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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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에서 수천명을 구한 일본군 장교와 같은 유언비어는 듣도 못한 소리다. 만약 이게 거짓이면 난징 대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엄청난 고인드립이다.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해 출처 제시가 필요하다. 이미 리그베다 위키 시절, 이 항목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했었다.

일본군의 여러 인물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1 성인들

인명을 구한 위대한 성자들. 영웅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막장들만 사는 나라는 아니었다!

일본 제국리투아니아 영사관 영사로서 독일로부터 수천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린 인물이다. 당시 영사관 직원은 군인을 겸했다. 오오시마 히로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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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군인. 군인으로서는 무능했다. 이 사람이 바로 할힌골 전투의 기획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유대인과 조선인의 인명을 구한 영웅이자 성자. 유대인 2만 명을 구했으며 싱가포르 화교 학살 당시 출장 중이었던 야스에가 학살 담당자에게 뇌물을 건네주고는 300명의 사람들을 구출해낸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건국 공로자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에 일본군 위안부 금지는 물론이고 조선인 징용자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 복어계획의 관여자이다."이스라엘 만주에 세워질뻔 했다" 中 언론 비사 공개

  • 이마이 다케오(今井 武夫, 1898-02-23 ~ 198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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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최고의 인도주의자. 중일전쟁을 빨리 협상으로 끝낼 방법을 연구하였지만 삼국동맹 체결 때문에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제14군으로 배속되어 당시 바탄에서 미군과 사투를 벌여 승리했으나,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에 의구심을 품고 자기가 잡은 미군 포로들을 무장만 해제한 뒤 석방했다. 참고로 이 명령은 대본영에서 내려온 포로 감시를 엄중히 하라는 명령을 츠지 마사노부가 왜곡한 것이였다. 한마디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대본영의 명령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고, 이 사람은 사실상 최고 통수 기관의 명령을 거스르고 포로들의 목숨을 구한 엄청난 용자인 셈이다. 그 뒤 마닐라 방위 사령관으로 루손 섬을 안정시키고 대동아성에 배속되어 난징 괴뢰 정부에서 재직하였다. 국부군과 협상하여 휴전 협상을 국부군 측 대표인 허잉친과 만나 단번에 성사시켰다.

패전 후에는 허잉친에게 억류되었지만 허잉친이 그를 전범 취급하지 않고 훈방한 뒤 적극적으로 그와 함께 중국 거주 일본인 귀환을 주도하여 소련으로 끌려가거나 중공에서 남아 혹독한 삶을 보낸 만주국 거주 일본인과는 달리 200만의 일본인을 귀환시키고 본토로 복귀했다. 1982년 85세로 사망했다.중일화평공작의 기록

복어계획의 창시자.

유대인을 2만 명이나 구해낸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난징 대학살 때 "모든 인간을 죽여라"라는 공지에 의문을 품어 포로 1,500명과 민간인 30,000명을 석방했다고 서술한 자가 있는데 관련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위키게시판에서 이 문제가 논의돼서 확인작업을 거친 결과 영어판이나 다른 나라 언어로도 난징 대학살 관련 언급이 없었다. 날조이자 반달이라고 결론이 났다. # 이 인물이 난징 대학살에서 선행을 했다는 소문은 인터넷에 퍼져 있는데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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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소위, 전 일본 변호사회 회장,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의 창시자. 치치지마 식인 사건 당시 검도 2단이라는 이유로 워렌 본을 참수시키도록 명령받았지만, 학도병 출신 중 검도 4단이 있다는 걸 알고 역할을 떠넘겼다. 사실 어찌보면 이 행위 자체는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분이 몸담았던 부대의 지휘관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새끼였다는 걸 감안하자. 그러나 인육은 끝까지 먹지 않았는데 육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이 엄청나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육지에서 나는 고기는 입도 대질 않았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운의 군인일 수 있으나 731부대의 만행을 까발린 분이시며,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했었고, 상술했듯 위안부 수요집회를 만들어낸 분이시다. 2009년 신장암으로 영면하셨다. 2007년 인터뷰 전쟁 중에 인명을 구하지는 못하셨지만, 전후의 행적을 보면 충분히 성자라 불릴 만한 분이시다.일본판 수요집회의 창시자 츠치야 코우겐

일본의 군의관 대령이자 소록도 병원의 2대 원장으로 일본의 이태석이자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 그가 소록도에 오자마자 한센병 환자들에게 한국식 솜옷을 입게하고 가족 면회도 허락해 주었고, 무엇보다 3년제 학교를 세워주었다. 하나이 원장은 부임 그 다음 해 1922년 10월 8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던 일본 성결교회 목사인 다나까 신사부로(田中道三郞) 목사를 초청해서 복음을 전하도록 했고, 그 열매로 소록도교회를 창립하도록 했다. 병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하나이 원장은 신사를 예배 처소로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이어 1928년에 북쪽 병사(구북리)에 지금의 북성교회를 세웠고, 남쪽 병사(남생리)에는 지금의 남성교회를 세웠다. 복음이 선포되면서 눈물의 소록도는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넘치는 은혜의 동산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병환자의 대한 이해하기 위해 나병환자랑 같이 있고 나병에 직접 걸리려고 까지 했으며 병원의 수용 능력까지 엄청나게 불어나서 결국 과로와 나병이 한꺼번에 겹쳐서 소록도 병원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리고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과 주민들이 그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시이 시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비교 자체가 신성모독이지 그에 관한 이야기하나이(花井善吉)원장 창덕비 건립(1930. 9.)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의 사후, 3대 원장인 스오 마사히데 시기부터 소록도 병원의 운영이 막장화되어 무려 해방 이후의 군사독재정권기까지 소록도한센병 환자에 대한 갖가지 잔혹한 인권탄압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나이 선생의 평생에 걸친 노력과 헌신이 모조리 허사가 된 것이다.

2 저항자들

끔찍한 전쟁을 멈추기 위하여 군부 정권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이 시대의 진정한 양심이자 용감한 영웅들.

다이쇼 덴노의 3남으로, 히로히토 4형제 중 셋째이며, 다음에 나올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의 바로 윗 형. 동생도 개념인이지만, 형도 그에 못지 않은 개념인이다. 그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을 때 평화론을 주장했다.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쿠데타를 거부하는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 것을 뛰어넘어, 다카기 소기치 등과 함께 도조 히데키의 암살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큰형인 히로히토와 갈등을 많이 일으켰으며, 패전 후에는 히로히토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 황실 내에서는 황족이라는 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평민 출신의 조카며느리와 그 친정아버지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척 무시했다. 본인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 황실의 전통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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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2013년 장남 토모히토 친왕의 사망 1주기 추도식, 아래는 2014년 6월 8일 차남 요시히토 친왕의 조문을 마치고 차로 이동 중인 미카사노미야.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부부가 다 휠체어를 타고 있다(…). 타카키 유리코(高木 百合子, 1923-06-04 ~) 친왕비는 이제 91세인데, 아들 3명을 연이어 떠나보낸 슬픔에 노부부의 기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의견이다. 2012년까지는 걸어다니기도 했는데조카질부가 왔을 때 일어서는 걸 보면 아직 자가 거동은 문제 없는 듯하다.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막내아들, 히로히토 4형제 중의 막내, 그리고 일본 황족 가운데 몇 안 되는 초 개념인.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해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전쟁 전부터 일본군의 만행을 잘 알고 열띤 비판을 했으며, 전후에는 일본군의 악행(특히 난징 대학살)을 솔직히 인정한다.

어느 청년 장교들이 그에게 쿠데타를 종용했으나, 겁을 먹었는지 이를 거절했고 이를 알렸다.

그러나 다카히토는 자신이 쿠데타를 벌였더라면 수많은 인명을 살렸으리라 생각했다. 정말 그가 덴노를 했더라면, 일본군이 일으켰던 각종 전쟁들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여담이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이 사실을 알고 이들에게 교수형을 내리려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했다.

전후 도쿄대학에서 동양사를 공부했는데, "진무 덴노는 신화이며 역사가 아니다"라고 강변해 빨갱이 왕자님(赤い宮様)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1915년생인데 2016년 현재까지 살아있는 일본 황실의 최연장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친왕이 사망한 1988년에 이미 74세다. 일본 황실에서 많이 개혁적인 사람은 오래 산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안타깝게도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아들들을 먼저 보냈다. 2012년에 차기 미카사노미야 당주였던 장자 토모히토 친왕이 사망하여 그 1주기2주기 추도식에 부모가 참여하게 되었고, 2014년 장애를 가지고 있던 차자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마저 사망해 또 부모가 장례식에 참여하게 됐다. 친한파이자 나루히토 황태자에 비견될 정도로 국제정세에 밝았던 막내 노리히토 친왕은 이미 2002년에 사망, 이 때문에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단절될 예정이다.

여담이지만 어째 다카히토 친왕의 근영을 다루는 블로그들이 하나같이 수꼴이다. 존경하는 친왕님이 하는 짓은 눈에 보이질 않는다. 그저 피를 찬양할 뿐...

참고로 따로 언급이 되지 않은 둘째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 雍仁, 1902-06-25 ~ 1953-01-04) 친왕조차 군인 신분(육군 소장)이었지만, 대외적으로 활동이 많은 '스포츠 애호 친왕'이라고 불렸다. 전쟁기간에는 결핵 때문에 시골에서 요양을 한다고 군무에 종사하지 않았기에 전쟁수행과 범죄에 대해 관련은 없다.

일본 육군 소령으로 도조 히데키 암살 작전의 주모자. 뿐만 아니라 도조를 암살한 후에 훗날 수상을 역임하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미카사노미야 친왕과 이시하라 간지가 연루되어 있다고 한다. 다만, 두 사람에게는 처벌이 없었다고 한다. 출처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용자 방송국 TV 도쿄 창업주 되시겠다. 또 여담이지만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있다.

  • 히라바야시 모리토(平林 盛人, 1887-11-10 ~ 196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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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사단장. 자신의 부대에 일본군 위안부를 전면 금지시킨 인물이다. 중일전쟁에 회의적이었으며 주둔지에서 태평양 전쟁 개전 소식을 듣자 장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한탄했다.

중일전쟁도 수렁에 빠져 있는데 영미와 전쟁을 할 여유가 있는가?

태평양 전쟁 개전을 하면 1년간은 우세하지만 그 이상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
노후화된 우리 장비로 최첨단화된 장비로 무장한 영미를 꺾을 수 없음은 이미 노몬한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또한 도조 히데키를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그 당시 도조 히데키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던 인물임을 생각하면 히라바야시의 발언은 당장 역모죄로 잡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헌병 사령관 정도만 하고 예비역으로 물러나야지 그 놈은 총리대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었다. 의외롭게도 도조 히데키는 자기 부하들에게는 꽤 자상한 상관이었기 때문에, 헌병 사령관 정도만 하고 물러났으면 그냥저냥 괜찮은 상관 정도의 평가를 받았을 거다. 그런데 자기 능력에 맞지도 않는 직위에 오른 도조 히데키가 얼마나 못나게 행동하고 어떤 평가를 받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걸 보면 사람 보는 안목도 꽤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때의 발언은 휘하 장교들이 숨겨서 먼 뒷날인 2009년에서야 그 실체가 드러났다.

덧붙여 헌병사령관으로 재직 시 다카히토 친왕이 츠노다 도모시게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쓸어버리려 한다는 것을 이 사람에게 알렸는데, 사실 친분도 있고 마음도 맞아서 은밀하게 츠노다와 협조 중이던 히라바야시는 그냥 츠노다를 면직처분 정도만 내리고 끝냈다고 한다.

후일 도조 히데키 사후 기시 노부스케가 이 사실을 알고 히라바야시 또한 역모죄로 교수대에 올린다고 하였다. 물론 위에 나와 있는 대로 츠노다에게 조롱만 들을 뿐이었다.

3 정상적인 군인들

민간인 학살이나 포로 학대 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말 그대로 군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으며 개념있는 사람들. 침략 전쟁의 일원이였던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국제법을 어기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다한 군인들이기 때문에 적국에서도 악당 취급은 안했다. 또한 전쟁에 적극적이거나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 대부분은 그다지 출세하지 못했고, 2류나 3류 군인 취급 당하거나 일본 제국이 거의 망해가던 시기에서야 주요 공직에 오르거나 하는 등 일본군 내에서 대우가 영 좋지 않았다. 물론 이 사람들이 그다지 출세하지 못한 원인은 이 사람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당시 일본 군부가 정신이 나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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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구이저우-장시 방면군 사령관. 사령관 재직 중 군을 제대로 단속하여 주둔부터 패전까지 소속 부대가 전범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귀환하게 했다. 의인이라 축복을 받았는지 99세까지 살다 천수를 다하고 사망.

파일럿으로, 일본군의 악습인 가혹행위를 후임에게 가하지 않았다. 의인이라 축복을 받았는지 93세까지 살다 천수를 다하고 사망(사진은 2003년의 모습).

