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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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왕국의 역대 군주
건국1대 조무왕 정성공2대 조문왕 정경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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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成功 (Zhèng Chénggōng) Succeed Jeong
1624년 8월 27일 ~ 1662년 6월 23일

나라 말기와 나라 초기의 군인, 정치가, 해적 또는 정씨 왕국(동녕왕국, 정씨왕조, 연평왕국)의 초대 국왕. 자는 명엄(明儼). 아명은 복송(福松).

평생을 반청복명(反清復明)에 바쳤으며 일명 국성야(國姓爺)라고 불리우는, 대만의 정신적 지주. 어머니는 일본인이며 고향도 일본이다. 이렇게 일본과 관련이 깊은 탓인지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다. 그가 태어난 나가사키히라도(平戶)에서는 그의 탄생 축제를 열기도 할 정도. 어찌 보면 한국인들이 고선지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기묘하게도 현대의 대만과 비슷한 이미지다. 중국인의 혈통이면서 대륙에서 밀려난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대륙을 차지한 거대 정권에 대항하고, 어쩐지 일본과도 관련이 깊다는 점 등….

2 생애

2.1 출생

아버지는 명 말기의 관리이자 해적이며 거상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며, 어머니는 히라도번의 번사 타가와 시치자에몬의 딸인 타가와 마츠(田川松). 일본의 히라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명나라(푸젠 성)로 왔다. 이 때문에 일본의 대만 통치기에는 '대만을 처음으로 정복한 일본인'으로서 선전되기도 하였다고. 그의 어머니인 타가와로 말할 것 같으면 정성공까들은 그녀가 창녀라고 주장했고 정성공빠들은 그녀가 덴노의 일족이라고 주장했는데 둘다 구라고 적당한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1] 한편 중국 측에선 정성공의 일본인 혈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타가와 가문이 사실 중국계 일본인 가문이거나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정지룡은 히라도의 영주인 마츠라가 주최한 연회에서 우연히 타가와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게 되는데 이는 장래가 창창한 정지룡과 인맥을 쌓고 싶었던 타가와가 계획한 만남이었다. 당시 타가와는 20대 초반이었는데 당시 일본인의 평균 연령을 생각해 볼때 미망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으며, 실제로 17세기에 정성공의 탄생 비화를 그려낸 책자들에서는 정지룡이 일본인 과부와 결혼하여 정성공을 낳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정지룡이 타가와와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을 때, 정지룡은 거상인 이단의 상단에 속해 있었다. 이단은 정지룡에게 자신의 부하인 안사제의 딸인 안씨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정지룡은 정성공을 임신한 타가와를 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안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타가와는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게 된다.

1624년 8월 정성공이 출생하게 되는데 행운의 소나무란 뜻의 복송(福松), 일본어로 후쿠마쓰라는 아명을 얻었다. 이 아명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한데 이를 중국 측에서는 복건성의 복자와 히라도 가문의 영주인 마쓰라 가문의 마쓰(송)을 따온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이 마쓰는 복건과 마카오의 중국인들이 신봉하는 바다의 여신 마쓰와도 발음이 같다. 일부는 여기에 주목하기도 한다. 또한 마쓰가 일본어로는 '기다리다'라는 뜻도 있는데 홀몸이 된 타가와가 기다린다는 의미로 붙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후 정성공은 어머니와 히라도에 살았는데 타가와는 정지룡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1629년 다른 남자와 정성공의 이복 동생인 시치자에몬을 낳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순간에 이단의 사망 이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복건성 앞 안해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어 왕으로까지 불리던 정지룡이 그제서야 자신의 동생 정지연을 히라도에 파견하여 정성공과 타가와를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타가와는 새 남편과 두번째 아이 때문에 중국행을 거절하였다. 이에 정지룡은 다른 동생인 정지아를 보내 타가와를 설득하는 한편 정 안되겠으면 정성공이라도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타가와는 7살 된 정성공을 아버지에게 보내게 된다.

2.2 성장

히라도의 거리에서 성장하던 정성공은 난데없이 정지룡의 궁궐과도 같은 집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7살이던 정성공은 당연히 향수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렸다고 대만외지를 비롯한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정지룡은 자신의 장남에게 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2] 큰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대목이라는 자도 내려주었다. 정성공은 15세가 될 때까지 안해의 정씨 가문 저택에서 성장하였는데 이 시기에 정지룡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라서 아버지를 자주 보진 못했고 중국인 유모와 계모, 그리고 정지룡의 삼촌들의 손에서 자랐다. 정지룡은 당시 명나라의 관리이긴 했지만 그는 밀수와 해적질로 쌓은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명나라에게서 관직을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성공은 그저 아버지를 명나라의 충신이자 수군제독으로만 알고 자랐다. 아마 아버지를 높여주려는 주변 인물들의 아부였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정성공의 훗날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돈과 군사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 즉 가문의 명예를 정성공에게서 얻고자 했다. 정지룡은 정성공에게 어렸을 때부터 유교 경전들을 가르쳤고 무술도 가르쳤는데 결과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2.3 반청복명 운동

