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군

황해도의 하위행정구역 (이북5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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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山郡 / P'yŏngsan County

평산군
平山郡 / P'yŏngsan County
국가대한민국
광복 당시 면적1334㎢
광역시도황해도 [1]
광복 당시 행정구역1읍 13면
시간대UTC+9 [2]

1 개요

황해도(현 황해북도)의 군. 광복 당시 1읍 13면으로 이루어졌다. 1920년 군청을 구 평산면의 태백산성역 부근에서 남천면 신남천리로 이전하였고, 이후 남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연백군38선으로 갈린 이후 일부지역을 북측 연백군에 떼주었다. 1952년 행정구역 개편때 일부지역을 떼줘 린산군을 설치하고, 남부 일부는 1945년 이미 연백에 내주었던 지역을 포함하여 신설된 평천군(현 봉천군)에 떼주었다. 1952년 북한 정권에 의해 남천읍이 평산읍이 되었다.

이승만의 출생지이다. 단, 현재 북한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봉천군.

2 역사

평산(平山)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평주(平州)의 다른 이름이다.

해상리 회골에 있는 고회암용식 동굴이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밝혀짐으로써, 구석기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으로서 처음 다지홀(多知忽) 또는 다지실(多知悉)이라고 불리다가 뒤에 대곡군(大谷郡)으로 편성되면서 개정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방 요충지로 부각되어 748년(경덕왕 7) 대곡성을 설치하였고, 757년(경덕왕 16)엔 영풍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782년(선덕왕 3)에는 대곡성이 패강진(浿江鎭)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부터 군주(軍主)가 두어져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826년(흥덕왕 1)에는 300리에 달하는 패강장성이 축조된 바 있다.

패강진 관하의 10여 주현이 궁예(弓裔)에게 항복한 904년부터 평주(平州)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유금필(庾黔弼)·박수경(朴守卿) 등 4명의 호족이 이 곳 출신이다.
995년(성종 14)에 방어사(防禦使),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 1272년(원종 13)부터 잠시 복흥군(復興郡), 즉 배천에 예속되기도 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3]
1733년(영조 9)에 태백산성이 개축되었는데, 4개의 몽성과 8개의 성문을 갖춘 요새로서 도호부사가 수성장을 겸하는 외에 별장과 승장을 따로 두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산군으로 고쳐졌다. 이 곳은 전통적으로 유림의 조직이 강력한 곳이었으며, 1896년에는 유인석(柳麟錫)의 의병부대와 연계되어 일부는 제천에서, 일부는 황해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하는 평산의병이 조직되어 평산·배천·연안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인 외에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특색을 보여주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해 활동한 바 있는 서의배(徐義培)·유상렬(柳相烈)·조창선(趙昌善) 등과 이완용(李完用)의 암살을 시도했던 정의도(丁義道) 등이 있다.

3 지리

군의 동쪽을 예성강이 통과해서 개성.배천 쪽으로 흐른다.
북서쪽을 멸악산맥(滅惡山脈)이 달리고 있으며, 여기에 영덕산(永德山, 398m)·청학산(靑鶴山, 525m)·천괘산(天掛山, 470m)·멸악산(816m) 등이 솟아 있다.
서울에서 평양시까지 직선을 그으면, 그 중간점이 평산군 지역에 해당된다.

4 교통

평산의 중앙으로 평부선(경의선)과 함께 개성평양간 고속도로, 1번 국도(목포∼서울∼신의주)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평산에서 신계를 거쳐 강원도의 세포군(洗浦)에 이르는 청년이천선(靑年伊川線)이 건설되어 북한의 동서 교통의 간선이 되었다.

평산을 중심으로 봉산군·해주시·신계와의 사이에도 도로가 통해 있다. 예성강의 한포(汗浦)까지는 상당히 큰 배가 다닌다.

옛부터 교통의 주요 시설인 역참(驛站)과 원점(院店)이 많았는데 그 유지가 아직도 다수 남아 있다.[4]

5 산업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이고, 그 밖에 벼·콩 등이 생산된다. 과일은 사과가 많이 생산되고, 배·복숭아 등도 재배되고 있으며, 남부의 주포리·봉탄리 일대에서는 밤을 가꾸어 ‘평양밤’으로 거래되고 있다. 또 ‘평산대추’는 유명한 특산물이다.