구축함 이카즈치 함장. 수라바야 해전당시 자신이 격침한 영국군 중순양함 익세터의 승조원들을 자매함 이나즈마와 함께 전부 구조하여 신병 확보 후, 다음날에도 영국군 구축함 승조원들을 바다에서 건져 올린 뒤 이들을 하나로 모아, 반저르마신에 정박 중이던 의료선 옵텐노르트에게 자신이 확보한 포로를 전부 인도했다.

그 뒤 지병 악화로 군에서 물러나며 조용히 지내다 세상을 떠나지만 쿠웨이트·스웨덴 주재 대사를 지낸 영국인 샘 폴이 당시 중위였던 자신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 그를 수소문하여 결국 2008년 그의 묘소에 주일 영국 대사와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임팔 작전에서 후퇴하면서도 영국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인물. 무분별한 옥쇄를 금지한 개념 있는 사람이었다.

임팔 작전에서 금지어 사령관에게 항명을 하면서까지 부하들을 살린 장군이다.

  • 스기노 가즈오

이 사람도 파일럿으로 가혹행위를 자제한 사람이다.

  • 쿠사카 진이치

해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물, 최종 계급은 중장. 이마무라 히토시와 함께 라바울을 지켜낸 주인공이자 기사도를 아는 장군. 그와 그의 부하들은 반인륜 범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았다.

성격이 불 같아 이마무라 히토시와 격렬한 설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껄껄대면서 이마무라 히토시와 같이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 타다 하야오

이마이 다케오와 함께 친중파였으며 인도주의자. 노구교 사건을 협상으로 종결하려고 하였다. 이후 고노에 내각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화평공작은 절대 철회할 수 없으며, 정부에서 안 된다고 한다면 나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통첩을 정부에 올렸으나 묵살당하고 예비역으로 쫓겨난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어 심문, 수감중에 지병인 위암이 악화되어 죽었지만 극동 재판 측에서 이 사람은 수사 결과 무혐의로 석방 예정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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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참다운 개념인. 그는 평소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다.
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 그 자체는 악이다.

현 시점에서는 상식이지만 이 사람이 어떤 군대에 몸담았고 어떤 시대를 살아 왔는지 생각해 보라. 이런 시대를 뛰어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호리는 당연히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에 속했다.

1930년의 런던 군축회의에서 보조함의 비율은 미국 및 영국과 비교해 7할은 필요하다는 함대파의 의견이 해군 내부에 강경했을 당시 군무국장이던 호리 테이키치는 영미와 전쟁보다는 타협한다는 입장인 조약파의 일원이었다. 결국 타협에 성공하여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공로로 호리는 중장으로 승진되지만 이듬해 함대파가 해군성을 장악한 상태의 인선에 휩쓸려 결국 압박을 받고 예비역으로 강제 편입되어 버렸다. 이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펄쩍 뛰었을 정도. 하지만 호리 테이키치는 날뛰는 그를 말리고 난 뒤 겸허히 예비역으로 편입조치를 받아들이고 민간인으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그의 행적들과 그 후의 행보들을 보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처럼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안 넘었으며 개념이 있는 인물.

4 유능한 인물들

전투에서 꽉 막히지 않은 사고방식으로 군을 지휘해 아군을 보존하거나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사람들. 혹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활약한 에이스들. 물론 전쟁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전쟁에 긍정적이지도 않았으며 본분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일본군에서 요직에 오르고 전쟁을 수행했으면, 오히려 전쟁을 더 오래 끌고 일본에 유리하게 결론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최상부까지 올라갔더라면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 같은 무모한 싸움 자체를 아예 안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 항목이 이렇게 길어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북태평양에 위치한 키스카 섬에서 고립된 일본군 수비대 5천여 명을 전원 구출한 일본 해군 제독.
일본에서는 이를 "키스카 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 공로로 그는 히로히토를 독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훗날 영화화되었다.

일본군 베스트 파일럿. 공식 기록 상 87기 격추. 25세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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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사파롱가 해전일본군 지휘관. 구축함 8척으로 구성된 수송선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의 아군에게 보급물자를 전달하러 가던 중에 중순양함 5척과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미 함대의 기습을 당한다. 이때 일본군 구축함은 드럼통에 물자를 싣고 견인 중이라 전투가 어려웠는데, 그는 드럼통을 떼어낸 후 어뢰 공격을 실시하여 미 해군의 중순양함 3척을 대파시키고 1척을 침몰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구축함 1척만 잃었음에도 "수송 임무가 실패했다", "왜 후퇴했느냐"는 이유로 해임당하고 한직을 맴돌았다. 79세로 사망.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한 제독. 본격적인 개전 전인 1934년에 사망했다. 퇴역 후 독선적인 성격으로 일본 해군의 체질 개선에 악영향을 끼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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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대 지휘관. 로테이션 제도를 통해 휴식·훈련·재편부대를 보유하여 베테랑은 후방 기지에서 신병을 교육하게 하고, 정비병을 통한 교육을 통해 우수한 파일럿들을 대거 투입하여 높은 전과를 올렸다. [1]

또한 자신의 부대에서 단 1명의 카미카제 희생자도 내지 않았다. 다만 부하에게 카미카제 명령을 내린 적은 있다. 야간에 정찰기를 출격시켜 '적의 항모를 발견하면 위치를 부대에 보고한 뒤 그대로 항모에 들이받아 전투능력을 빼앗아라. 그러면 해가 뜨는대로 본대가 출격하여 항모를 공격하겠다'는 작전이었는데, 정찰기가 출격하고 보니 정작 카미카제로 들이받을 배를 찾지 못해서 명령을 받은 대원은 무사히 귀환(…).

그는 정확히는 카미카제 자체가 아니라 '연습기로 사용되는 복엽기를 이용한 카미카제'를 거부했다. 쉽게 말해 '미군 방공망을 연습기로 뚫으라고? 장난해?'라는 의미. 당시 연습기로 사용되던 기체는 일명 '고추잠자리(赤とんぼ)'라 불리던 구삼식 중급 연습기. 최고속도가 제로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속 200km 정도였다. 하도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정말 연습기까지 사용하여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기 계신 분들이 먼저 그걸 타고 공격해 보면 좋을 겁니다. 소관이 제로센 1기로 전부 격추해드리겠습니다"라는 소리까지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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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당시 야마구치 다몬과 함께 3차 공습을 주장한 바 있으며 1942년 7월에는 제8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었고 사보섬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이끌고 연합군 함대를 기습, 중순양함 4척을 침몰시키고 1척을 대파, 구축함 2척을 중파시켰지만 미 해군의 항공모함 와스프의 함재기들이 공습해올 것을 우려하여 철수한다.

이러한 대전과에도 불구하고 "적 함대를 괴멸시켜놓고 왜 적의 수송선단을 공격하지 않았나?"라는 비난을 받으며 상부에 찍혔고, 과달카날 전투가 일본의 패배로 끝난 이후 제8함대 사령장관직에서 물러나 한직을 맴돌다가 1945년 5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사카이 사부로가 소속된 부대의 비행대장.

"대공의 사무라이"로 유명한 일본군의 에이스 파일럿. 전투 실력도 굉장했지만, 카미카제를 반대하는 개념인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전시중의 행보와 전과에 오류가 많고, 인물평에 대해서도 대단히 엇갈리는 부분이 많다. 카미카제를 실제로 반대하던 인물이었는지도 애매. 전후의 행보도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 스기타 쇼이치

사카이 사부로, 니시자와 히로요시와 함께 해군 파일럿의 삼족오라 불린 인물

항공모함 카가의 비행대장이었으나 부하들의 편의를 봐주다가 함장의 눈 밖에 나 준요의 비행대장으로 사실상 좌천. 이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항모 엔터프라이즈호넷을 대파시켰으며,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해군 신형전투기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임명. 그리고 시나노의 비행대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지만, 시나노가 완성 직전에 격침되며 허사가 되고, 결국 해군 최정예 파일럿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을 담당하게 된다. 대단히 군인다운 인물임과 동시에 인격자로서 상관과 부하 모두에게 신뢰를 받았으며, 특히 카미카제를 거부한 에피소드가 유명.

  • 아카마츠 사다아키

해군 파일럿으로 제로센과 라이덴을 주로 다루었다. 격추수는 명확하지 않으나 75대의 머스탱 사이로 파고 들어 한대 격추 시키고 이탈했다고 할정도로 걸출한 파일럿. 굉장한 술고래로 패전 후에 동료들이 밥벌이라도 하라고 비행기 1대를 줬더니 그걸 팔아 술을 마셨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참고로 군국주의자 아카마츠 사다오와는 상관없는 인물이다.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이전인 1930년에 사망한 일본 육군 장군. 일본군 기병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기병포와 기관총을 최초로 도입한 선진적인 지휘관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전쟁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꼈으며 군인이 정치에 손대는 것에 반대했던 사람이다.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학생은 군인이 아니라며, 그 무렵 상례처럼 되어 있던 군사교련을 탐탁치 않아 했다. 이거, 21세기 이후에는 학교에서 교련을 안 해서 그렇지 현대 한국에서도 의외로 찾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 항모 USS 요크타운을 침몰시킨 일본군 제독.
그러나 미군의 반격으로 배와 함께 바다로 침몰했다.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알아본 선구자격 인물에 해당한다는 점. 미국의 역량에 대해 파악하고 태평양 전쟁 개전을 반대한 점. 그나마 진주만 공습을 성공시킨 점 등을 보아하건데 정상인 범주로 넣어도 무방하다. 정세 파악이나 정치력의 측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인재를 알아보는 면목도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나마 행정적인 결함[2] 등이 존재했다고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이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 그 개인 자체는 충분히 유능하다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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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당시 참모. 지구전을 제안해 미군을 괴롭히는 전술을 제안했지만 참모장인 조 이사무와 대본영이 이 전술을 이해하지 않고 1주일간 돌격전만 행하여 군에 커다란 피해를 입자 그제서야 그의 작전대로 지구전을 행하여 미군의 지휘관인 윌리엄 버크너 중장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이 손실은 태평양 전선 사상 최초의 미군 고위급 지휘관 전사자다! 미군은 '그의 전략은 일본군의 보증 수표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만 오키나와 학살을 반대하다 작전참모 자리에서 해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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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최고의 제독. 일명 '일본군 최후의 해군 대장'·'침묵의 제독'.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대신과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차관과 같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을 반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달리, 그는 처음부터 거함거포주의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또 일본이 미국을 이길 수 없는 6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등, 태평양 전쟁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패전 후에는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사카이 사부로와 함께 유명한 일본군 베스트 파일럿. 일명 '레이센 코테츠(零戦虎徹)'

  • 쿠로에 야스히코

파일럿으로 일본군답지 않게 에너지 파이팅을 선호한 인물

그 유명한 이오지마 전투를 총 지휘한 일본군 장군. 다만 그의 성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점이 남아 있다.

일본군의 오토 슈코르체니. 전후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위령비 건립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다른 일본군 출신자가 증언한 위안소 장소를 자신의 자서전에 수록하는 등 그 힘에 걸맞는 정신까지 겸비한 인물이었기에 이 항목으로 옮겼다.

5 그럭저럭 유능한 인물

능력을 갖추고 있고 부하들에게 인망도 있지만 제국주의에 찬성하기도 하는 등, 현대의 관점으로 봤을 때 병크도 약간 터뜨리는 사람들의 목록이다.

이 사람들은 보신주의에 입각해서 처신을 하였기에 상부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위의 능력자들보다 더 유능한 인재들로 평가받았다. 물론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유능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실제로도 그럭저럭 능력이 있긴 했다.

위의 정상인들과 달리 이들은 제국주의에 적극 협조도 했기 때문에 칼 되니츠 처럼 나중에 전범으로 처벌받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야마시타 도모유키처럼 자신의 죄 외에도 부하가 저지른 죄를 같이 뒤집어쓴 사람도 있다.

사진은 1987년 09월 21일 지인과 함께. (나이든 쪽)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진행될 때 거함거포주의에 반대하여 스스로 항공주병론자가 된 인물. 진주만 공습 이후 항공 참모로 활약했다. 나중에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뒤로는 본토에 항공 기지를 만든 후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패전 후에는 항공자위대 막료장을 지내고 전역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일본 해군 항공기들을 종잇장으로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인데, 장차 전투기의 무장은 20mm 기관포가 주가 될 것이고 전투기가 20mm 기관포를 맞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장갑은 무의미하다는 이론이었다. 최소한의 생존성은 갖춘 육군과는 반대되는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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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鹿龍之介 1892.09.25~1971.11.23

일본 해군 중장.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적극적 주전론자로서, 시종일관 공격만을 강조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 사람도 카미카제 특공대를 적극 추진한 사람이었다. 패전 후에도 살아 남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을 카미카제로 죽게 만든 점에 대해서 비난을 받았고, 그의 군사적 능력도 "입만 앞세우는 참모"로 평가절하되었다. 비슷한 상황에 있던 오니시 다키지로가 할복 자살한 것과는 대조된다.


