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번의 난

三藩之乱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1 개요

삼번의 난 전체진행도

1673∼1681년 운남(雲南)의 오삼계(吳三桂), 광동(廣東)의 상지신(尙之信), 복건(福建)의 경정충(耿精忠) 등의 삼번(三藩)이 대만 정씨 왕국정경 등과 연합해 청(淸) 제국, 그리고 강희제(康熙帝)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이 전쟁이 청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됨으로서, 청은 진정한 의미의 중국 통일과 세계제국으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명청전쟁으로 중원을 확보한 이후 청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 중의 하나이다.

2 배경

2.1 한족 항장과 삼번의 성립

오삼계는 명말청초의 장수로, 명 말엽 숭정제의 지시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자 산해관의 문을 열고 청에 투항하여 이자성군을 격파했다. 이후 오삼계는 의 화남정벌에 적극 종군하여 남명의 세력을 모조리 격파하고 추적하여 운남에 이르러 결국 남명의 잔존세력을 전멸시키고 명의 황족들의 씨를 말렸다. 그는 이 공로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의 번왕이 되었다.

경중명(耿仲明)은 본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부하로,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도망 및 뇌물수수죄로 처형되자 이에 반감을 품고 공유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이끌고 있던 수군과 화포 등을 갖고 공유덕과 함께 후금에 귀순한 사람이다.[1] 귀순 당시 청태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총병관의 자리에 올랐고, 병자호란때에 도르곤 밑에서 강화도 공략을 맡았으며 입관 이후에도 화남에서 저항세력 정벌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정남왕(靖南王)이 되어 복건의 번왕이 되었으나 휘하 관리가 지은 죄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정남왕의 작위를 세습했으며 다시 경정충(耿精忠)이 이 자리를 세습했다.

상가희(尙嘉喜) 역시 모문룡의 부하로, 경중명과 달리 모문룡 처형 이후에도 군에 잔류하고 있었으나 원숭환에 대한 반감은 마찬가지였고 경중명의 반란이 실패하고 반란군이 후금에 귀순할 때 동참하여 역시 극진한 환대를 받고 병자호란과 북경 공략에 종군했고, 이후에는 광주 지역 공략에 전념하여 평남왕(平南王)에 봉해지고 광주의 번왕이 되었다.

이들 세 명은 청의 중국통일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에 종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청의 중국통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이들은 순치제 기간 동안엔 청 조정의 우대를 받았다. 이들 삼번은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는 특권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특권이 있었고, 2대 정남왕 경계무의 경우처럼 작위의 세습도 가능했다. 때문에 청 조정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을 화석건녕공주와 혼인시키는 등 삼번왕의 아들들을 공주와 혼인시키며 우대하는 동시에 북경에 머물게 하여 인질로 삼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삼번은 서로 자기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골몰했다. 삼번은 자신들의 직할병력을 늘리고 세수지역을 임의로 넓히는 등 적극적 상행위로 재정을 늘렸으며, 주변 각 성의 인사권에도 개입하여 북경의 황제와 조정이 인사를 결정하기도 전에 삼번에 의한 추천인사가 올라오는 지경이었다.

청으로서는 삼번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통제불능이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니꼽긴 해도 일단 삼번은 대륙통일에 있어 최고의 공신들이었다. 경중명과 상가희가 없었다면 청은 수군을 얻지 못하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며, 오삼계의 투항으로 인해서 쉽게 산해관을 넘을 수 있었다.

2.2 강희제의 등장과 철번, 오삼계의 궐기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구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尙之信)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상가희로서는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상가희의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철번 고고씽을 외치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정씨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 저대로 냅두면 나라 망함. 그리고 재네 인질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일으키고 설사 반란일으켜도 오삼계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반란가담 안함.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순무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2]

3 전개

3.1 전반기(1673~1675)

삼번의 난 전반기 형세도

반란 직후, 강희제가 내려보낸 운귀(운남, 귀주)총독 감문혼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운남, 귀주 양 지역에서 황제가 임명해보낸 총독의 명을 받드는 관료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오삼계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총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되는 상황에 빠져버리자 절망하고 가족들과 함께 자결했다. 그만큼 운귀 지역은 수십년동안 오삼계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철저한 오삼계의 세력이 되어버렸다.

