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탈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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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필리핀 인민들이여, 나는 돌아왔다) ― 더글러스 맥아더

Philippines Campaign (1944–45). #영문위키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함께 일본 제국에게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린 전역(戰域). 필리핀 탈환전은 수많은 전투들이 얽혀 있기에 필리핀 탈환전투가 아닌, 필리핀 탈환전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인천상륙작전과 쌍벽을 이루는 맥아더의 위대한 전역

1 배경

1944년 6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 벌어지고 곧이어 사이판 전투가 벌어져 7월 9일 일본군사이판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미군 측은 이후 침공로를 설정하는데 육군과 해군의 의견충돌(사실상 맥아더-니미츠 사이의 의견충돌)이 벌어져 상당기간 진통기간을 겪었다. 조지 C. 마셜 참모총장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체면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해군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 오키나와로 쳐들어가 볼 것을 권유했는데,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니미츠는 대만 침공을 주장하고 있어, 세 사람 모두 의견이 제각각이라 진통을 겪고 있었다.

곧이어 대선이 다가오기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와 니미츠를 만나 상의를 했고, 결국

  • 1. 이미 상당한 규모로 활동중인 필리핀 게릴라와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음.
  • 2. 필리핀과 같이 거대한 배후를 그대로 두고 다른 곳을 침공시 뒷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큼.
  • 3. 미국의 정치적 대의명분을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탈환점. 필리핀은 인구수가 6천만 명이 넘어가는, 미국의 아시아 식민지 중 가장 핵심적인 곳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하며, 상징적인 곳이 필리핀이다. 대선 등 국내 정세까지 생각하면 이 곳을 되찾지 않고 전쟁을 끝낸다는 건 찝찝한 뒷맛을 남기는 꼴이다.
  • 4. 일본과 동남아 식민지간 항로 차단이 가능. 이는 일본이 동남아 식민지의 자원을 수탈해오던 경로가 봉쇄되는 것을 의미한다.
  • 5. 맥아더의 I Shall Return.[1]

라는 이유로 필리핀 침공이 결정되었다.

2 전투 준비

일본군의 본래 전투 계획은 필리핀 루손 섬엔 육군이 중심으로 전투를 하면서, 레이테 섬을 포함한 다른 지역은 해군 및 항공부대에 의해 전투를 수행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대만해협 항공전에서 대전과를 올렸다고 믿었던 대본영은 필리핀 방어를 담당하는 제 14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대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급히 변경해 육군도 필리핀 동남부 레이테 섬의 방위에 참가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10월 10~20일에 걸쳐 벌어진 대만 항공전의 실상은 처참한 것이었다. 미 제3함대가 1,300여 대함재기를 날려 보내며 대만과 오키나와를 강타하였고, 일본군은 미 함대에 대해 380여 대의 항공기를 내 보냈다.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함종불명 15척을 격침, 격파했다고 요란하게 선전했지만 뻥도 정도껏 쳐야지 이게 말이 되냐, 실제 미 함대의 손실은 구축함 1척 격침, 항공모함 4척 소파, 항공기 89대 손실 뿐이었다(…). 이 댓가로 일본군은 대만과 오키나와의 거의 모든 비행장이 거덜났으며, 3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손실해 버렸다. "라디오도쿄가 격침했다고 보고한 제 3함대의 모든 함정은 지금 바다 밑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진을 향해 퇴각 중"이라는 윌리엄 홀시의 명언도 이 때 나온 것이다. #참조 링크