田中隆吉 1893.07.09~1972.06.05

생긴 게 만복화상 패전 후 전범 재판에서 앙숙인 무토 아키라 중장이 개전의 책임이 있다고 폭로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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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木兼寛 1849.10.30~1920.04.13

각기병의 원인을 찾아낸 일본군 군의관. 이 사람은 생체실험을 하긴 했지만 아래 항목에 나올 천하의 개쌍놈, 인간말종 또는 인간 쓰레기들이 벌인 생체실험과 차원이 다르게 안전한 실험이었고, 피험자의 생존률도 100%였다.

  • 스가하라 미치오

추가바람

육군 대장.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처단된 일본군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인물. 윤봉길 의사가 그를 처단하자 장제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유명하다. 잠깐. 이 사람은 잘 죽어서 유능한 인물에??

우리 군사 백만 명이 못해낸 일을 한 명의 조선인이 이루어냈다!

그리고 갈굼이 시작된다

싱가포르 전투의 영웅으로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인물. 포로 관리를 허술하게 하는 바람에 종전 후 전범 재판에서 츠지 마사노부가 싱가포르에서 저지른 대학살과 해군 육전대가 필리핀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다.

야마시타와 비슷한 케이스로 다만 대부분의 죄를 참모장 아다치 하타조 중장이 뒤집어써 10년형만 받은 사례.


大西瀧治郎 1891.06.02~1945.08.16

일본 해군 중장. 그 유명한 카미카제 특공대를 만든 인물. 여기까지만 본다면 단순히 천하의 개쌍놈이겠지만... 그는 4,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책임을 지고 종전 다음날에 할복 자살했다.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할복 하면서도 "영령들에 대한 사죄로 고통스럽게 죽을테니까 절대로 뒤에서 목을 쳐서 편하게 죽도록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할복 항목을 알겠지만, 할복을 한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이 아니므로 목을 쳐주지 않으면 죽는 동안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확실한 것은 오니시 다키지로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할복 자살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병크]를 터뜨리기는 했지만, 그나마 개념은 있었던 인물.

남방작전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 제독. 제독으로서의 능력도 그럭저럭 있었고, 연줄도 있었으며 부하들을 상당히 신뢰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 궁지에 몰릴수록 조금씩 사람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신이 멀쩡했던 당시 중순양함 초카이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영국 수병들의 80%를 구해냈던 전적이 있으므로 이를 동시에 판단하여 평범한 인물에서 보신주의자 항목에 기입한다. 그 당시 일본군은 학살이 일상화되었기때문에 이런 일은 칭송받아야 한다. 실제로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전이나 도로 정신이 돌아온 뒤의 그의 일화들을 보면 나름대로 능력도 보여줬고, 악인은 확실히 아니었다. 두 계단 강등되었다 한 계단 회복


畑俊六 1879.07.26~1962.05.10

일본 육군 원수. 난징 대학살 때 책임자인 마츠이 이와네를 경질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마츠이 이와네를 대신하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한 전투를 지휘하였다. 1945년 4월에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 히로시마에 사령부를 둔 제2총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히로시마원자 폭탄이 떨어졌으나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14일히로히토대한민국 건국 유공자와 나가노 오사미 그리고 하타 슌로쿠를 불러 "본토 결전이 가능하겠냐?"고 물었을 때 오직 하타 슌로쿠만이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패전 후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6년을 복역하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1962년 후쿠시마에서 82세로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창자오 학살의 주범이라고 지목하는 사람이 있는데, 난징 대학살과는 달리 이 쪽의 숫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3] 이 사람은 학살이나 전쟁범죄를 그닥 탐탁치않게 여겼기때문에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 핫토리 타쿠시로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할힌골 전투의 패배로 좌천당한 행적이 있다. 츠지 마사노부와 유사하게 작전 참모로 활약한 인물.

6 평범한 인물들

바로 위 카테고리에 있는 인물들의 하위호환. 일반적인 보신주의자들처럼 제국주의에 찬성하면서도 능력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인물들의 목록이다. 이들은 기본적인 업무 소양과 문제 해결능력은 있으나 특별히 인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 평범한 일본 군인들이다. 다만 하단에 나오는 군국주의자들처럼 적극적으로 침략 정책을 주장하면서 전범 대열에 합류하거나 인간 쓰레기가 될 수준의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들... 처럼 엄청나게 무능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평범한 인물들의 목록이다.

진주만 공습을 그럭저럭 성공으로 이끌었으나, 해당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3차 공격을 이끌지 않았다든가, 혹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판단 미스 때문에 비판을 심하게 받았다. 하지만 그가 했던 실수는 미카와 군이치처럼 다른 일본군 장성도 했던 실수거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처럼 다른 사람의 책임을 떠맡은 것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명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 비교해 졸장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평가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서 아랫 항목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그가 말아먹거나 실수를 저지른 전투가 다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라... 그 때 나구모 주이치가 없었고 다른 사람이 지휘했더라면... 이라는 희망사항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공전기 같은 곳에서는 다른 일본군 제독과는 달리 초기에 혼자서 끔살당한다던지 하는 영 좋지 않은 대접을 받는다.

일본의 군의관으로 나츠메 소세키와 함께 근대 일본 소설의 거장으로도 유명한 인물. 그러나 군의관으로서의 그는 각기병의 원인을 병균 때문이라고 죽을 때까지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시 경험적으로 보리밥이 각기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실을 무시했다. 그러나 생체실험은 절대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인간 쓰레기는 아니다. 군인으로서는 그저 그렇지만 일본 문학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 사쿠라이 쇼조

제28군 사령관으로, 하나야 타다시나 이치키 기요나오 수준으로 소심한 겁쟁이였다. "자멸이나 항복하지 말고 고생하더라도 꼭 적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라"라고 하다가 "안 되면 그냥 항복해."라고 입장을 바꿔 버리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병사들이나 부하들이 죽는다고 학살이나 가혹행위를 일절 안 한 사람이다. 또 옥쇄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람리섬 전투 총 책임자이자 부대 전멸의 진범이다. 꽤 무능하긴 하지만, 그 정도가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들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의 뒷수습을 잘했고, 패전 원인을 잘 분석하였다는 점을 보면 참모로서의 능력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정작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지휘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게다가 카미카제 특공을 신봉하였고, 자신도 카미카제로 죽었다는 점을 보면 그다지 능력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일본 황족으로 괴짜로 유명한 사람. 쇼와 덴노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시아버지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심각하게 무능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해당할 수 있겠다.

7 군국주의자들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를 옹호하여 군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인물이며, 군국주의에 매료당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무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목록에 있는 놈들 중에서는 실제로도 능력이 좋은 놈은 거의 없었다. 도조 히데키를 위시한 삼간사우들 중 대부분, 특히 A급 전범의 상당수가 여기에 들어간다. 이하 항목 부터는 거의 전부 일본 육군 인물들이다. 그나마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는 한참 뒤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해군반성회에 의해 해군성 군령부총감이자 황실 사람인 후시미노미야와 그 외의 해군의 높으신 분들태평양 전쟁 개전에 개입했다고 추정된다. 단, 이를 확신하기 어려운 이유는 군축조약 탈퇴와 태평양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 해군반성회 측에서 고의적으로 숨긴 듯 하다.

악질적인 반 인륜적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들, 즉 아예 사람으로 볼 가치도 없는 인간말종들은 항목을 나누어 재분류했다. 삼간사우중 사우에 속하는 기무라 헤이타로가 대표적인 예다. 개전에 절대적으로 책임이 있는자들의 경우엔 볼드체로 표기한다.

7.1 태평양 전쟁 주범

일본 전시 내각 수상. 태평양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켰으며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다. 전시 내각의 수상이었으니 그 나름대로는 유능할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무척 무능한 인물이었다. 항목 참조.

일본 제국의 국가 원수였지만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2인자인 도조 히데키였기 때문에 그에 비해 묻히는 감이 있지만, 개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옥좌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최종적인 책임을 당연히 져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만.

7.2 삼간

  • 가토 하쿠지로 加藤泊治郎 1887.06.08~1951.02.19

일본 육군 중장. 만주군 정예부대로 편성된 철석부대를 관할한 ‘북지(北支)특별경비대’의 북지파견군 헌병대 사령관으로 활약한 인물. 도조 히데키의 측근이었다. 그가 지휘하던 철석부대 내에는 간도특설대가 있었다. 훗날 여기서 장교로 복무했던 한국인들이 후에 ‘공비 토벌’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결국 일제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본 육군 중장. 통칭 "신사복을 입은 군인". 실전 부대에서의 경험은 별로 없고, 주로 대외적·관료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이었다. 1931년 삼월 사건(三月事件)에 가담하였다. 국제 연맹 탈퇴론을 주장했고, 군부에서 국제 연맹 탈퇴 추진파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4일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1955년에 가석방 되었고, 1958년에는 사면되었다. 1959년에 자유민주당으로부터 참의원 선거 출마 요청을 받았지만 강하게 거부하였고, 이후 공직에 오르지 않았다. 1989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A급 전범으로선 유일하게 헤이세이 시대까지 생존한 인물이었다.

  • 시카타 료지

추가바람

7.3 사우

인간 쓰레기는 아랫 항목에서 소개. 게다가 당시 일본의 육군장관은 총리대신이 겸했기에 실질적인 군사책임자였고 육군차관으로 영국에 대한 전쟁침략죄까지 있기 때문에 이 항목에도 볼드체로 지정한다.

대본영 작전과장을 지낸 인물. 작전과장으로 재직 중 무타구치의 임팔 작전 계획안을 엉망이라며 열심히 까고, 까다 못해 육군의 철천지 원수인 해군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고 강력히 반발했던 것이 사우 중에서는 그나마 능력을 보여준 측면이 있다...지만 이건 무타구치 렌야의 작전안의 막장성이 더 부각되는게 현실이다.

일본 육군 중장.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가 전사했을 때에는 미드웨이 해전의 실패를 거론하며, "국장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패전 후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아 복역하였다. A급 전범 중 가장 늦게까지 갇혀있었고, 1956년 석방 되었다. 자기 나름대로 사회 활동을 하다가 1975년에 사망했다.

  • 아카마츠 사다오
  • 카와베 마사카즈

가끔씩 아마카츠 사다오가 빠지고 이 사람이 사우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아랫 항목에서 소개.

7.4 기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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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院宮載仁親王 1865년 11월 10일 ~ 1945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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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本大作 1883.01.24~1955.08.25

일본 육군 대좌.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된 황고둔 사건의 배후 인물. 황고둔 사건 후 그가 도쿄에 사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장쭤린 한 명이나 두 사람이 죽어도 좋지 아니한가"라는 내용을 언급한 것이 밝혀져 의혹이 거세졌다. 당시 장쭤린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대립을 완충해주는 역할을 하였고, 그 때문에 장쭤린과 일본 제국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의 군벌과의 관계는 깨졌다. 또한 고모토 다이사쿠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 제국에 알리지 않은 독단 행위였으므로 히로히토는 분노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서는 내각이 총 사퇴하는 등 내분이 일어났다.

일본 육군은 고모토 다이사쿠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대신 1929년 4월 예비역에 편입시키는 아주 가벼운 형벌을 내려 사건을 무마시켰는데, 이에 일본 제국 육군대장 마츠이 이와네가 이런 가벼운 처분에 대하여 끝까지 강력 반발한 바가 있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1932년 군에서 물러나 산서산업 회장이 되었다가 국민당에 의해 볼모가 되다가 산서성이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가자 그 때 타이위안에 억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중국잔류 일본인 문제의 원흉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永野修身 1880.06.15~1947.01.05

러일전쟁 때부터 활약한 일본 해군 원수. 1935년 12월부터 런던 군축회의에 전권으로 참석해 연합국의 일방적인 전함 감축안에 반대해 일본의 탈퇴를 통보하였다. 1936년 일본 해군 대신으로 취임한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해군 차관으로 발탁하였다. 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군령부총장으로 복귀해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진주만 공습 계획을 승인하였다. 그는 일본제국 해군의 3요직인 해군 대신, 연합함대사령관, 군령부총장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로 명실상부한 일본제국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원자 폭탄이 떨어진 후 1945년 8월 14일히로히토대한민국 건국 유공자와 나가노 오사미 그리고 하타 슌로쿠를 불러 "본토 결전이 가능하겠냐?"고 물었을 때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와 함께 전쟁을 할 것을 주장하는 등, 하타 슌로쿠 보다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좀 떨어졌던 인물이다. 패전 후에 A급 전범 판결을 받았으나, 수감 중이었던 1947년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판결을 면제받았다.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수재로 군무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 장래의 일본 육군 대신으로 거론되는 거물급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 육군 대신이자 후에 조선 총독이 되는 미나미 지로와 함께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의 근원인 국가 총 동원령을 발령한 인물이다. 그러나 육군성 군무국장 재직 중 파벌 사건으로 아이자와 사부로 중장에게 1935년 살해된 인물이다. 그가 살해된 후에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통제파의 일인자 였는데, 그의 자리를 이어 받은 사람이 바로 도조 히데키(...) 그래도 나가타 테츠잔은 파벌 행동 자체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국주의자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나름 유능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 나카지마 케사고

난징 대학살의 진범이자 하나야 타다시 뺨치는 병영부조리의 화신.' 난징대학살 당시 16사단장이었는데 학살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단 모든 포로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말은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증거가 부족하다. 게다가 장제스의 재산을 빼돌리기도 했으며 하나야 수준의 병영부조리까지 저질렀다. 이후 난징 약탈 혐의로 예편되었고 1945년 10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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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本宮守正王 1874.03.09~1951.01.01

영친왕의 장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부친이며 유일하게 황족 신분으로 전범 처벌을 받은 사람. 전범 재판당시 학살 등 반 인륜 범죄는 혐의가 없었지만 이세 신궁의 신주였다는 이유로 "국가신토의 우두머리"이라는 혐의로 A급 전범 판정을 받고 스가모에 수감되었지만 6개월 뒤 출소하였다. 당시 일본이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쉽게 띨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이비 종교국가신토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 뒤 강도떼가 들어 재산을 대부분 도둑맞는 수난을 겪었고 황적에서 이탈한 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완전히 잊혀진 채 1951년 자택에서 쓸쓸히 죽었다.