한편, 철번을 위해 내려왔다 간신히 반란군의 손길을 피한 관료들이 반란 11일만에 중국 남쪽 곤명에서 수도 북경까지 밤낮없이 내달리는 처절한 레이스 끝에 반란사실을 보고하자 청 조정은 멘붕에 빠져 철번을 주장한 관료들을 모조리 숙ㅋ청ㅋ하고 철번을 물리고 오삼계에 화해를 청하자고 주장했다. 강희제 본인도 설마 오삼계가 실력행사로 나올줄은 예상 못해 당황했으나 이내 곧 침착을 되찾고 조정 내 화의파를 닥치게 한 다음 반란 토벌을 선언하고 반란 토벌의 격문을 띄웠는데 그 내용은 오삼계 너님은 명 부흥을 대의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 손으로 명 멸망시킨 놈이 어디서 개소린가여? 너님은 명에게도 반란군, 우리에게도 반란군이며 아무런 대의도 없음.으로 오삼계의 대명의 복수라는 논리를 완전히 논파했다.

그러나 전쟁은 말싸움으로 되는 게 아닌 법. 1674년 초, 오삼계는 직접 군을 이끌고 호남호북[3]으로 진격하여 총병관 체세록을 생포하고 정부군을 격파하며 순식간에 창사를 점령하고 호남을 휩쓸며 강서성으로 가는 길목을 열고 북으로는 무창에 이르렀다. 뒤이어 사천성에서도 오삼계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사천마저 오삼계의 손에 떨어졌다.

이에 강희제는 내응을 우려하여 북경에 있던 오응웅[4]을 교수형에 처하고, 군을 재정비하고, 경정충과 상지신에게도 급히 사신을 보내 나님이 어리고 우둔해서 좀 경솔했음. 철번 취소임여 님들 거기 계속 먹으셈.으로 철번을 취소하며 두 번의 반란 가담을 막고자 했다. 동시에 명에서 투항한 항장들 다수가 각 지방의 총독, 순무를 맡고 있어 반란에 줄줄이 합류할 가능성이 보이자 역시 칙령을 내려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충성하여 반란군 토벌에만 전념하라고 격려하며, 오삼계의 반란이 삼번의 반란이나 반청복명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674년 3월 결국 정남왕 경정충이 근거지 복건에서 반란에 가담, 절강, 강소 두 성까지 휩쓸고 대만 정씨 왕국의 지원까지 받기로 하면서 상황은 강희제가 의도와는 다르게 서남과 촉에 국한되는 게 아닌, 화남 전역을 휩쓰는 대규모 전란으로 발전했다. 아울러 사천 지방이 오삼계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오삼계는 사천에서 한중을 거쳐 중원으로 나아가는 북벌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섬서총독 왕보신이 반란을 막기 위해 온 조정 중신과의 반목과 불화로 인해 반란에 가담하면서 섬서성 대부분이 오삼계군에 떨어지고 서안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가희는 철번 명령을 수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심 강희제에 대한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때문에 철번을 진행하기 위해 광동으로 왔던 호부상서 양청표 등 조정 인사들은 상가희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오삼계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상가희가 조정 인사들과 만나자, 양청표는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서 위의 철번 취소령을 말해주고, 강희제가 상가희를 깊이 신뢰한다고 말했다. 불만이 있긴 했지만 반란 자체에도 회의를 가졌던 상가희는 이를 계기로 조정 편을 들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상가희는 결국 강희제와 청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는 상주를 올려 강희제를 기쁘게 하였다. 상가희가 청에 충성한다는 것은 삼번 전체가 반란에 가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과 동시에, 평남왕과 광동군의 군사력을 반란 진압에 투입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백전노장 오삼계에 맞서 제대로 된 실전경험이 없어 연전연패중인 무능한 지휘관들과 달리 군력에서 오삼계와 맞먹는 상가희를 맞수로 투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강희제는 상가희에게 주변 지역 인사권, 군사권, 단독작전권을 모조리 보장해주고, 상가희가 원하는대로 차남 상지효를 후계자로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전략적, 지리적 측면에서 상가희의 광동은 서쪽으로는 오삼계의 운귀지역, 동쪽으로는 경정충의 복건, 북쪽으로는 오삼계가 점령한 호남에 둘러싸여 청 중앙군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와중에 광동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상가희는 본래 장남 상지신을 후계로 하려고 상주를 올렸다가 전란의 와중에 상지신에게 실망하여[5] 차남 상지효를 새 후계로 삼고 강희제의 승인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상지신은 마침 상가희가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하고 오삼계와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안록산?

상가희는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자결 자체는 가족들이 발견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국 건강을 해쳐서 병으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의 유언도 '황제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적을 무찌르지 못하고 죽으니 큰 허물이 남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엔 혼백이라도 황제를 섬길 것이다'라며 강희제에게 충성한다는 내용을 남겼다.

이로서 강희제가 그토록 염려하던 삼번의 동시 반란이 현실화하는 것 같았지만...