문제는 필리핀 방위를 담당해야 할 필리핀 제1항공함대 전투기 150대 중 110대를 여기서 상실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필리핀의 일본군은 제공권/제해권 장악은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이를 알고 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루손 섬(수도 마닐라가 위치한 필리핀의 중심 섬)에서 동남쪽으로 800km나 떨어진 레이테 섬으로의 병력 수송은 꿈도 못 꾼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대만해협 항공전의 오보를 굳게 믿고 있던 대본영은 현지 사령관의 진언을 무시하고, 레이테 섬에서 결전할 것을 그냥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역시 희대의 밥버러지 빠가사리들 이에 야마시타가 애써 준비했던 지연전은 이미 물 건너 갔고, 한숨만 푹푹 쉬며 남은 항공력과 해상력을 그러 모아 레이테 섬으로 병력을 실어 날라야 했다. 일본 해군도 역시 대만 근처에서 벌어진 항공전에서 미군이 상당한 항공기를 잃었을 것이라 판단, 남은 전력을 가능한 최대한 동원해 미 해군을 물리치고 레이테에 상륙중인 미 육군에 불벼락을 안겨주기 위해 3면에서 함대를 소집했다.

3 레이테 해전과 레이테 섬 전투(44년 10~12월)

[2]
타클로반이 위치한 섬이 바로 레이테 섬이다.

공격의 첫단추는 10월 달, 레이테 섬을 침공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온다던 일본 해군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인 레이테 해전에서 상륙함대에 근접했으나 상황판단을 잘못해 회군, 결과적으로는 패배하고 이후 영혼까지 탈탈탈탈 털리며, 사실상 대양해군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 재기불능 상태에 빠져버렸다. 레이테 해전 항목 참조.

레이테 섬은 제 14방면군 휘하의 제 35군이 맡고 있었다. 제 35군은 후방의 세부 섬에 사령부를 두고 주력을 민다나오 섬에 배치했었다. 레이테 섬을 수비하던 부대는 약 2만 명으로, 4개 사단과 2개 여단이었다.

10월 20일에 상륙한 미군은 패잔병이 아니라 제 6군(크루거 중장)의 병력 10만 명(최종적으론 20만)의 대규모 부대였다. 이 작전의 지휘관은 <난 반드시 돌아오겠다>라고 필리핀을 떠나야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 제 24사단과 제 1 기병사단이 레이테 섬 동쪽의 타크로방에, 이어서 그 남쪽 약 27km의 드랫에 제 24군단의 제 7사단과 제 96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레이테 섬 남쪽의 파나온 섬 지구에도 제 24사단의 제 21보병연대 전투단이 상륙했다.

[3]
이 유명한 사진도 상륙당일인 20일 오후 3시에 촬영된 것이다.

#레이테 섬의 구글지도를 참조하며 읽으면 이해하기에 매우 좋다.
타클로반에 상륙한 미군은 중부의 브라우엔, 최종적으로는 일본군의 양륙지점인 서쪽의 오르모크 항구를 목표로 동쪽과 남쪽에서 차근차근 밀고 나간다. 일본군도 어느 정도는 저항에 성공해서 상륙 당일 타클로반에서 미 24사단 사령부에 어느 정도의 피해를 주고, 야간에 전차전으로 역습을 시도했으며, 중부 협곡에서 미군을 다소 지연시키기도 하지만, 당연히 전국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 한다.

21일에는 협곡과 브라우엔 비행장을 방어하던 일본군 2개 연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24일과 31일에 걸쳐 일본군은 30사단 41연대와 1사단 병력이 계속되는 공습에도 불구하고 서부 오르모크에 큰 손실없이 증원하는데 성공했지만, 오르모크 동쪽의 리몬 언덕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모조리 분쇄되고 만다. 이후 12월 초순까지 지연전이 펼쳐지는가 싶었지만, 중부의 베이베이를 거쳐 우회한 미군 병력이 중부 협곡을 통과한 주병력과 협격에 성공하며 레이테 섬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일본도 증원작전을 계속하여 12월까지 도합 5만의 병력이 레이테 섬으로 수송되었다. 그러나 앞선 행운은 더 이상 따라 주지 않았다. 미군의 공습과 잠수함전은 주간/야간을 가리지 않았고, 5만의 병력 중 태반이 수송 도중 수장되었으며, 간신히 건져올린 군수품은 20%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의 상륙정과 병력, 물자는 아예 끊기고 말았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일본군의 주특기인 굶어 죽기(…)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일본 육군은 나름 방어준비를 단단히 했음에도 미군에게 5,000여 명의 전사자를 안겨 주는 동안 총병력 83,000명 중 단 1,000명 정도만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은 죽음을 맞았다. 상당수의 병사가 해상 수송 중에 수송선이 격침당하면서 수장당했고, 격침된 수송선에서 살아남아 간신히 해안가로 헤엄쳐 올라온 일본군의 상당수는 분노한 필리핀인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이했다.