松井石根 1878.07.27~1948.12.23

난징 대학살 총 책임자로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다만 이 사람은 난징 전투는 지휘했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엔 폐결핵을 앓아 병가를 내고 있기에, 학살 당시엔 군대를 지휘한 건 아니며 실제 학살을 주도한 건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였다. 그래서 병이 안정되어 돌아 왔을 때 학살 이후에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다!"

이런 점이 반영되었는지, 그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BC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았다. 마츠이 이와네는 난징 대학살 외에 다른 학살극에도 연루되어 있었으나, 학살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병중이라 실제 지휘를 맡지 못했다. 실제로 범행은 대부분 다니 히사오 등 수하들이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게 전적으로 학살 책임이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일본군이 난징에서만 학살을 한 것도 아니고 항목 참고 난징으로 진군하는 와중에도 숱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바 역시 좋게 보기는 뭣하다. 그리고 A급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B, C급 전범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5]


武藤章 1892.12.15~1948.12.23

난징대학살 당시 참모부장을 맡았고 필리핀 전선에도 파견된 인물이다. 일각에서 두 학살을 주도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선 난징대학살의 경우 학살에 가담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나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한 편이고, 필리핀 마닐라에서의 학살은 잔류 해군육전대와 육군 병력이 멋대로 저지른 것이고 이 시점에 무토는 이미 사령부를 북부로 빼냈기 때문에 관계가 없었다. 다만 A급 전범으로 분류된 점에서 보듯이 그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침략 전쟁 수행에 임한 것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래 홍사익과는 자활감 관련으로 인연이 있었던듯 하다. 이에 관한 한 에피소드

관동군 참모로 재직하였으며 여러 작전에 개입했다. 태평양 전쟁의 또 다른 흑막. 전범 재판 때에는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대가로 포로수용소의 사무를 돌보는 직위에 있으면서 편히 지냈다고 한다. 그래 놓고는 이다가키 세이시로의 아들이 장교로서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공산주의 선전 활동에 참여한 경력을 두고 귀국선에서 세지마에게 "네놈이 한 짓은 본토에서 반드시 심판당한다"협박을 했다고 한다. 한국 거물들과 인연이 많은 지한파였다. 한국 전경련의 특별고문으로 위촉된 적도 있다. 200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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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次信正 1880.06.30~1944.12.29

일본 해군 잠수함의 실력을 상향 평준화한 인물. 전술가. 군무에는 화려한 업적을 보여주었으나 정치계로 쓸데없이 개입하여 군이 정치에 간섭하는 문제에 도화선을 당긴 주범. 군령부 부총장시절 군축조약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격한 논지를 펴다가 경질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함대파가 일어서긴 했지만 그의 사상 자체는 함대파를 능가하는 과격함 때문에 과격파 내부에서조차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 얼마나 과격했으면 쇼와 덴노조차도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그 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으나 새로 총리가 된 고노에 후미마로의 비호를 받고 군령부 부총장으로 복직 후 다시 정치에 날뛰었다. 고노에는 처음 스에츠쿠를 내가 똘마니로 삼을 수 있다고 속으로 흐뭇해하고 그의 비호세력이 되었으나 결과는 망했어요. 되려 그에게 휘둘렸다고 한다 그는 중일전쟁이 악화된 원인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영국, 소련과 외교적으로 압박하여 고립 될 것을 주장하고 "남방이 확보된다면 자급자족 체제를 강화시켜 장기에 걸쳐 일본의 체제를 강화할 수 있다"는 망언을 하였다. 심지어 그의 직속상관이나 다름없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조차도 "그 놈은 글렀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주변의 빈축을 산 상태였다. 고노에 내각 해산 후 도조 히데키와 함께 총리 후보로 올랐으나 결국 패배. 또 군령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총장 직위에 앉고 싶어서 안달하였으나 쇼와 덴노의 미움을 살 대로 산 터라 결국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쓸쓸히 자택에서 사망.그냥 정치에 끼지 말고 조용히 지내지 쓸데없이 정치에 개입해 폭삭 망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을 굳이 비교하자면 스즈키 노부유키[6]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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嶋田繁太郎 1883.09.24~1976.06.07

일본 해군 제독. 상하이 사변 때에는 제3함대 참모장으로 상하이에 출동한 바가 있다. 요코스카 사령관으로 재직 중 도조 히데키의 해군대신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정중히 거절하다가 마지 못해 승낙한 뒤 태평양 전쟁에 적극 개입했다.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에서의 패배로 인해 도조 히데키와 아울러 큰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해군 장관, 군령부 총장을 사임하였고, 후에 군사 참의관을 거쳐 1945년 예비역이 되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지명돼, 헌병이 신병 구속을 위해 자택에 방문했을 때는 자신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당당한 태도로 뻔뻔스러운 태도로 연행되어 갔다. 사형을 각오했지만,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1955년, 가석방 후에 사면돼 1976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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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南惟幾 1887.02.21~1945.08.15

패전 직전 당시 육군 대신. 인품이 후하다고 알려졌지만 중일전쟁 당시 저지른 병크로 악명이 높았다. 정신론에 유난히 경도된 전형적인 일본군 장성이었다. 일본이 패망해 나갈 무렵 아나미는 군부를 대변하여 무조건 항복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참전 이후에도, 그는 유리한 항복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본토 결전을 주장하였다. 이에 히로히토가 종전에 동의하자 그제서야 본토 결전의 주장을 굽혔다. 그러나 그 직후 할복을 했는데 이 점이 유일한 그의 업적이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아나미 고레치카가 할복하지 않고 살아서 궁성사건에 적극 개입했다면 정말 옥음방송은 연기되었거나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나름 업적은 맞긴 하다. 자살하면 업적이 되는 희귀한 사례 그가 자살할 때 입었던 제복과 유언장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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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木貞夫 1877.05.26~1966.11.02

황도파의 거두로 황군이라는 말을 공식석상에서 자주 사용한 인물이다. 이게 기행으로 보일 여지가 있는 게, 공식 석상이나 언론에서는 대일본제국 육군, 해군 또는 제국 육, 해군이라 불리었지 황군이라는 명칭은 잘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도파는 2.26 사건으로 몰락했지만, 1938년 고노에 내각 집권 당시 문부대신으로 발탁되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시 세뇌교육을 주도하였다. 또한 "국민정신 총동원 위원회"의 위원장도 겸임하여 사상면에서 전시체제의 선전작업을 추진했다. 전쟁수행 내부책임자라는 이유로 A급 전범 취급을 받아 심문을 받았으나 뻔뻔스럽게 "나는 무죄다."라고 주장했다. 얼마나 뻔뻔스러웠냐 하면 재판장의 경고를 들을 정도였다. 결국 종신형 판결을 받고 복역한다. 복역중 1955년 병으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여 전국을 돌며 강연활동을 하였는데, 1966년 강연 활동을 하던 중 심장병으로 90세에 사망하였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긴 하다. 만주사변의 주범이자 만주국 건국에 기여한 자. 세계최종전론世界最終戰論[7]을 주장하며 "결국 동아시아 민족과 미국이 대결하게 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인종주의를 추종한 아시아주의자. 관동군 시절부터 도조 히데키와 사이가 매우 나빴고, 수상이던 도조와 대립한 끝에 1941년 예편되었다. 도조 히데키와 매우 사이가 나빴고, 전범재판에 출석해서 도조 히데키에 불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에 만주사변의 주범임에도 전범재판을 피해갈 수 있었다. 여기에 중일전쟁태평양 전쟁도 반대한 걸 보면 어느 정도 선견지명을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만주사변의 주범인 점에서 이 항목을 벗어날 수가 없다. 더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반대한 것이나 만주사변을 일으킨 게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 이 사람이 종교적 신념으로 판단해서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좀 특이한 형태의 막장일 뿐이란게 문제다. 이전에는 이 사람을 자제하는 군국주의자라는 식으로 평가했지만, 이 사람의 경우 태평양전쟁 반대는 자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적 신념에 의하면 그 때는 길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때 일으켜야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냥 막장. 머릿속이 4차원인 것만 고려하면 무타구치 렌야가 우습게 보일 지경이다. 특이한 건 고급 장교들에겐 하나야 타다시 수준의 악명을 떨쳤지만 병사들과 부사관들에겐 아버지 같은 상관이었다고 한다.


板垣征四郎 1885.01.21~1948.12.23

조선군 총사령관.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만주 사변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역시 군국주의자로 악명이 높았으며 또한 노몬한에서 저지른 병크로 확인할 수 있듯이 무능의 대명사로도 악명이 높았다. 물론 작전을 입안한 건 츠지 마사노부지만, 그는 노몬한를 결정할 때 월권으로 사령관 대리서명을 했다. 따라서 이 전투의 패배는 츠지 마사노부의 잘못으로 볼 수도 있지만 패전 후에도 츠지 마사노부를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자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일본판 빌헬름 카이텔인 셈. 싱가포르에서 영국군 동남아시아 사령관 에게 항복하였다. 전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다만 악질적인 반인륜 범죄에는 그다지 연루되지 않았기에 군국주의자로 분류 한다.


黒島亀人 1893.10.10~1965.10.20

일본 해군 군령부 제3부장으로 재직하였다. 진주만 공격을 최종 검토하였다. 진주만 공격은 꽤 성과를 올렸고 쿠로시마는 반복공격을 주장하였으나, 나구모 주이치 사령관의 거부로 이 제안은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아후 섬의 군사시설과 연료탱크가 보존되었고 미군항모인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이 가까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뼈아픈 후회이기도 했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작전을 입안하지만 미군이 암호를 해독해 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범인(凡人)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발한 발상을 내놓는다며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가장 아끼던 참모였지만, 구상하는 작전이 쓰잘데없이 세밀하고 허황된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전. 여러모로 이소로쿠를 제외한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는 영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박을 즐기는 이소로쿠의 성격이 이 인간과 잘 맞아 떨어졌던 것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이 정도만 하면 평범한 일본군 장성 A이겠지만... 사실 이 자는 그 유명한 카미카제, 신요, 오카, 가이텐, 카이류, 후쿠류 등의 일명 특공병기등의 개발을 주도하고 이들의 실전배치를 극구 주장한 인물이다. 당시 일본군막장 상황을 보면 이 사람이 없었어도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했겠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저 자폭병기들의 개발과 배치만으로도 조선인 청년들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강요당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천하의 개쌍놈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다. 다만 이 자는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이 자가 저지른 또 다른 병크는 패망 직전에 본토 결전을 주장하면서 1억 옥쇄를 부르짖었다(...)는 점이다. 이 인간도 어지간히 답이 없는 인간이다. 그냥 일본인을 멸망시키고 싶었을 뿐 옥쇄를 부르짖고 특공을 신나게 주장한 주제에 자기는 특공 안했고, 할복도 하지 않고, 전범 재판도 안 받았다. 아주 편하게 살다가 1965년 폐암으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오니시 다키지로나 구사카 류노스케와의 형평성을 고려하고, 진주만 작전에서 성과를 올린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草刈英治 1891년 6월 1일 - 1930년 5월 20일

해군의 팽창을 구속하는 군축조약의 극렬 반대자. 자신의 뜻과 반대로 조약이 체결되자 크게 실망하여 1930년, 군축회의 전권대표 중 한 명인 해군대신 다카라베 다케시가 승차했던 차 안에서 지니고 있던 단도로 자결했다. 쿠사가리는 단도가 복부에 박힌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아직 숨이 붙어있던 그는 "손대지 마라! 칼은 무사의 혼이다!"를 외치며 단도를 빼내길 거부했다. 그 상태로 얼마 뒤 죽었는데 그의 죽음은 "군축조약에 대한 죽음의 항의"로서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이는 이후 통수권의 간섭문제로 발전해 당시 육해군 할거없이 퍼져있던 과격파 청년장교들과 국가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간사한 기만책에 휘둘리지 않은 쿠사가리의 우국충정을 보라!"라며 영웅으로 추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국주의의 길로 간 덕분에 일본은 더 빨리 패망했지

병영부조리의 화신. 부하들을 미치거나 자살할 정도로 괴롭혀 그 일본군 안에서조차 또라이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얼마나 심했으면 무타구치 렌야도미나가 교지처럼 그의 장례식에 단 1명의 부하도 찾아가지 않았을 정도. 게다가 그냥 또라이도 아니고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동자 일당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공습을 어찌나 두려워했는지 부대가 행군잠시 쉴 때도 자신만을 위한 방공호를 파라고 명령할 정도로 겁쟁이였다. 그나마 이놈은 민간인 학살, 생체실험, 포로학살 같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짓까지 명령하지는 않았다. 군국주의자 인간 쓰레기 정도가 딱 걸맞은 평가일 것이다.