3.2 후반기(1676~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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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번의 난 후반기 형세도

강희제는 오삼계군의 중원 진출을 막기 위해 서북전역을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무위대장군 도해(圖海)를 임명하였고 도해는 한중을 넘어 진격해온 오삼계군을 격퇴하는 것과 동시에 감숙성의 반란군 거점 평량을 함락하고 반란에 가담한 섬서총독 왕보신을 온갖 지극정성으로 회유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상황을 참작한다며 설득, 끝내 왕보신의 항복을 받아내고 반란이 화북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며 중원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복건의 경정충을 이탈시키기 위해 1676년에 절강성을 향한 집중공세를 개시하며 항복을 제안했다. 이때 경정충은 대만 정씨 왕국의 뒤치기로 영토 일부를 뺏기기도 하는 등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청의 집중타를 맞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강희제는 이 날을 위해 오삼계의 아들은 처형시켰음에도 경정충의 아들들은 나중에 죽일 생각으로 억류만 하고 있었고, 이에 한치 앞을 못 보던 경정충이 항복을 택했다. 물론 강희제는 경정충과 그 일족을 당연히 처형했다.

뒤이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광주의 상지신도 항복했다. 애초에 상지신은 양쪽 사이에서 간을 보는 처지였기에, 오삼계 군의 광동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오삼계의 병력지원 요청을 무시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경정충이 항복하자 즉시 오삼계 편에서 이탈하며 자신의 왕위와 번의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을 한 것이다. 그래도 상지신은 이 덕택에 일족을 보전할 수 있었고 본인도 곱게 죽긴 했다. 상지신은 반란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지위 보전이 목적이었기에 강희제는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었고, 연좌도 하지 않았다. 결국 상지신이 1667년 5월 항복하면서 반란은 다시 삼번의 난에서 오삼계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삼번 가운데 2개 번을 이탈시킨 청조는, 중원-한중-사천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산악 험로를 포기하고, 대신 오삼계가 점령하고 있던 호남, 호북으로 공세를 집중했으나 동정호 전투나 창사 전투 등에서 크게 패하여 막히고 있었다. 그러나 오삼계군의 초반 기세가 사라진 것은 명백했고, 이제 주도권은 청이 쥐고 있었다.

오삼계는 이러한 상황을 정치적으로 뒤집기 위해 호북성 형주를 창천부라 개칭하고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로 하고 1678년 3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8월, 달랑 5개월동안 제위에 있다가 노쇠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손자 오세번(吳世藩)이 주의 2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카리스마있는 지도자 오삼계가 죽으면서 막강한 오삼계군의 유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각지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다시 청조에 투항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세번은 불리함을 깨닫고 본거지인 곤명으로 후퇴하며 방어전으로 전환했고, 78년 말엽이면 청조는 마침내 호남, 호북성을 완전히 탈환하기에 이른다.

결국 1681년 마지막 총공세가 펼쳐지면서 사천 지방이 청조에게 넘어가고, 근거지 곤명까지 청군이 밀려오자 오세번은 자살, 곤명이 청군에게 함락되고 오삼계 일족이 멸족되면서 삼번의 난은 종결되었다.

4 반란은 왜 실패했는가?

불과 1~2년만에 오삼계군은 화남을 휩쓸고 장안까지 넘볼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으나 이러한 전성기는 몇 년 가지 못하고 너무 쉽게 패망했다. 청의 베테랑 장수들이 모두 죽거나 일선에서 은퇴하여 군사작전에서 오삼계군에 고전을 면치 못했음에도 이리 쉽게 무너진 건 다음과 같다.

첫째, 오삼계군에게는 대의명분이 없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결국 운남과 귀주의 번왕으로서 자신과 자기 가문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일 뿐이었기에 다른 번이나 청조에 투항한 항장, 유신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할 동기가 없었다. 오삼계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남명 소종 영력제 주유랑의 묘를 참배하고 눈물을 흘리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지만, 본인이 주유랑 뿐만 아니라 그 일족을 직접 목졸라 죽여놓고 15년 뒤에 흘리는 거짓눈물에 감동할 정도로 백성들과 명의 유신 및 장수들은 바보가 아니다.