1644년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이 몰락하자 아버지와 함께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남명의 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여 청에 대항하였고, 1647년에 아버지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한(참고로 정지룡은 이후에 아들인 정성공의 회유에 실패하여 참수당한다. 안습) 후에는 아버지의 세력을 이어받아 아모이 섬 인근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후에 무역을 통하여 군비를 충당하는 한편 에 맹공을 퍼부어 1659년에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진강을 비롯한 여러 거점을 점령한 다음에 남경(南京)까지 진격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대만을 지키고 있던 명나라 출신 항장들의 계략에 넘어갔고 병사들의 군기를 어설프게 잡는 통에 불만을 사서 반란 사태가 나는 통에 곧 청군에 패하게 되고 진강을 비롯한 주요 점령지를 모두 버리고 복건성 해안가의 근거지로 밀려나게 된다.

2.4 대만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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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1661년에 대만(정확하게는 지금의 타이난)을 공격, 네덜란드 제국 세력을 몰아내고 근거지로 삼는다. 이 시기에 많은 네덜란드 여자들이 사로잡혀 정성공의 부하들의 첩으로 배분되었고 정성공도 16살짜리 목사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 이들은 제란디아 요새 공방전에서 네덜란드와 정성공 간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부분 고향에 갈 수 있었지만 일부 여자들은 이미 중국인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일부 여자들은 이후 강희제의 대만 정복 시기까지도 대만에 살고 있었다 한다.[3] 강희제는 이에 맞서 해안의 5개 성 백성들을 해안에서 내륙으로 옮기는 천계령을 내려 대응했다. 그래도 대만에서는 네덜란드 인들이 남겨놓고 간 사탕수수 농장도 있었고 유능한 막료들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망하지 않고 잘 버틸 수 있었다.

남명의 황제 융무제는 그를 듬직하게 여겨 자신의 부마로 삼고 싶다고 했지만 딸이 없어서 대신 국성(國姓)인 주(朱)씨를 하사했다. 그리하여 국성야(國姓爺)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서양에서는 국성야라는 별명의 남중국 방언 발음인 콕싱아(Koxinga)로 알려졌다. 난터우 현에 궈싱이란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따온 것.

2.5 그 이후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에게 너네 '소왕국'을 정복할 수 있지만 불쌍해서 봐준다면서 순순히 조공을 바치라는 오만한 국서를 보냈다.타이완하고 필리핀 면적 차이는 안 보나? 이에 스페인 총독은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필리핀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대만의 경우처럼 중국인들이 필리핀에 있을 경우 병력이 분산되어 방어에 애로사항이 꽃핀다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중국인들을 추방했는데 그래도 재산을 가지고 갈 수 있게 허락하였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중국인들을 보복으로 몰살할 것이란 헛소문이 퍼져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에는 선교사들의 중재 하에 꽤 점잖에 끝났고 중국인들은 대만으로 떠났다. 필리핀 총독은 정성공을 해안의 지배자라고 부르며 예의바르지만 극도의 조롱을 담고 있는 국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쳐들어 올 수 있으면 오시지? 우리가 소왕국이건 대왕국이건 너네가 여기 쳐들어올 힘이 있기나 하냐? 듣자니 너넨 만주족, 네덜란드랑 죄다 원수졌다면서? good luck ㅋㅋ 그리고 너님의 무례 때문에 앞으로 너네랑 무역 안함. 하고 싶으면 사과를 하시든지."

이 답장을 받고 격노한 정성공은 필리핀에 중국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헛소문까지 듣고 분기탱천하여 만주족과 연합하여(!)[4]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에 병마에 시달리다가 이듬해인 1662년에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반청복명의 기치는 장식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영력제 이후의 새 명 황제도 옹립되지 않게 된다.[5] 오히려 정성공 사후엔 대만의 정씨 왕국은 청나라에 조공국으로 받아달라고 징징거리는 처지로 전락한다. 다만 삼번의 난 때는 청나라에 반기를 든 오삼계 세력에 호응했고 본토수복을 위해 군대를 보내 일시적으로나마 복건성을 다시 차지하기도 했으며 제후를 계속 자처했으니 반청복명의 기치를 완전히 때려치우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무역전담항인 인공섬 데지마가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설탕 등의 무역품목들을 독점하고 폭리를 취해 동지나해의 무역을 주름잡아 포르투갈네덜란드의 상인들이 반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되고, 이게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쳐 포르투갈은 아예 일본에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가 죽은 후 대만의 정씨 세력은 내분으로 인해 조금씩 몰락하게 된다. 손자인 정극상 대에 가서 세력이 완전히 분열된 뒤 1683년 청이 정성공 휘하의 장수였던 시랑의 지휘 아래 해군을 편성해 대규모 원정을 오는 바람에 정성공이 평생 꿈꾸었던 의 부흥은 물 건너 가게 되었다. 중화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 다만 청군도 정씨 가문의 충정을 높게 평가하면서 정성공 정씨 세력이 멸망할 때 정씨는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3 현대에서의 평가