조선의 총독이었던 자로 한민족 철천치원수. 3.1 운동 탄압의 장본인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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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見宮博恭 1875.10.16~1946.08.16

황족 군인. 일본 해군 대장 겸 원수. 왕의 작호를 가지고 있다. 군축조약 탈퇴와 군함 건조, 증설 등 전쟁 준비를 지령하여 해군을 태평양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인물 중 하나. 개전을 촉구하면서 한 말이 "빠른 개전만이 승세를 잡을 수 있다!"라 주장했다고. 당시 그가 황족이어서 해군성 내에서는 입김이 굉장히 세었다고 해군반성회가 증언했다. 그러나 황족이라는 이유로 그가 전쟁을 주도했다고 들통나면 커다란 문제로 번질 우려 때문인지 해군반성회가 이 정도까지만 밝히고 나머지 여러 정황은 생략했다.

8 무능한 인물

무능한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들의 목록이다. 그러니까 일본군 입장에선 병신들이다. 어찌나 아군인 일본군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미군전범 재판에 기소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들이라는 평가도 받는데, 이들의 어리석은 행태로 인하여 일본의 패전과 한반도의 독립을 앞당긴 점을 높히 평가해서다.

사실 워낙 한심해서 그럴 뿐이지,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한 인간 쓰레기는 아니니 인간 대접은 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이라고 조롱당한다고 해도, 사람이기를 포기한 쓰레기라고 증오하는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걸 기억하자.

그리고 딱 한번의 실수를 저지른 인간은 ☆로 전적이 매우 화려한 잉간은 ★로 표기하며 특히 이러한 삽질로 인해 일본 패망에 결정타를 날린 잉여인간은 볼드체로 표기한다. 특히 이 목록에 있는 사람들 중 별도의 단락으로 분류된 맨 위의 3인은 일본 내에서도 삼대오물로 불리며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또 까인다.

8.1 삼대오물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절대로 능력없는 자가 있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자리에 능력이 없는데다 양심없고 뻔뻔하기까지 한 자가 차지한 것.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려는 현대의 극우들조차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비범한 병신력을 갖추었다. 그래도 이 인간들은 학살과 같은 전쟁범죄를 반대하거나 패전의 책임을 지는 등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는 점에서 인간 취급은 받는다.

이 항목 최강 최악의 1급 졸장. 베트남 전투시절부터 진군시각을 알리는 전단이 유출되어 18,000명의 97%가 전사하는 대기록을 세웠고 적극적으로 적전 도주(敵前逃走)를 하여 필리핀 공방전을 완전히 말아먹은 짓으로 악명이 높다. 그런 주제에 위궤양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위스키를 챙기는 행태를 보이며(…) 기생을 끼고 온천이나 다니는 등, 얼마나 막장 짓을 했는지 사병들도 그에게는 경례를 하지 않았을 정도. 끝내 막장일본군 수뇌부조차도 그를 용납할 수 없었는지, 예편된 그를 강제로 현역 복귀시켜 전쟁 말기에 죽으라고 관동군 사단장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하라는 옥쇄는 안 하고 소련군이 공격해 오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포로로 잡혀[8] 포로 수용소에서 살다가 10년 뒤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설에 따르면 유일하게 전투 중 항복한 장성이라 포로 수용소에서 대접이 좋았다고 한다. 반면 그의 장남은 카미카제 특공으로 산화했다. 하지만 이런 무능한 거랑 달리 포로 학대나 민간인 학살 같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으며 거꾸로 필리핀 마닐라 대학살 당시, 휘하 부대를 시켜 주둔 지역에서 학살을 막게 했으며 다른 부대가 필리핀 민간인을 죽이러 오자 우리랑 싸워보자는 투로 엄포를 놓아 물러나게 하는 개념있는 모습을 보였고, 참모본부 참모 시절에는 이시이 시로에게 "세균전이라니, 민간인들은 사람도 아니냐?"라며 비난을 가한 적도 있어서 무능하긴 해도 적어도 민간인이나 포로에게는 개념있는 사람 취급은 받는다.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라는 발언으로 유명한 인물.임팔 작전으로 9만 명이나 팀킬을 제대로 해 준 덕분에 영국군미군인도차이나에서 훨씬 쉽게 전쟁에 임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에는 도쿄 전범 재판에 불려나갔으나, 그의 행적이 공개되자 재판관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너무 고맙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처분은 그가 반 인륜적인 전쟁 범죄 등에는 가담하지 않았는 점과 그저 바보 짓만 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이후 싱가포르 재판에 송치되어 2년 동안 복역한 후 석방되는데, 극진한 대접을 받았기에 살이 더 쪄서 돌아왔다(...) 더 우스운 것은, 남의 아들을 줄줄이 개죽음으로 몰아 넣고는 자기 아들과 조카들에게는 병역을 면제받게 했다. 심지어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내 잘못이 아냐, 부하 잘못이지!"였다. 다만, 이 양반은 무능함으로 비웃음을 사긴 해도, 도미나가 교지와 같이 적어도 민간인 학살 및 포로 학대를 금지하였고 상부의 학살 명령을 무시하거나 부하의 포로 석방을 묵인하기도 하는 등 개념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잔혹한 전쟁범죄는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의 인두겁을 쓴 마귀들과는 달리 비웃음거리나 개그 소재로 쓰일지언정 그나마 욕은 적게 먹는 편이다.

일본 육군 원수. 의외로 육군 참모 총장, 육군 장관, 육군 교육총감이라는 3대 요직을 모두 경험한 엘리트다. 이 정도만 하면 나가노 오사미의 육군판 인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중국은 1개월이면 전역을 정복할 수 있다." 고 주장하며 중일전쟁을 개시했으나 결과는(…) 그래 놓고 또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면서 "진주만 공습 후 미국은 3개월이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하다가 히로히토에게 호통을 들었다. 한편 임팔 작전을 검토도 해보지 않고 개인적 친분을 이유로 승인하는 엄청난 병크를 저질렀다. 그러나 패전 후에 "내가 무능해서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아내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그나마 양심적인 행동 때문에 다른 2명에 비해서는 평가가 나은 편이다.

8.2 기타 인물


河辺正三 1886.12.05~1965.03.02

무타구치 렌야와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임팔 작전을 승인했다. 이 멍청한 행동이 일본군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라. 게다가 작전이 누가 봐도 완전히 실패한 뒤에도 체면 때문에 무타구치와 책임 떠넘기기를 하느라 철수가 늦어서 더더욱 많은 아군을 팀킬했다. 심지어 중일전쟁의 계기인 노구교 사건 당시에도 무타구치의 상관으로서 무타구치가 독단적으로 편 중국군에의 공격을 묵인, 방조했다. 게다가 항공총군 사령관시절엔 제4항공군 사령관에 도미나가 교지를 임명시키라고 조언을 했던 전적까지 있었다. 1945년 12월 2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짧게나마 감옥살이를 한 무타구치와는 달리 완전하게 불기소 석방되었다. 숨겨진 독립 유공자 그래도 이 인간은 무타구치 렌야보다는 나았던 점이 있었다. 그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에겐 아버지같은 존재로 불리웠고, 심지어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가와베 마사카즈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장례식 때 수많은 장병들과 부하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또한 동남아시아 점령지에 일본군이 철도를 부설할 때,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며 기획만 하고 실제 공사를 미루기만 했다. 문제의 철도가 '죽음의 철도'라 불리고 콰이 강의 다리란 영화가 나올 정도로 악명이 높아진 것은 마사카즈의 후임인 기무라 헤이타로 때의 일이다. 무능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인간성은 있던 모양.

일본 육군 중장. 할힌골 전투의 패전 주범 중 하나. 패전 후 강제 예편되었으며, 암에 걸려 1940년에 사망한다. 그가 소련의 첩자(...)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가 있다(...).

제6전대의 사령관을 지냈으며, 괌 전투에서 과달카날 전투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공을 올렸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사보섬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고토 휘하의 제6전대는 일본군 제8함대의 주력으로 참전, 미군 중순양함 4척을 격침시키고 1척을 중파시켰으며 구축함 2척을 대파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작전을 끝내고 귀항하던 중, 이제 일본군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잠수함 회피 기동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가 미군 잠수함에게 중순양함 카코를 헌납했다.

이후 과달카날에서 활발하게 작전을 벌였지만,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미군의 기습을 당해 그 자신은 전사했고 중순양함 후루타카칸코레 주인공 구축함 후부키가 격침당했으며, 기함 아오바도 침몰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덤으로 후루타카의 수병들을 구조하던 구축함 2척도 추가로 침몰(...)

사보섬 해전을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전쟁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므로 '비교적 덜 나쁜 사람들' 항목에 갈 수도 있었지만,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와레 아오바로 제6전대를 한큐에 말아먹었다고 알려지는 바람에 이 항목에 수록되고 말았다. 와레 아오바 일화의 신빙성은 크게 의심받고 있지만, 일본군의 견해대로 제6전대의 경계실패가 패인이라면 독립유공자 칭호를 떼어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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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内寿一 1879.08.08~1946.06.12

조선총독 겸 육군대신을 역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 민주주의 정치가였던 하마다 쿠니마츠와의 할복 문답으로 유명하다. 1936년 육군대신으로 취임 후 북지나방면군 사령관, 1941년 남방군 사령관이 된 후 원수칭호를 받았고, 황족 이외에 육해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부모자식이 2대로 원수가 되었고 또 도조 히데키 내각 해임 후 차기 수상으로 지목되어 졌지만 남방군 총사령관이었던 그가 움직이지 않아 2대째의 수상배출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인간이 이 항목에 있는 이유는 훗날 무타구치와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임팔 작전을 찬성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의 자격이 있다... 다만 1945년 5월 10일, 버마에서 항복했는데 싱가포르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중 1946년 6월 12일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리하르트 조르게조차 초라하게 만드는 연합군 최고의 스파이이자 8.15 광복의 1등 공신. 독일과 일본을 아울러서 각종 주요 정보를 누설함으로써 추축국이 빠르게 몰락하는데 톡톡한 기여를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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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田謙吉 1875.03.08~1962.09.11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을 때, 폭탄을 맞고 한 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사람으로 이 전투의 총 책임자. 그는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관동군 사령관을 관둬야 했고, 태평양 전쟁이 발생하기 전인 1939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자신이 지휘하는 신병으로 구성된 사단 대신 정예 사단이 전투에 투입되려는 것을 "내 부대가 이런 굴욕을 겪었는데 다른 부대를 투입하면 나는 굴욕감에 자결하겠다."라고 말하면서 거부(...)하는 바람에 할힌골 전투에서 대패하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 미야자키 시게사부로할힌골 전투에 참가 했으나 이 인간보다는 대처가 월등하게 나았다. 패전의 책임 때문에 "할복 할까?"라고 전속 부관에게 묻자 "그냥 하십시오."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안했고 심지어 전범재판에서도 소련군 승리에 다대한 공을 끼쳤다고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무능의 대명사와 비슷한 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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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木清直 1892.10.16~1942.08.21

소심해서 그런지 사진도 흐릿흐릿 무타구치 렌야와 함께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병맛 넘치는 인간. 상당히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의외로 무타구치 렌야의 발포명령을 받았을 때도 "예? 바, 발포해야 합니까?"라며 당황했다고 한다. 이전 버전에서는 이게 고문관스러운 행동이라고 까고 있는데 무타구치 렌야나 노구교 사건 항목을 보면 알겟지만 무타구치가 부하들에게 사전에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이다.지휘관이 비정상이라 상식적으로 반응하는 게 이상해 보이는 효과 훗날 과달카날에서 20일 22시 30분에 에드윈 블록 중령이 이끄는 미국 1 해병연대 2대대 진지에 반자이 돌격을 하다가 자신과 777명의 병사와 장교들과 함께 그대로 정글의 고깃조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치카 지대를 이끌고 파병을 가기전에 제17군 참모에게 "툴라기 섬(과달카날 옆에 있는 섬)도 우리 부대가 탈환해도 되나?" 라고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는 한거야?! 당시 일본군은 필리핀 전투등으로 미군의 전력을 매우 얕보고 있었고 야습과 총검백병주의 사상에 대한 무모할정도의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과달카날 전투 아니었어도 죽을 목숨이었다. 그 전에 미드웨이 상륙작전을 지휘하기로 했는데...자세한건 항목 참조.