실제 오삼계는 반란의 대의명분으로 대명의 부흥, 복수를 내걸었으나, 명의 유신과 백성들은 산해관을 열고, 남명을 직접 멸망시킨 작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오삼계 및 그 군과 유대관계가 얽힌 경우를 제외하면 청에 항복한 명의 항장이나 유신들이 반란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백성들 또한 지지하지 않았다. 청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재야에 묻힌 명의 유신들을 오삼계군이 초빙하려 했으나 대답은 한결같이 역적에게 충성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둘째, 애당초 삼번이 합심하고 계획적으로 일으킨 반란도 아니었다. 공식적으로야 삼번의 난이었지만 광동의 상가희는 오히려 초반에 적극적으로 반란을 토벌하려 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상지신도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에서 반란에 가담했다고 선언했을 뿐 실제로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채로 청조로부터 자신의 작위를 인정받는 걸 목적으로 했다. (실제로 그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바로 청조에 항복했다.) 복건의 경정충은 상지신보단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했으나 대만 정씨 세력의 뒤통수를 맞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반란에 참여하진 못한 채 결국 제일 먼저 청에 항복했다. 차라리 이들이 합심해서 반란에 나섰더라면 당시 청의 상태 및 후방에 있는 조선의 반청 감정 등을 고려하건대 의외의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는 말처럼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도 삼번의 난을 이용해서 대만 정씨왕국이나 삼번과 호응하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 되려 호응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셋째, 명장이자 반란의 중추이던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킨 시기에는 너무 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난을 일으킨 지 얼마도 지나지 않아서 일찍 사망한 것도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당시 청나라 황제가 다른 인물도 아닌 강희제였다.

5 결과

오삼계는 부관참시당하고, 그 일가는 전원 멸족되었으며 번은 철번되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애당초 다른 번들도 존속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다른 번들의 말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평남왕 상지신이 북경에 압송되어 자살명령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반란에 가담한 혐의 외에도, 항복 이후에도 황명을 씹고 반란토벌에 가담하지 않은 죄가 걸려있어서 얄짤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 상가희가 죽을 때까지 청조에 충성했으며 반역 자체를 장남 상지신 혼자서 주도한 것, 그리고 상지신이 처음부터 자기 지위 보전이 목적이라 전면적으로 반역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바로 항복한 것이 참작되어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는 한편 나머지 가족의 죄는 묻지 않았다. 실제로 상지신의 차남 상지효가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북경에 오자 강희제가 직접 맞이하기도 했으며, 상지신에게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치러 주도록 했다. 물론 죄가 오삼계와 동급이던 정남왕 경정충과 그 일족은 애당초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일족들 역시 빼도박도 못하는 적극적인 반란 가담 혐의가 걸려 역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경정충은 대역죄인에 내려지는 능지형을 받았다.

이로서 강희제는 목표로 한 삼번의 철폐를 큰 희생 끝에 이뤄내고 중국 전토에 대한 직접 지배에 나서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전쟁의 여파로 경덕진이 쑥대밭이 되버렸다. 덕분에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하던 유럽인들은 다른 매입처를 찾아야했고, 그 후보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일본이었다[6].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던 국가로 조선도 있긴 했으나 지리적으로 볼 때 유럽 상인들이 가까운 일본을 거르고 왕래가 없던 조선을 택하기란 불가능했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으로 한동안 일본산 도자기가 유럽 시장을 휩쓸었고, 18세기에 접어들면 유럽의 도자기 시장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자체적으로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추기 시작한 (본차이나 등의) 유럽산으로 삼분된다.

한편 당시 조선은 윤휴가 북벌을 주장하던 시기와 맞물리는데 윤휴가 북벌을 주장한 까닭중 하나가 "오랑캐들을 봐라 지금 삼번이 저 난리를 친다. 우리도 협력해서 치욕을 씻자!"이것이었다.
  1. 이 때의 반란 때문에 조선도 명으로부터 반란 토벌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공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이 때문에 후금에게 밉보이게 되었고, 훗날 청태종이 '명나라랑 친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고 꼬장 협박을 하는 이유가 된다.
  2. 그런데 산해관을 열어 청을 맞이한 것도, 남명의 저항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오삼계다. 오삼계는 염치도 없이 궐기문에서 “자신은 그냥 오랑캐의 힘을 빌어 이자성 반란군을 물리치고 영토 좀 내주고 끝내려 했는데 오랑캐가 멋대로 대륙으로 들어왔다”는 변명을 내놓았다지만 이걸 그대로 믿을 만큼 바보같은 인간은 없다.
  3.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삼국지에서 유표가 다스리던 그 형주다. 호북은 형주 북부, 호남은 형주 남부 4군.
  4. 오응웅은 오삼계의 맏아들이다. 청태종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했고, 맏아들은 오세번, 차남은 오세림이다. 오세번은 북경탈출에 성공했으나, 오세림은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보다 어린 아들들은 궁형을 받고 내시가 된다.
  5. 상가희는 위에 언급한 양청표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연회를 열고, 자식들과 휘하 장수들이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하도록 했다. 그런데 상지신은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를 하려 들지 않았고, 이에 상가희는 크게 화가 난 나머지 상지신의 손을 깨물어 버리고 '소인은 폐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라며 사죄한 일도 있었다.
  6. 이때까지만해도 유럽은 도자기의 제조 능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