곧이어 레이테 아래에 있는 민도르 섬이 순식간에 미군 손에 떨어지며, 본무대인 루손 섬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4 루손 섬 전투 (45년 1~6월)

4.1 링가옌만 상륙전과 전차전

#루손 섬의 구글지도를 참조하며 읽으면 이해하기에 매우 좋다.

일본 현지사령부인 제 14방면군의 작전계획은 루손 섬에 최대한 전력을 집중하여 평원에서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지만, 앞서 설명되었듯 대본영의 삽질로 인해 금쪽같은 전력을 레이테에 꼴아 박아야 했고, 루손 섬의 일본군 전력은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이런 현실을 직면한 제 14방면군의 작전참모 호리 에이조(堀榮三)등의 참모들은 "함포포탄을 피할 수 있는 산악지대에서 지구전"을 펼치자고 진언하였고, 야마시타 대장은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루손의 일본군 전력은

  • 마닐라 북부의 쇼부(尙武) 집단(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 山下奉文)의 15만 2천명,
  • 마닐라 북동지구의 신부(振武) 집단(요코야마 시즈오 중장, 橫山靜雄)의 10만 5천명,
  • 마닐라 북서지구의 켄부(建武) 집단(츠카다 리키치 중장, 塚田理喜智)의 3만명으로

총 28만 7천명의 병력이었다. 쇼부집단에는 전차 제 2사단의 기갑사단이 있었고 신부와 켄부집단에는 해군소속 지원병력과 해군항공대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에 맞서는 미군은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미군 제 6군과 제 8군, 영국, 호주연합군, 연합해공군으로 구성된 175,000명의 병력으로 루손 섬 탈환에 나섰다. 이에 더해 루손 섬에는 많은 필리핀 사람들로 구성된 게릴라 부대가 연합군과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5년 1월 4일, 미군 항공대는 마닐라~링가엔 만 사이 전체를 대상으로 맹렬한 폭격을 실시했다. 6일부터는 미해군 제 7함대에 의한 함포사격이 개시되었고, 3일 간에 걸쳐 일본군의 해안진지는 모조리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9일 아침, 9개 사단 175,000명이 링가엔 만에 상륙을 개시했다. 링가옌 만은 지금의 다구판 시에 위치한 만이다. 신중한 성격의 크루거 중장은 2개 사단은 마닐라 탈환을 위해 남부로, 2개 사단은 북부지역 제압을 위해 북부로 보내고 나머지는 동부로 진군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1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 그리고 전차 약 60대가 반격을 실시했고, 16일 밤에는 야습을 감행해 예상이외의 전과를 내는 등 다소의 성과도 있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고, 27일에는 산 마누엘에서 이 반격부대는 완전히 전멸하고 만다.

마닐라 북부로 북상한 미군 제 1군단은 루바오와 산 호세 등에서 전차 제 2사단의 주력과 상대해 격렬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2월 중순에 이르자 일본군의 전차대는 전멸했지만 그 사이 북부의 일본군은 북부 산악지대로 물자를 수송해 장기전 태세를 구축하는데는 성공했다.