  • 나가사와 칸이찌☆
長澤貫一 .일본 육군 대령. 람리섬 전투의 주범. 이 한심한 행동일본군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보라. 게다가 이 인간 상관인 미야자키 시게사부로가 여긴 악어 서식지라 공격하면 안 된다고 반대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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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留繁 1891.02.01~1971.02.06

해군 중장. 태평양 전쟁때 일본 해군 연합 함대의 참모장으로 활약한 인물. 그러나 필리핀 탈환 때 훌륭한 삽질로 패전에 공헌(...)한 바가 있다. 작전 계획이 미군 손에 넘어갔는데 이를 알면서도 작전 계획 그대로 속행, 결전 지역에서 미군이 미리 보내놓은 잠수함에게 역습을 겪어 항공모함 3척이 격침 당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는 그러고도 제2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게다가 소지하고 있던 기밀문서[9]를 미군 게릴라들에게 강탈당하고 포로가 되었다.[10] 거기다가 일전에 야마모토가 폭격기로 진주만 공습을 계획하자 함대를 보내는 함대 결정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그는 삼대오물츠지 마사노부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상당히 적다.

9 인간 쓰레기

민간인이나 포로의 계획적 학살, 생체실험을 저지른 사람이기를 완벽하게 포기한 명단이다. 사실 이들은 그 무엇과 비교하더라도 비교당하는 대상에게 큰 실례이고, 인간의 탈을 쓴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중령 ~ 원수의 경우 ☆로 하사~ 소령은 ★로 병사는 ◎로 표기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봉헌된 자도 있으며, 지금도 수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참배를 받으며 순국선열로 존경받고 있다.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범인들은 치치지마 식인 사건 항목도 참고.

특히 더더욱 악질은 볼드체로 서술한다.

전임 미나미 지로 못지 않은 사악하고 못된 짓을 연이어 일삼은 조선 총독. 일본 상층부에서 고이소를 부르는 별칭은 조선의 호랑이인데, 호랑이처럼 성질이 더러워서 붙였다는 말이 있다. 전임 총독의 정책을 이어 받아 민족말살정책을 수행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서 한글 학자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또 지원병 제도를 학도병 제도 및 강제 징병제로 강화 개편하여 무고한 조선 청년 및 소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삼간사우 중 사우에 해당되는 인물. 그러나 그의 진정한 실체는 미얀마 사람 수십만 명을 학살한 인간 쓰레기이자 이시이 시로와 함께 최학의 쓰레기이다. 일본제국하인리히 힘러.(아니, 어쩌면 전자를 능가할지 모른다. 영국에 대한 전쟁침략죄까지 있으므로.) 학살의 규모도 대단해서 최대로 추산하면 100만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전범 재판 당시 "미얀마 정부는 내게 훈장을 줘야 한다. 내가 미얀마의 인구 문제를 해결해 줬기 때문" 이라는 개소리를 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변호인들조차 황당해 하며 변호를 포기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버마 죽음의 철도를 만든 장본인이며 바탄 죽음의 행진을 비밀리에 명령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사우에 해당되는 다른 인물들이 재판에 회부되지 않거나 종신형을 살다 풀려난 것과 달리, 전범 재판에서 살인 혐의 등이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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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平事件 1905.01.28~1949.10.05

(일본 위키는 바로 고다이라 사건으로 연결된다. 요시오 항목이 없다.) 중국 전선에서 병사로 종군하며 최소 여섯 명의 중국군 포로를 살해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중국인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했으며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찌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귀국 후 패전 후의 혼란을 틈타 장을 보러 나온 일본인 여성들을 속여서 물건을 빼앗고 수십 명을 강간했으며, 이 중 저항한 여성 7명은 살해하고 심지어 시간까지 저질렀다. 경찰에 체포된 뒤 "중국 전선에서 맛봤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라고 진술해 전 일본을 경악에 빠뜨리고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전범이니 뭐니 이전에 그냥 연쇄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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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浜彰 1895.05.23~1947.03.31

필리핀 지역 헌병 사령관. 고문의 천재이자 고문의 황제로 수 많은 필리핀 인들을 학살과 고문으로 죽인 악질 전범. 이놈은 사이타마 현 출신으로 1917년에 육군사관학교 제 29기를 졸업한 뒤 소위가 되었다. 1928년에는 헌병대위가 되어 이후 헌병계로 일하여 1933년에 헌병사령부 제 3과장이 되었고, 1942년 8월에 헌병대좌가 되어 9월에 필리핀 제14군의 헌병대장이 되었다. 1944년 7월에 조직개편으로 인해 제14방면군 헌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1945년에는 쿠레지구 헌병대장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1945년 9월에 연합국에게 전범으로 체포되어 A급 전범으로 투옥되었다. 그는 필리핀으로 연행되어 헌병사령관 시절에 필리핀에서 포로들의 학살행위와 관련 B급 전범으로서 마닐라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47년 3월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 ★ 나카지마 노보루

역시 치치시마 식인사건의 공범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식인사건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포로학대로 포로 2명을 살해한 죄가 있다. 그러나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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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村琢磨 1889.09.01~1951.06.11

제25군으로 싱가포르 공략전에 참가한 후 싱가포르 주변의 잔병소탕을 했는데 이 때 싱가포르의 화교들을 전쟁협력자로 몰아 대량학살했다. 다만 싱가포르 학살의 경우는 혐의가 확실치 않으나 현재는 츠지 마사노부가 주도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느 정도는 개입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전후 그가 전범 재판을 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 1942년 7월 15일에 예비역이 되어 군에서 물러난 니시무라는 1943년 4월 15일에 다시 육군 사정관에 임명되어 6월 20일부터 버마의 샨 주정부 장관, 1944년에 수마트라 지사로 일했다. 1945년 종전 후 니시무라는 영국관할인 싱가포르의 재판정에 세워졌지만 극형을 면했다. 하지만 호주정부는 마누스 재판에서 포로살해 혐의로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려 1951년 6월 11일에 니시무라는 마누스 섬에서 처형되었다.
  • ★ 노다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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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오른쪽 인물
野田毅 1912.06.11~1948.01.28

난징 대학살 때 같은 소위인 무카이 도시아키와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인 일본군 소위. 무카이와 마찬가지로 전투에서 일본도 들고 저항하는 적군을 참수해 가며 벌인 게 아니라 살려 달라고 투항한 포로나 민간인 끌고 와서 한 짓이었다. 당연히 전후 전범으로 분류되었고, 재판에서 당시의 사건 기사화 를 근거로 사형되었다. 참고로 외모를 보면 100명 참수라는 미친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둘 다 멀쩡해 보인다. 사람은 절대 겉모습만 보면 안 된다는 좋은 사례.

  • ★ 다나카 군키치

난징 대학살300명 목베기를 달성한 인물. 전후 재판에서 당시 사건이 기사화된 것을 근거로 사형. 더 기가 막히게도, 전범재판 때 "난 무죄"라고 떠들어 댔고 살려 달라며 애걸복걸도 했다. 위의 노다 츠요시와 무카이 도시아키가 처음에는 무죄라고 떠들었지만 사형 직전에는 결국 자신이 저지른 짓을 뒤늦게나마 순순히 받아들이고 책임을 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간수들에게 매일 두들겨 맞았다.

  • ☆ 다니 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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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 寿夫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난징 대학살 당시 마츠이 이와네 휘하에서 학살을 주도했던 제6사단의 사단장으로 역시 사람이기를 포기한 인간 쓰레기.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인 무카이와 노다 츠요시도 그의 휘하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이며 밑의 조 이사무와 함께 학살 행위를 직접 주도한 실질적인 주동자이기도 하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정부는 전범재판을 위해 다니 히사오의 신병을 요구했다. 이에 종전 후 중국에 남아 중국내의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히사오는 1946년 2월에 GHQ에 의해 중국으로 소환되어 상하이와 난징에서 부하들의 민간인과 포로 학살, 강간 등을 유발시킨 범죄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고, 1947년 4월 26일 총살형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현재 일본의 우익들은 다니의 죽음은 중국측의 석연찮은 증거자료로 인한 것이었다며 이놈을 변호하고 있으며 난징대학살의 관련책임을 거짓말이라 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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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생 - 1947년 12월 6일 사망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 폰티아낙에서 민간인 2만명이 살해된 '폰티아낙 사건'의 장본인이다. 폰티아낙 사건이란 일본군에 협조를 거부한 인도네시아 현지주민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사건으로 무려 2만명이 학살당했던 사건이다. 그리하여 훗날 네덜란드군이 긴급체포해 재판 후 3시간 뒤 총살되었다. 이는 네덜란드 측이 피고의 변호 등을 거부하고 보복적으로 사형 판결, 집행한 것인데 재판을 제대로 않고 즉결처분한 점에서 네덜란드 정부의 잘못이 있지만 그가 학살을 주도한 것 자체는 명백한 사실인지라 동정하는 사람은 없다.최종계급이 해군중장인 다이고의 유품 중 군모가 현재 야스쿠니 신사 우슈칸에 전시되고있다.

  • ★ 다카쿠와 타쿠오

산다칸 행진의 주범. 그래서 죽기 전에 헌병들에게 반병신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았고, 유언도 못 남기고 교수대에 목매달린다.

高橋 隆篤, 1888년-1952년

관동군 수의부장이자 100부대 사령관이었던 놈으로 그 악명높은 731 부대에서도 일하며 일본군 마루타 창시자로 이시이 시로 급의 인간말종. 결국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2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포로들과 달리 마구 두들겨 맞으며 혹사받아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竹田宮恒徳 1909년 3월 4일 ~ 1992년 5월 11일)

황족으로 731 부대의 실세. 최종 계급은 육군 중좌. 이놈은 아래의 다카히토처럼 왕족인데.... "그 정도 생체 실험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미국도 원자폭탄을 만들어 히로시마에 투하하지 않았는가"라는 천하의 개소리를 씨부렸다. 아 그러셔? 그럼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은 실험대기자 구해줬는데 그건 안 열받냐? 다카히토는 전임 다이쇼의 아들이자 당시 재위 중이던 쇼와(히로히토)의 동생, 즉 '직황족'인 반면(혈통 상은 강인노미야), 츠네요시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갈라져 나온 '방계 황족(세습친왕가)'(혈통 상으로는 후시미노미야) 라는 차이점이 있다. 물론 차이점이 있다고 개소리가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참고로 이놈과 다카히토는 황가 혈통으로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이놈 어머니가 메이지의 딸 마사코(昌子)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촌지간이 된다. 원래 731부대에는 이시이 시로보다 더 악질인 자들도 많다. 그들은 이시이 시로와 달리 최고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죄값조차 치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촌동생이며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키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가 진실을 안 뒤 "너같은 놈을 형이라 부른 내가 부끄럽다. 이런 인간말종아!" 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인연을 끊고 만다. 웃긴 사실은 이러한 범죄에도 그는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A급 전범추가바람

해당 항목 참조.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의 주동자로 희생자 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범행 동기 및 수법이 같은 일본군들조차도 아연실색할 정도로 잔혹하여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https://ja.m.wikipedia.org/wiki/%E3%83%95%E3%82%A1%E3%82%A4%E3%83%AB:Mayuzumi_Haruo.jpg

黛治夫 1899년 10월 2일 생 - 1992년 10월 29일 사망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의 함장(당시 대령)이었으며, 1944년 3월에 베허호 사건을 일으켜 80명의 민간인 포로들을 참수했지만, 전범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왜 사형이 아니라 7년형을 선고받았냐면, 이 사람은 적극 가담이 아닌 소극적 가담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판결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홍콩 전범재판에서 영국군 심문관에게 "군기와 문장을 숨기고[11] 포로 학살을 저지른건 사실이나, 작전 중에 포로를 잡거든 신속히 처리하라는 상부의 엄중한 지시가 있었다."라는 진술을 하는 바람에 사콘조 나오마사 중장의 신병이 인도되어 함께 홍콩에서 재판을 받고, 본인은 7년형, 사콘조 중장은 교수형이라는 엇갈린 운명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인도양 출격은 3월 15일에 종료되었고, 이후 토네는 16전대의 관할에서 벗어났으며, 베허호 사건은 3월 18일에 일어났다. 사콘조가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책임을 지기가 애매하다는 이야기다. 예시당초 토네는 7전대 소속이고, 인도양 출격 당시 공백을 때우기 위해 임시로 16전대에 잠깐 소속된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마유즈미는 베허호 사건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고, 학살극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마유즈미는 잘 먹고 잘 살다가 1992년에 편히 죽었다. 자세한 내용은 토네급 중순양함 항목 참조.

