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다 히로

小野田 寛郎
Hiroo On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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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군 장교. 최종 계급이 소위이며, 필리핀 전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일본군 장교 같지만... 1945년 종전 후 1974년까지 무려 29년동안 종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홀로 싸워온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항복(?)을 하고 일본에 돌아오게 됐지만,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종종 각종 매체에서 화자되곤 한다.

2 일본 패전 전까지의 이력

오노다는 1922년, 와카야마 현 카이소 군의 마을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중학교 졸업 후에 민간 무역회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중국어 등을 습득하였다고 한다. 이 때 이미 다른 형제들은 전부 군사학교 등을 졸업하고 군 장교가 되었으며,[1] 그 와중에 혼자 민간회사에서 일하는 덕분에 오노다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관심을 못 받은 것 같다.

그러던 도중 1942년, 징병검사를 받고 이등병으로 입대를 하게 된다. 거기서 무역회사 일을 하면서 배운 영어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육군학교에 입학, 졸업 후에 견습사관(현대 계급으로는 상사에 상당)을 거쳐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게 된다.[2]

이후 1944년 12월 필리핀 마닐라 근처 작은 섬인 루방 섬에 지휘관으로 파견된다. 이 때 사단장이었던 요코야마 시즈오가 오노다에게 직접 내린 명령이,

옥쇄는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3년이건 5년이건 버텨라. 반드시 지원을 가겠다. 그 동안 병사가 한 명이라도 살아있으면, 야자수 열매라도 따먹으면서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옥쇄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었다. 이 때문에 아래 서술할 참극(?)이 일어났다.[3]

이 때 오노다는 수백명의 병사를 휘하로 두고 있었으며,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결사항전의 의지로 사수를 하게 된다. 1945년 초, 필리핀 탈환전의 일환으로 미군이 함포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상륙해 오자, 크게 피해를 입고 휘하 군대가 반쯤 와해되어서 일부 부하들과 함께 섬 안쪽인 산속으로 패퇴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반쯤 빨치산화되어서 국지전을 계속 벌이게 된다.

3 패전 후

그러던 중 1945년 8월, 일본이 결국 패전하게 된다. 미군은 이 사실을 삐라를 통해 산 속에 남아있던 일본군 패잔병들에게 알리고, 실제로 많은 수의 패잔병들은 그 삐라를 보고 투항했지만, 오노다와 그 휘하의 일부 병사들은 '이것은 악랄한 미제놈들의 프로파간다이자 기만책이다'라고 생각하고, 투항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가만 냅두면 미군이나 일본, 무엇보다 필리핀 정부측에서도 골치아파지므로, 어떻게든 오노다를 투항시키려고 했다. 종전 다음해인 1946년부터 전쟁 중 오노다 휘하의 부하였던 사람을 섭외해서 전쟁은 끝났다고 설득하거나, 아예 오노다의 친인척까지 직접 데리고 와서 꾸준히 설득해보지만, 이마저도 오노다는 미군의 기만책으로 여기고 투항을 거부했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생존을 위해 식량 등은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종종 하산해서 유격전 훈련이라는 핑계로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물론 이를 본 필리핀 정부는 가만 있지 않고 토벌대를 보내서 일본군 잔당 퇴치작전을 벌이며 대적했다. 이를 보고 오노다는 역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하기도 한다(...) 그렇게 끈질기게 대치하던 상황에서 1954년 자신의 휘하 부하이던 시마다 오장이 사살당하고, 1965년에는 마지막 남은 휘하 부하인 고즈카 일병이 사망하면서 결국 홀로 남게 된다. 하지만 종종 루방 섬 상공을 지나다니는 비행기를 공습으로 착각하고, 단파수신기를 통해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군용 전파를 잡는 등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후에 밝혀진 바로는, 토벌대가 일부러 당시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 등을 남겨 오노다에게 보게 하면서,[4] 전쟁은 끝났고 일본은 재기중이라는 메세지를 간접적으로 보내기도 했지만, 그를 본 오노다는 우리 조국인 일본이 이렇게 번영할 리가 없다면서 '이미 일본은 미국의 괴뢰정권화됐고, 만주 지역에 망명정부를 세운 게 분명하다'라는 식으로 심각한 오해를 하게 된다(...)

