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역대 황제 | |||||
21대 경종 동무제 주상청 | ← | 22대 소종 영력제 주유랑 | → | 23대 평종 정무제 주본현 |
묘호 | 소종(昭宗) |
시호 |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 (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 |
연호 | 영력(永曆) |
성 | 주(朱) |
휘 | 유랑(永曆) |
생몰기간 | 1625년 ~ 1662년 |
재위기간 | 1649년 ~ 1662년 |
남명의 5대 황제로 재위기간은 1649년~1662년이다. 명나라 전체로 보면 제22대 황제이며 사실상 명나라와 남명의 마지막 황제이다. 묘호는 소종(昭宗), 시호는 광황제(匡皇帝), 정식시호는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이며 이는 뒤에 정성공이 묘호와 함께 추서한 시호이다. 연호가 영력(永曆)이라 영력제(永曆帝)라고 부른다. 만력제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사촌에 해당한다.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는 영명왕(永明王)의 지위에 있었다. 계단왕(桂端王) 주상영(朱常瀛)[1] 은 만력제의 7남으로 주유랑은 주상영의 4남이었다.[2]
1643년,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廣西)로 도망쳤다. 이 후 주상영이 사망하고 계왕(桂王) 지위를 세습한 둘째형도 사망하자 뒤를 이어 계왕이 되었다.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했다. 이 후 융무제 주율건이 청군에 생포되어 사망하자 조경(肇慶)으로 피신하여 1649년 황제로 즉위했다. 소무제 주율오와는 정통성 문제로 광주 삼천에서 대립했다가 대패하고 위기에 처했으나, 편리하게도 청군이 주율오를 발라버리고 멸망시켜 줬다.
이 후 정성공의 협력 하에 한때 광동, 광서, 귀주, 운남을 지배했다. 그러나 1650년, 청군이 경동과 계림을 함락시키고 1656년에는 주산 열도를 점령했다. 이 때 주유랑은 화남 일대를 방랑하다 1659년 운남까지 잃자 버마로 도주했다. 이 때 그를 따른 가신은 불과 65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왔다. 결국 청군의 위세를 무서워한 버마 왕에 의해서 곤명에 있던 오삼계에게 압송되었다.
오삼계는 청나라에 대한 본인의 충성심을 직접 증명할 요량이었는지 주유랑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을 모두 직접 목졸라 죽였다. 주유랑은 오삼계에게 "역적 상판 보기 싫다"며 빨리 죽이라고 했다고. 다만 오삼계도 얼마 가지 않아 천벌을 받는데,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가 일족이 몰살당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곤명에서 피살되었고 이로써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영력제는 일곱 아들들이 있었는데 모두 요절하거나 행방불명됐거나 오삼계에게 피살되었다. 나중에 오삼계는 삼번의 난을 일으킬 때 명나라 갑주를 입고 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배했지만 누구보다 앞장서서 역적질을 한 자의 거짓 코스프레를 믿을 사람이 있을 리가. 한편 부흥군 잔존 세력들은 주본현을 옹립했으나, 주본현은 겨우 2년 만에 죽었으며 이로써 남명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특기할 만한 이야기로, 운남에서 밀려나면서 정성공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 이르자 명 황조 재건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듯 뜬금없이 가톨릭의 교황에게 SOS를 친 것을 들 수 있다.[3] 남명 황실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가 주유랑의 태후 왕씨의 청을 받아들여 교황과의 연락을 주선한 것. '도와줘서 명나라 재건이 성공하면 황제인 내가 책임지고 솔선해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퍼뜨리겠다'는 파격적 조건까지 제시한 상태였으나, 당사자인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의 미온적 반응과 너무 먼 지리적 간극, 연락책을 맡은 보임(Boym) 신부의 죽음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것저것 여의치 않자 버마로 도망치듯 망명했으며 그 결과는 상술한 바와 같다.
태후 왕씨가 교황에게 보낸 구조 요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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