  • ★ 마토바 스에이사무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당시 다치바나 요시오의 부관으로, 이 사건의 행동대장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건 아예 그 죄를 호리에 요시타카 소령과 타마무라 조장(상사)[12]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했다. 이놈은 아예 사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헌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사형수라도 사형 집행 전까지는 제대로 대우해 주는 게 원칙이라는 점에서 미군 헌병들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가 저지른 죄가 워낙 악질이고 마지막까지 참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정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 모리 구니조

일본 해군 최악의 인간 쓰레기.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다치바나 요시오와 함께 주도하였다. 더 막장인 것은, "이보게 다치바나 중장, 미군놈들 고기는 매우 질기구만... 차라리 위안부 년들의 고기를 배급해주게... 그게 차라리 연하고 부드럽더구만..."[13] 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치치시마 일로 인해 종신형을 받고 있었는데, 조금 뒤 자신의 죄를 부하에게 뒤집어 씌웠던 일[14]이 발각되어서 결국 총살당했다. 게다가 제대로 빡친 네덜란드 측에서 그냥 총살한 것도 아니고 중기관총을 난사해서 고깃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 ★ 무카이 도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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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왼쪽 인물

(向井敏明 1912년 6월 3일 ~ 1948년 1월 28일)

난징 대학살 때 같은 소위인 노다 츠요시와 100인 참수경쟁을 벌인 일본군 소위. 전후재판에서 당시의 사건 기사화를 근거로 사형. # 참고로 그가 전쟁범죄자 및 인간 쓰레기로 분류된 건 참수 경쟁이 전투 중에 적군 목을 베는 참수 경쟁이 아니라, 살려 달라며 투항한 중국군 포로나 죄없는 민간인 끌어다 숫자 채워 가며 죽인 것이기 때문이다.

제7대 조선 총독.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선봉장. 역대 조선 총독 가운데 가장 강경하고 과격한 통치를 일삼았으며, 조선에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고 지원병 제도를 제창하여 무고한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1954년 건강 악화로 가석방을 받았고, 1955년에 죽었다.


馬場正郎1892년 1월 7일 - 1947 8월 7일

산다칸 행진의 주범이자 총책임자. 심지어 포로들이 기진맥진하고 죽기 직전의 상태임에도 계속 걸으라고 해서 수많은 포로들을 죽게 만든 놈이다. 이 때문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佐部鶴吉

구축함 아키카제의 함장. 라바울로 포로를 호송하던 도중 민간인 포로들을 바다로 떠밀어 죽였다. 자기네 동맹국 독일헝가리 거류민들까지 전부 다. 이에 대하여는 민간인이라는 점 때문에 쓸모가 없어 그냥 죽여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더 어처구니 없는건 아키카제가 침몰할 때 함과 운명을 함께 하긴 커녕 자기 혼자 몰래 구명보트에 올라 도망쳤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연합군 폭격을 맞고 구명보트와 함께 침몰했으니 나름 죄의 대가를 치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안습인건 상관인 쿠사카 진이치 중장이 이 학살을 뒤늦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분개했는지 "이자식, 만약 살아서 돌아오면 라바울 앞바다에다 쇠사슬로 묶어서 수장시켜버릴테다."라고 길길이 열내고 있었다. 만약 혼자서 살아 돌아왔더라도 운 좋으면 총살이고 재수없었으면 자기가 죽인 민간인들처럼 바다에 떠밀려 죽었을것이다. 왜냐고? 이 사람은 매우 성질이 급해서 전쟁 범죄는 절대로 그냥 안두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 ☆ 사쿠마 사마타


佐久間左馬太 1844년 11월 19일 ~ 1915년 8월 5일)

타이완 총독, 도쿄 위수 총독, 근위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던 인물로 아타얄족과 부눈족의 학살한 자. 이때문에 훗날 우서 사건이 일어난 빌미가 되었다.


佐々木到一 1886 년 1월 27일 - 1955년 5월 30일

다니 히사오랑 마찬가지로 난징대학살의 주범. 만주국 창설에 크게 기여를 했으며 전후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엄청난 혹사와 구타를 당했고 그 후 다시 중국으로 넘겨진 사사키는 1955년에 푸순의 공산당 수용소에서 열나게 얻어터지다 결국 차가운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겪었다.

  • ☆ 스즈키 케이쿠

5000여명을 학살한 전범 증언에 의하면 그는 (지시·명령 등을 통해) 5천470명의 중국인을 살해했고 1만8천229채의 주택을 파괴했다. 아마도 실제 숫자는 더욱 많을 것이라는 증언이나 "마을에 콜레라균을 퍼트렸다" "'공기주입 살인'을 실험했다" "생매장 등을 통해 집단학살했다" 등의 증언들이 있다. 참조바람

조선인 출신 군인으로 일본 헌병으로서 진해의 일본 해군 군용기 공장에서 근무하며, 오장(伍長, 일본군 하사)을 거쳐 조장(曹長, 일본군 상사)에 올랐다. 만약 이력이 여기서 끝났다면 아래 항목에 기재됐겠지만.... 이놈은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항일 혐의로 체포된 피의자를 직접 고문한 악질 친일파 되시겠다. 거기다가 "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라는 헛소리를 해 거기 있던 훈련소장마저 당황해했다. 당연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있다.

  • ★ 아베 이치오

산다칸 행진의 행동 대장. 역시 총살형에 처해졌다.

난징 대학살 당시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황족이라 처벌은 못했지만 이후 황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전쟁 범죄의 책임을 물어 거의 전 재산이 몰수된 것은 물론, 평생을 학살 가담자로 살아야 했으니 어느 정도는 죄값을 치른 셈이다. 조 이사무 등과 더불어 난징 대학살의 실질적인 최종 책임자 후보로 거론된다.

  • ★ 오스지마 츠즈미

산다칸 행진의 주범. 이것 때문에 수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죽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창시자. 상해 사변때 일본군 병사들이 계속해서 강간범죄를 일으키고 성병에 걸리자, 성병을 방지한다는 미명아래 만들어내었다.전후 중국에 남아있을 때 장개석과의 친분을 써서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고 넘어갔다. 참고로 그 악명높은 신멸작전]의 실행자로 알려져있는데 제대로 된 기록이 없는 탓에 아직까지 파악이 안되고 있다.

岡部直三郎 1887년 9월 30일 - 1946년 11월 23일

오카무라 야스지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의 공동 창시자. 일본군인의 강간사간이 계속 발생하지 이러한 강간이 중국인의 분노를 사게 되자 서둘러 성적 위안시설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때 한말이 아주 가관이다.

곳곳에서 일본 군인의 강간 사건이 전반적으로 전파되어 예상외의 심각한 반일감정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군인 개인의 행위를 엄중히 단속함과 동시에, 군인의 성적 욕구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설비를 마련하는 것이 긴급하다." - 출처 소녀 이야기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지만 오카무라 야스지와 차이점이 있다면 한커우에 주둔중 종전을 맞아 중공군에 신병이 인도되어 상하이에 수감 중 1946년 그곳에서 병사했다는 점이다.

  • 오카다 게이지

岡田慶治

일본 육군 소령으로 네덜란드인 강간사건 스마랑 강간 사건의 주범이자 다나카 군키치의 300인 참수의 경쟁자. 위안부 사업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며 스미랑 강간 사건 당시 네덜란드인 여성 35명을 강제 연행한 뒤 스마랑에 있던 위안소에 감금하고 강제로 매춘을 시키고 강간한 사건을 일으킨 인간말종. 결국 총살형받고 모리 구니조랑 사이 좋게 총살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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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군사 재판 당시의 우메즈 요시지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 美治郎, 1882년 1월 4일 ~ 1949년 1월 8일

별명은 무언의 장군. 일본의 육군차관이었던 자로 비록 학살과 포로학살은 안 저질렀지만 그는 위안부 정식 승인자다. 이걸 하나로 그는 이 항목에 충분히 들어간다. 전후 열린 전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1978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여담으로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츠 마모루와 함께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 ☆ 우츠노미야 다로


宇都宮太郞·1861~1922

조선군 주둔 사령관. 제암리 학살사건, 간도 참변 등을 주도한 한민족의 철천지 원수. 그는 1922년 사망했기 때문에 중일전쟁태평양 전쟁과는 관련이 없으나, 민간인 학살을 적극 주도, 실행하였기 때문에 이 목록에 분류되었다.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고


大久保春野 1846년 10월 8일~ 1915년 1월 26일

조선군 주둔 사령관. 남한 대토벌 작전의 주범이자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 남한 대토벌 작전이 독립군이건 민간인이건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형태였음을 감안하여 인간 쓰레기 항목에 분류 되었다.

  • ☆ 요시이 시즈오

일본 해군 대좌. 모리 구니조랑 함께 일본 해군 최악의 인간 쓰레기.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당시 식인을 주도했던 인간으로, 해군선옥론을 반박할 때 이 인간 이름이 나온다. 게다가 전범재판 때도 뻔뻔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15], 이에 열받은 미군 헌병들이 전부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뼈가 60개나 부러져서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팼다. 유언으론 "그만 때려!! 너무 아프단 말야!!"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에서 벌어진 베허호 사건의 진범이 이 자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건 아닌것 같다.

731 부대장. 다치바나 요시오기무라 헤이타로와 쌍벽을 이루는 최악의 인간 쓰레기. 당연히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한놈이지만 미국에게 연구자료를 넘기는 대가로 풀려났다. 2005년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이시이 시로는 면죄뿐만 아니라 당시에 현재 시가 4000만엔에 해당하는 거액과 향응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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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 勇 1895년 1월 19일 ~ 1945년 6월 23일)

난징 대학살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 중 하나. 사실 상해 파견군 총 사령관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은 건 황족 신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학살을 직접 주도한 자가 조 이사무로 여겨져 면책의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자세하게는 포로 처형을 내린 게 야스히코가 내린 것인지, 야스히코의 이름을 빌려서 조 이사무가 독단적으로 했는지[16]에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처벌을 확실하게 받지 않았다는 것. 오키나와 전투 때도 자국 민간인을 상대로 똑같은 짓을 함으로써 인간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걸 행동으로 입증했다. 그런데 전범 재판을 받고 죄값을 치르는 대신 전투에서 패배할 지경에 놓이자 할복 자살을 택했다. 결국 그의 죄값은 마츠이 이와네[17]가 대신 짊어졌고, 그 결과 마츠이 이와네가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 외에도 이놈은 부하들을 구타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18] 당시에는 공세를 중시한 맹장으로 알려졌으나 정작 오키나와 전투에서 그런 공세는 일본군의 피해만 가중시켰다. 여담으로 다나카 류키치 앞에서 대놓고 학살 인증을 하자 다나카 류키치는 "아 이제 우리 일본은 끝장났구나..."라며 탄식했다.

흔히 한국 독립 유공자라고 조롱받지만, 실상은 간신이자 학살자. 그는 매우 사악한 자였다. 싱가포르 화교 대학살 자행한 자이여, 바탄 죽음의 행진에 관여했다. 한편으론 식인을 했다는 소문도 있다. 원래는 전범재판에 연루될 경우 사형감이지만 종전 후 장제스와의 친분을 이용해 잠수를 타서 공소시효를 넘겨 기소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음모와 잔혹행위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일본 정계에 진출하는 등 성공을 했다는 점은 그가 교활한 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실이다. 삼대오물이 그냥 멍청하고 무능해서 일본군에 악영향을 끼친 반면에, 츠지 마사노부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간악한 술수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여담으로 국회의원을 한 뒤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침범하려 시도한 전적도 있다. 물론 독도 침범은 그냥 침략 시도이기 때문에 인간 쓰레기의 근거에는 안 들어간다. 하지만 이 인간이 그 이전에 저지른 반 인륜 범죄가 워낙 많아서 인간 쓰레기 명단에 집어넣었다.

  • ☆ 카마타 야히코

일본 육군 중장으로 대만 우서 사건의 장본인.


(本間 雅晴 1888년 1월 28일 ~ 1946년 4월 3일)

필리핀 침공 당시 사령관으로 니가타 현 사도가시마 출신, 17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11만의 미군+필리핀군 연합군의 지연전에 휘말려 만주, 싱가포르 등에서 5만여 명의 증원이 오고 나서야 겨우 방어선을 돌파해 웨인라이트의 항복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적인 군인으로 취급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가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바탄 죽음의 행진의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죽음의 행진에 있어 츠지 마사노부보다는 관리를 일부러 엉망으로 한 이쪽이 더 까이는 편인데 사실 츠지 마사노부의 지시는 중요 명령을 문서로 직접 내리는 일본군 특성상 명령의 진위를 의심한 지휘관들이 많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리핀에서의 확전으로 예비역으로 예편된 후에는 군에 등용되지는 못했다. 종전 후 마닐라 전범재판에 소환되어 당시 포로학대 행위와 죽음의 행진을 강행한 책임자로 판명되어서 미군들에게 수감 기간 내내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고 하며,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졌다. 1946년 4월 6일, 일반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지던 관례와는 달리 그는 군인으로 명예롭게 죽겠다는 유언이 받아들여져 군복을 입은 채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유언은 별도로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의도적으로 학살극을 벌이지 않은 점에서 위에 속한 다른 쓰레기들에 비해서 평가가 좀 애매하긴 하다.

10 비운의 군인들

전사한 사병제외 일본군내 최악의 피해자
비록 일본군이었지만 일본군 내부 구타 등으로 정신병 등에 걸려 고생한 인물들의 목록이다. 이 사람들이 죄가 있다면 그저 국가를 위해 충성한 죄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정말 불쌍한 걸로 치면 징집, 징용, 위안부 피해자들과 학살 피해자들 그리고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지만, 일본군 한정으로는 이들이 불쌍하다고 할 수 있다.