사실상, 역사에 이름을 떨친 최초의 대만인.[6] 그래서 대만인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여 [7] 타이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학도 있다. 학교명은 국립성공대학.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대 중 하나이다. 참고로 대만에서는 대학교를 대학이라고 부른다. 중국 본토에서도 그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대만은 우리땅 → 우리 땅을 먹은 나쁜 네덜란드 놈들 → 나쁜 놈들을 조진 정성공은 영웅'이라는 논리.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물리치는 내용을 다룬 영화가 나왔을 정도. 위에 서술했듯이 어머니가 일본인이기에 일본에서도 추앙받고 게다가 현대 한국에선 인지도가 별로 없지만 과거 당시의 반청복명을 외치던 조선에서도 정성공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영웅

대만 해군의 호위함(frigate) 중에, 뻥궁 '청궁급(成功級)'(미 해군의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의 라이센스 생산)이 존재한다. 중국 해군은 이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포함하여 앞으로 취역할 항공모함시랑을 함명으로 붙이기로 했으나 결국 취소되고 실제 항공모함 이름은 랴오닝급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 해군에도 해사생도 훈련함으로 정성공함이 존재한다. 즉 양측 해군에서 모두 함명으로 붙여 기릴만큼 존경받는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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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臺南)에 있는 정성공을 모시는 사원)강용석 닮았다.

중국에서도 정성공 탄생 380주년인 2004년에, 정성공의 동상을 세웠다. 38미터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기마 동상'이었으나 2010년 40미터짜리 칭기스 칸 동상몽골에 세워지면서 기록이 깨졌다. 사실 38m라는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만 해도 48m, 세계 최대 동상인 중국 허난성의 황금 부처상 128m에 비교하면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2016년 대만 총통으로 당선 된 차이잉원이 정성공의 원주민 학살에 사과하는 등 찬양 일색은 아니다.[8]

사실 정성공 본인은 인성적으로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이나 대만이나 모두 동기나 기타 행적은 무시한 채 어쨌든 네덜란드 손에서 대만을 탈환했다는 사실 하나만 보고 영웅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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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0편의 스폐셜 시디부터 11편까지 미래무장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육손의 하위호환이다. 물론 육손의 하위호환이니 능력치도 좋지만 사실 정성공 본인의 행적을 보면 과분한 능력치다. 특히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9] 저 매력치는 과연... 사실 대만과 중국에서도 정성공이 위인이긴 하지만 특히 코에이가 일본 회사임을 감안하면 일본인 하프라는 혈통 버프가 능력치 고평가에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삼국지 10에서는 통솔 91/무력 68/지력 82/정치 84/매력 94에 특기 16개 특히 일부를 제외한 고대무장 중에세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1미래무장 고대무장(?)으로도 등장한다. 특기는 수신. 병종적성은 수군 S, 창극기는 A.

능력치는 90/72/80/85/93으로 그럭저럭 쓸 만하다.다만 수신이 물가한정으로 신급인게 문제지만

  1. 타가와 가문은 현재도 일본에 잘 살고 있다.
  2. 엄밀히 말하자면 타가와가 정성공을 임신했을때 정지룡 자신이 지어주었던 이름이지만 정지룡이 중국에 건너가면서 쓰인 적이 없는 이름이라 하겠다.
  3. 정성공 군대에게 사로잡혔던 네덜란드 여자들의 대우는 크게 세 분류였는데, 미혼인 장수들에게 분배된 미녀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기혼인 남자들에게 분배된 미녀들은 본처의 투기에 시달려서 혹독한 학대를 받았으며, 추녀들은 상대가 기혼남이거나 미혼남이거나 어떤 상황이건 아무도 신경도 쓰지 않아서 강화조약 이후 다른 여자들을 창녀라고 비난했다 한다(…).
  4. 정성공이 이쯤되면 맛이 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5. 정성공의 후계자인 정경이 새 명나라 황제 후보자를 왕으로 봉해 대접하긴 했는데.. 뭐...
  6.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대만의 각 지방의 지방사를 이야기 할 때 맨처음에 언급되는 인물은 대부분 이 사람이다.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하니...
  7. 물론 한족 입장에서, 민족의식이 강한 원주민들에게는 침략자다. 라지만 정작 대만 원주민들은 중국 국민당을 지지하며 정성공을 존경한다. 정성공을 침략자로 생각하는건 오히려 한족인 본성인쪽(....)
  8. 그래도 정성공은 대만을 정복하면서 명나라 유민 세력의 중국인들과 토착 원주민들인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고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다. 오히려 청나라가 대만을 다스리게 되자 본성인들은 본격적으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 원주민을 극심한 탄압과 학살로 죽이고 산골짜기로 몰아낸다
  9.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랑. 유능한 장수와 반목하여 청나라에 귀순하게 하여 스스로 패배 플래그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