같은 도심권 공원을 건설하는 계획이 추진된다. 1997년 4월 10일 공원화를 위한 첫 삽이 떠올려진 이후 1998년 10월 31일부터 부분적으로 공개되었고 1999년 2월 서울특별시 시립공원인 여의도공원으로 완전히 개장되었다.

공원 안에는 한국 전통의 숲, 잔디마당, 문화마당, 자연 생태의 숲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문화마당과 공원 내 곳곳의 자전거도로는 여의도광장 시절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여의도라는 특성상 여의도 지역에 근무하는 직장인들과 방문객들이 찾고 있는 공원이자 쉼터이기도 하며 주변에 여의도 증권가(街) 등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 여의도공원에는 벚나무가 꽤 많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벚꽃이 피는 철에 가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 때를 맞춰 서울시에서는 여의도에서 벚꽃축제를 개최하고, 이 때는 수많은 인파가 여의도 공원으로 몰린다. 공원 근처에 있는 여의도역은 이때가 되면 헬게이트 당첨.

여담으로 국민일보 뒤쪽 여의도공원에 있는 연못의 모양이 상당히 독특하다. 잘 살펴본사람은 알겠지만 연못의 전체적인 모양이 서울특별시의 모양을 본딴것이다!

같은 서울특별시 시립공원인 여의도한강공원과도 인접해있다.

서울특별시 당국에 따르면, 위 문단에 있는 지하벙커는 새단장 공사를 마치고 2015년 10월부터 일반 시민에게 개방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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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래 대한민국 공군은 육군에 예속된 항공부대였다. 당장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육군과 해군에 각각 항공대가 별도로 존재했으며, 독립된 군으로 공군이 존재한 나라는 의외로 적었다. 본격적으로 독립된 공군이 등장한 시기는 2차대전 말엽~이후이다.
  2. 1934년 나치당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나 북한의 체제선전 영상 등에서 이런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 여의도광장이 공원화 된 후로 국군의 날 행사가 계룡대에서 소규모로 치러지게 되었기 때문에 국내 밀덕후들 중에는 여의도광장의 공원화를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4. 오랫만에 있었던 야권 정치집회라 500만 집회라는 별명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130만이란 숫자는 가득 채웠다는 추산치로 보이며, # 그 점에서 세 후보의 규모는 크게 다르지 않다.
  5. 이 당시 환경친화적 도시계획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서울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를 예로 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