  • 마키노 아키라 - 일본군 군의관으로 필리핀 생체 해부 사건의 가담자.[19] 그러나 그는 당시 자신이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떨었지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실험을 거부할 경우에는 구타와 함께 본인 또는 가족 살해 위협을 받았고, 심지어는 실험을 거부하는 동료가 눈 앞에서 일본도로 찔려 죽는 것까지 목격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실험 대기자 일부를 몰래 구해주다 들켜서[20] 미군이 필리핀을 점령할 때까지 일본군에게 구타 당했다. 그 때문에 종전 후에도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2006년에 이 실험의 실체를 폭로하였다. 그는 "우리는 역사에서 다시는 그러한 끔찍한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한 사람 아니 두 사람이 될지라도 전쟁 중 있었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다" 라고 말했다. 2007년에 사망했다.
  • 하야시 미노루 -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당시 요시이 시즈오의 부하로 해군사관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인재였지만 요시이와 모리 구니조의 무자비한 구타와 폭행으로 결국 포로를 처형했다. 그 때문에 이 사람도 정신과 치료를 죽을 때까지 받아야 했다.

11 조선인 출신 일본군

일본에선 조선인 일본병(朝鮮人日本兵), 중국에서는 조선적일본병(朝鮮籍日本兵)이라고 표기한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해당 항목이 있으나 걸러 읽을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 일본어판 조선인 일본병. 자세한 내용 및 인물 목록은 조선인 일본군 항목을 참고할 것. 일단 광복 당시 높은 계급 순으로 대좌까지만 꼽자면

  • 영친왕 - 일본 육군 중장. 어쨌든 군인(...)
  • 홍사익 - 일본 육군 중장. 일본군 중에 전범으로 처형된 유일한 조선인 장성. 다만 애초에 조선인 장성이 홍사익과 영친왕 단 둘 밖에 없었다.

...가 있다. 딱 넷이다. 일본군 안에서 조선인이 출세하기 힘들었다기보다는, 아예 조선인을 입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고급장교가 적은 것이다. 황족인 영친왕을 제외하고, 세 사람 모두 대한제국군에서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대한제국이 소멸하면서 그대로 일본군으로 전속된 인물들이다. 일본군은 30년대 중반에 가서야 조선인을 육군사관학교에 입대시키기 시작했고, 이 세대의 조선인 장교들이 종전 당시 소좌급이었다.

그 외 특이한 인물로는

  • 이종찬 - 일본군 소좌 및 훈장 수여

12 기타

일본군의 에이스였으며, 카미카제로 미국의 호위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 카미카제 명령을 받았을 당시 일본을 대차게 까는 글을 남기고 사망했다[23].

  • 쿠노 고후 - 세키 유키오와 함께 최초의 특공 시행자. 그러나 전과 불분명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 아라키 유키오 - 최연소 카미카제 특공 대원. 향년 16세.
  • 도미나가 야스시 - 도미나가 교지의 장남, 후일 카미가제로 산화. 부친과 달리 군인다운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 고마츠 테루히사 - 구황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입건, 감옥살이를 한 인물. 물론 해당인은 21세 때 신적강하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황족은 아니다.
  • 칸인노미야 하루히토 - 황족 군인. 히로히토의 친척.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 황족 군인. 육군 소장으로, 1940년부터 결핵으로 요양중이었기에 전쟁과는 연관이 없다. 일본 내에서는 스포츠와 등산을 애호하여 마터호른을 등반하고 럭비장, 스키장 등을 건립한 체육인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젊었을 적의 황도파 지지(...)와 일-독 동맹을 고려하여 삼국동맹을 지지한 것이 흠으로 꼽힌다정작 본인은 히틀러는 변덕쟁이니 신뢰할 수 없다고 했으면서.
  • 사카마키 가즈오 - 진주만공습 때 잠수함 대파로 표류하다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됨. 일명 일본군 포로 제1호.
  • 스기야마 타츠마루 - 일본군으로서의 행적보다는 복원 후 인도의 녹지 개간, 식목에 힘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정작 일본에서는 인지도가 듣보잡 수준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아버지가 바로 소설가 유메노 큐사쿠
  • 이타쿠라 미츠마 - 일본군 장교로서 수많은 기행, 일화를 남긴 희대의 괴짜.
  • 니이미 마사이치 - 해군 장성으로 최장수한 인물. 향년 106세
  • 카타쿠라 타다시 - 육군 장성으로 최장수한 인물. 향년 103세
  • 케네스 유노네 - 연합군 부사관을 참수하는 사진의 주인공. 후일 전범으로 처형되었는데 사실 이 참수 사진만으로는 전쟁 범죄자가 아니라 처벌이 불가능했으므로 다른 학살 혐의가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통 이런 사진의 주인공들은 스파이만 처형한 게 아니라 조종사 포로의 참수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관련 혐의가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사진의 참수당한 사람은 그냥 포로나 탈출한 조종사, 민간인이 아니라 스파이라 즉결처분도 가능했기 때문에 이 자를 처형한 것만으로 전범으로 처벌하긴 힘들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군 스파이들을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한 전적이 있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똑같은 짓을 했다고 처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말 무고한 포로를 죽였는가를 추가로 추궁했고 탈출한 뒤 포로가 된 조종사까지 죽인 게 사실로 확인된 경우에만 사형에 처했다.
  • 오노다 히로 - 필리핀 잔류 일본군으로 유명한 인물. 육군 정보병과 소위로 필리핀 주둔 육군 8사단 정보참모부 소속. 전쟁 이후에도 자기만의 전쟁을 지속하며 수많은 필리핀 민간인을 살해했다. 행태만 보자면 인간 쓰레기가 맞지만 이쪽은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다는 전술상의 이유로만 저질렀으니 인간 쓰레기 항목에 그대로 넣기는 좀 애매하여 이쪽에 넣었다. 참고로 필리핀 정부는 그를 사살하기 위해 수차례 토벌군을 보냈지만 모두 실패해, 1974년 끝내 일본에서 데려갔다.[24] 근 30년을 정글에서 숨어 살던 오노다는 격변한 전후 일본 사회에 적응을 못해[25] 친척이 있던 브라질로 이민갔다가 귀국, 이후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극우활동을 하다 2014년에 사망.
  • 요코이 쇼이치 - 에서 발견된 잔존 일본군으로 전쟁 전 직업은 양복 재단사였으며 원래 1935년에 군 입대하여 병역을 마쳤다가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재소집된 예비역이었다. 제38 보병연대 오장(하사)였을 때 괌이 미군에 점령되며 본대와 떨어져 고립되었다가 1972년에 발견되어 귀국 후 조용히 일본에서 여생을 보냈다. 항복을 거부했지만 망상 속에서 혼자 전쟁하던 오노다와 달리 현지인을 최대한 피하며 동굴에서 살고 수렵채집을 하며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개천에 낚시하러 갔다가 우연히 현지인과 만나[26] 그의 존재가 알려져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공항에서 귀국 인터뷰 때 한 첫마디 "부끄럽게도 살아서 돌아왔습니다(恥ずかしながら帰って参りました)."는 그 해의 유행어이자 그를 대표하는 한 마디였다. 오노다와는 달리 무난하게 사회에 적응해 자신의 힘들었던 정글 생존기를 강연하며 살다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노다 히로가 당시 자행한 행동과 대조되는 점이 많은 인물. 이것은 오노다는 악명높은 나카노 학교 출신 장교였던 데 반해 요코이는 서민 출신의 징집병이었다는 출신의 차이가 가장 큰 차이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TV드라마 600만불의 사나이에도 이름을 바꾸어 등장했다.
  • 사콘조 나오마사 - 16전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잠시 합류했던 7전대 소속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가 일으킨 베허호 사건의 용의자로 사형.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시로 대장이 종전 이전 병사하여 그 대타로 걸려들었다. 토네가 원래 7전대 소속이고 인도양 출격 임무는 3월 15일에 종료되었으며, 이후 토네는 16전대의 관할에서 벗어났고 사건이 일어난 건 3월 18일이므로 무혐의 처분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는 형식적인 재판 뒤, 본보기로 교수형을 집행했다. 포로를 살해했다면 사형이 마땅하지만 이 사람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음에도 대타로 걸려들어 이 항목에 집어넣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혐의를 완전히 입증하지 않고 대타로 교수형을 당했을 뿐이지, 학살 명령을 딱히 이의없이 받아들인 점이나 토네에 수용 능력이 없음을 이유로 학살을 명령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기에 완전히 억울하게 죽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구두로 명령이 하달된 탓에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의견이 분분한 편. 또한 1947년 진술서에서 미군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학살하고 병원선에 폭격을 가해 사상자를 냈으며, 이에 일본군은 미군이 자군의 인(人)력을 상실시키려 한다며 보복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참고로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엄, 청결하고 전형적인 군인다운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근거로 학살 명령을 내릴 사람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 니시즈미 고지로 - 일본의 전차에이스응?로 그 89식 중전차BT 전차를 잡았던 일본군에 단 둘밖에 없던 전차에이스. 오죽하면 일본 정부에서 직접 군신으로 추앙했다.
  • 이케다 스에오 - 역시 일본의 전차에이스97식 전차T-26전차와 BT 전차를 잡았던 일본군에 단 둘밖에 없던 전차에이스.
  • 오오바 사카에 - 사이판 전투 당시, 남은 병사들과 함께 종전후에도 저항을 하였던 인물.

13 징집으로 군복무한 인물

일본군이 존재할때 있던 징병제그것을 정하는 틀에 의해 징집되어 병사로 복무를 했고, 일본군 내에서는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없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유명한 인물. 대부분 메이지, 다이쇼 연간에 태어난 일본의 남성들로 징병제에 의해 자신에게 보내진 입영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군에 입대한 인물들이다.

  1. 特攻せず 夜襲部隊, 2015/7/11 静岡新聞 http://www.at-s.com/news/article/featured/culture_life/wadachi/61626.html
  2. 연공서열, 정신력 운운
  3. 250만명이라는데, 정말로 그랬다면 난징이 묻혔을지도 모른다.
  4. 동일 인물이다.
  5. 아무 배경지식 없이 보기에는 A급이 B, C급보다 더 중할 거 같아 보이고 스케일로 보더라도 일견 그렇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A, B, C급을 전부 똑같이 범죄자로 취급한다. A급의 경우 주로 개전 책임같이 보다 거시적인 차원의 범죄와 관련된 것이고, B, C급의 경우 전쟁에서의 포로 학대나 기타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와 관련된다.
  6.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을 막은 장본인
  7. 말 그대로 세계 최종 전쟁론.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개발되면 이 무기를 통한 최종 전쟁을 거쳐 인류는 통일된다는 주장으로 일본 내에서는 핵무기와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예언했다고 엄청 떠받들고 있다.
  8.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일본군을 위해 유일하게 잘한 일이 이것이라는 점이다. 부대의 상태로 보건대 어차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9. 이게 무슨 문서인지는 추가바람
  10. 더 황당한 건 고가 미네이치 대장마저 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11. 전시 국제법 위반사항이다
  12. 이 사람은 플로이드 홀을 구해주려다 호리에랑 사이 좋게 얻어맞았다.
  13. 이 내용에 대한 자세한 출처 바람..
  14. 그 부하는 그 죄로 인해서 처형당했다.
  15. 뭐라고 했냐면 "승전국에서는 다 한 사람의 전범이 나오지 않았다. 너희들부터 심판하기전에 남의 죄를 심판하지마라.",너희가 심판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느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해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16. 하지만 이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상관의 명령을 위조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인데 야스히코와 마츠이 이와네가 조 이사무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17. 난징 대학살 당시 조 이사무의 상관이긴 했지만, 정작 학살이 실행될 당시에는 와병중이라 부대를 지휘할 수 없었다.
  18. 근데 일설에 의하면 자살한 게 아니라 죽는게 겁이 나서 미군에게 목숨이라도 구걸하려고 했는데 병영부조리에 치를 떤 부하들이 일부러 두들겨패고 칼로 찢어 죽인뒤 할복 자살로 은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일 이게 사실이면 그나마 죄값을 치른 셈.
  19. 사실은 일본 해군 최악의 인간 말종 모리 구니조가 진범이다.
  20. 다행히 그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21. 심지어 이놈들 중에는 호리에보다 계급이 낮은 것들도 있었다.
  22. 흔히 관동군 장교로 알려져있지만, 위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아예 받아주지를 않았다
  23. 내용을 요약하면 '늬들이 하라고 해서 하긴 하는데, 거지같은 일본 제국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내 아내를 위해 하는 것이니 그리 알아라.'
  24. 독재자로 유명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오노다를 사면시켰다.
  25. 헬기만 지나가면 정글에서 쫓기던 생각이 나서 덜덜 떨었다.
  26. 일설에 따르면 어망에서 자꾸 가재, 생선 등이 사라지자 도둑을 잡으려고 잠복중이던 현지인에게 잡혔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