지하자원이 풍부해, 임산리 부근에서는 슬레이트, 봉천리 일대에서는 대리석·화강암 등이 많이 채굴되고 있으며, 군의 여러 곳에서 나는 형석은 질과 양에서 세계적인 자랑거리로 되어 있다.

6 문화재

- 태백산성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되었던 관계로 이 지역에는 평산면 산성리에 태백산성(太白山城), 마산면 다보산에 자모산성(慈母山城), 서봉면 철봉리에 철봉산성(鐵峰山城) 등의 성지가 있으며, 성내에는 당시의 시설물인 장대(將臺)·문루·군기고·창고지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태백산성은 대곡성·평산산성·성황산성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영조 때 개축된 것인데, 성내에는 태사사(太師祠)[5]라는 사당이 있는 등 매우 큰 규모에 속하는 산성으로 주목된다. 태사사는 신숭겸(申崇謙)·유금필(庾黔弼)·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의 신상(神像)을 모신 곳으로, 고려 때 창건되었다가 1796년(정조 20)에 사액되었다.

- 주필대
왕실의 유적으로는 남천읍 보산리에 있는 주필대와 인산면 기린리의 영소대를 들 수 있다. 주필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할 때 머물렀던 곳이다.

- 영소대
영소대는 병자호란 다음 해 이른바 남한산성조약에 따라 소현세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 왕자 일행이 중국 청나라로 끌려가 8년 동안 치욕적인 억류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서울로 향하던 도중 하루를 묵은 곳이다.

- 관북사, 북수사
원효가 창건했다는 인산면 기린리 성적산에 관북사와, 평산면 은담리 방원산에 있는 북수사(北岫寺)가 있다. 또한 서봉면 월봉리에서는 고려 후기에 속하는 종(鐘)이 출토된 바 있다. 금암면 제궁리에는 10∼11세기에 해당하는 청자도요지가 있다.

- 동양서원, 구봉서원
동양서원(東陽書院)[6]과 구봉서원(九峰書院)이 있다. 평산온천 부근에는 고려 말의 신안이 종신하도록 이 곳에서 머물며 조선에서 보내는 녹봉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의 배록동유허비(排祿洞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 멸악산
멸악산에는 주천자(周天子) 또는 여진(女眞) 금황제(金皇帝)의 시조묘라고도 전하는 천자묘(天子墓)가 있다. 멸악산은 멸악산식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갈나무를 비롯해 북부광엽수림(北部廣葉樹林)과 신갈나무가 섞인 혼합림으로 되어 있다.

7 출신 인물

- 유금필(庾黔弼)
- 이승만(李承晩)
- 조영남(趙英男)
- 신영균(申榮均)
- 넬슨 신

8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광복 당시 1읍 13면

  • 남천읍 - 신남천리에 군청이 소재한다. 경의선 남천역(북한 기준 평산역) 소재.
  • 평산면 - 1920년까지 군청 소재지였다. 태백산성이 있으며 경의선 평산역(북한 기준 태백산성역) 소재
  • 금암면 - 경의선 한포역 소재.
  • 서봉면
  • 안성면 - 경의선 물개역 소재
  • 문무면 - 북한 행정구역상 린산군의 중심지
  • 신암면
  • 세곡면
  • 고지면
  • 상월면
  • 인산면
  • 용산면
  • 마산면
  • 적암면 - 북한 행정구역상 봉천군의 중심지

9 북한 기준 행정구역

황해북도의 시, 군
개성특급시사리원시송림시
개풍군곡산군금천군린산군
봉산군상원군서흥군수안군
승호군신계군신평군연산군
연탄군은파군장풍군중화군
토산군평산군황주군장단군
  1. 북한 기준으로는 황해북도
  2. 북한 기준으로는 UTC+8:30
  3.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인구는 총 2,130호 6,323명으로 해주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다.
  4. 『고려사』 병지(兵志)에서는 개경에서 서북으로 나가는 금교도(金郊道) 관하의 16개 우역(郵驛) 가운데 금암·보산·안성·반석·기린·온천 등의 6개 역이 이 곳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암·보산·안성의 3개 역은 역정(驛丁) 75명씩을 배치한 일과역(一科驛), 즉 1등역에 속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5. 6·25전쟁 때 불탔으나 지금은 복구되었다.
  6. 6·25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