만약 상황이 쭉 이 대로 갔으면 오노다는 크게 알려지지도 않고 홀로 죽었을 테지만, 1974년 스즈키 노리오라는 탐험가에 의해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스즈키는 '남방군도에 구 일본군 패잔병이 아직도 살아있으며, 홀로 투항 중이다'라는 소문에 흥미를 느껴 수소문을 한 끝에 오노다를 만나게 된다. 스즈키는 침착한 언행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끝내 오노다는 일본의 패전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오노다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직속 상관이 직접 와서 항복 명령을 전달하기 전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다라는 조건을 걸었고, 일본 정부측에서도 이를 가만 두면 굉장한 골치거리가 될 게 뻔하기에(...) 어렵게 수소문을 한 끝에 전쟁 당시 오노다의 직속상관 중 한 명[5]을 통해 투항명령서를 전달하면서 결국 자신만의 전쟁을 끝내게 된다. 패기 넘치게 직속상관한테 명령 받아오라고 하는 쏘가리나, 그걸 또 들어주는 일본 정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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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투항 당시 오노다 소위.

위에서 서술한 대로 오노다는 산 속에 숨어살면서 약탈을 자행해 많은 필리핀인들에게 상해를 끼쳤지만,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6] 모든 죄를 대통령 명령으로 특별사면하고 일본으로 송환시켰다고 한다.

일본에 귀국한 직후, 전후 패전 컴플렉스에 사로잡혀있던 일본인들, 특히 일본 우익인사들에게 '살아있는 일본 정신', '진정한 사무라이' 등으로 칭송을 받으며 거의 영웅 대접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필리핀의 정글 속에서 30여년을 살아온 오노다는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떠나 목장을 경영하다가, 말년에 일본에 들어와 각종 보수파 인사들과도 교류를 가지다 2014년 1월, 도쿄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여담으로, 구출 당시 오노다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고, 각종 군장들도 전시상태에 알맞게 제대로 정비되어있었다고 한다. 또한 트랜스 라디오를 개조해서 단파수신기로 만든 후 방송되는 주변 정세를 듣는다던지, 야생의 야자수 등을 섭취해서 영양학적으로 고른 식사를 유지했다던지 하는 면을 보면 거의 맥가이버 수준(...) 참전당시 가족이 죽은 상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도 동료도 없이 타지에서 30년이나 힘겹게 살아갔던 걸 보면 정신력도 충성심도 뛰어난 사람이었을지도.

4 참고 문서

  1. 이미 이때쯤 슬슬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화가 급속화되던 시절이라, 제대로 된 학교를 나와서 장교로 임관한다는 것은 당시 출세의 지름길, 즉 엘리트 코스 중 하나였다.
  2. 현대 한국군의 부사관장교 사이의 상호존대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군에서는 부사관(하사관)을 장교 밑 계급으로 보는 시선이 강했다. 한국군만 해도 1980년대쯤까진 이런 풍조가 만연하다가 서서히 개선된 것.
  3. 옥쇄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 일본인들 사고방식으로는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 그나마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는데, 그마저 사단장 명령으로 금지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말고 사수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 도카이도 신칸센의 개발이나, 당대 일본 황가의 사진 등 일본이 건재하고 있다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고 한다.
  5. 이름은 다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로, 종전 시 계급은 소좌(소령). 종전 후 서점을 운영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전후 30여년이 지났기 때문에 상당히 고령의 노인이었다. 그래도 워낙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고, 그나마 한때 전우였던 부하를 냅둘 수 없어서 힘든 몸을 이끌고 직접 루방 섬까지 갔다고 한다.
  6. 당시 필리핀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빌려 썼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 문제에 큰 소리를 못 냈다고 하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