4.2 클라크 비행장의 탈환 (45년 1월)

마닐라 북서쪽 100km 지점, 현재의 앙헬레스 시에 위치한 클라크(Clarke) 지구는 비행장 숫자만 13개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쟁 전 동양 최대 규모의 미군 비행장이었다. 이곳은 당연히 일본군에게도 미군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격렬한 전투가 필연적이었다.

이곳을 담당한 일본군은 켄부(建武) 집단은 총병력이 다양한 병과로 이루어진 짬뽕 3만 남짓의 병력이었지만, 제대로 된 전투부대는 공정부대와 전차사단 기계화보병 등을 합쳐 3,000명 남짓 정도였다. 물론 일본군도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아서 3선 4선에 이르는 조밀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미군은 1월 20일 경부터 클라크 지구로 진입해 25일, 미군 제 14군단(제37, 40사단)에 의한 맹공을 개시했고, 후퇴하며 방어전을 펼치는 켄부 집단군을 일방적으로 분쇄하며 30일, 스탓텐버그 비행장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클라크 비행장 일대의 제압을 선언했다.

미군주력부대는 그대로 동남쪽 100km에 위치한 마닐라를 목표로 남하를 계속했다.

4.3 마닐라 공방전과 남부 지구 전투 (45년 1~3월)

#구글지도 참조
미군은 필리핀수도마닐라 탈환을 핵심으로 판단했다. 링가엔 만에서 남하한 2개 사단 외에, 1월 30일에는 제 11군단이 바탐반도 부근 산 안토니오에 상륙, 31일에는 마닐라 남서쪽 나스구브에도 제11 공수부대가 상륙, 2월 3일에는 제 511 공수연대가 낙하하여, 사방에서 마닐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마닐라를 포함한 남부일대를 담당한 신부(振武)집단이었다.

미군이 마닐라에 진입한 것은 2월 3일이었고, 여기서 일본군과 미군은 약 한 달간의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2]3월 3일에 마닐라는 연합군이 완전히 제압하였다. 이 시가전에서 일본군은 약 12,000명의 사망자를 냈고, 연합군은 전사 1,000명, 부상 약 5,500명에 달했다.

특히 약 10만 이상의 마닐라 시민이 전투 와중에 목숨을 잃는 등 시가지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정신병자 천국이었던 일본군에서 그나마 몇 안 되는 개념인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원래 마닐라는 무방비도시로 개방할 방침이었지만, 해군 측 시가전을 강력히 주장하고 대본영도 마닐라 폐기를 인정하지 않아 발생한 참극이었다. 역시 구제불능의 빠가사리들

바탄반도 및 코레히도르 섬에도 전투가 벌어졌다. 바탄 반도의 일본군 3,500명, 코레히도르 섬 요새의 일본군 4,500명은 1월 말부터 강력한 함포사격과 공습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코레히도르 섬 수비대는 2월 15일에 특공보트 36척을 출격시켰지만 전과는 미군 상륙지원정 3척만 부수는데 그쳤다. 역시 만병통치 카미카제

2월 16일 미군 제 24 보병사단의 일부가 상륙을 개시하고, 제 503 공수연대도 낙하산으로 강하했다. 수비대장이 전사한 일본군은 20일 이후 조직적인 저항력을 상실하게 된다. 바탄반도에서의 전투로 일본군은 전사 4,497명, 이에 반해 미 연합군은 전사 228명에 부상 727명에 불과했다. 한편 코레히도르 섬에는 종전 후에도 일본병사들이 숨어있다가 1946년 1월에 18명이 투항하기도 했다(…).

루손 섬 남부의 신부(振武) 집단은 마닐라 함락 후 동쪽 산악지대에서 남부연안으로 이동해 지구전을 펼쳤다. 이 때 병력은 10만을 약간 넘었지만, 비전투병과가 많아 실제로는 1개 보병 사단의 전력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마닐라 시가전 종료 후인 3월 중순, 총공격을 감행해 미군 제 6사단장에게 중상을 입히고 제 1연대장[3]을 전사시키는 뜻밖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거기까지였고, 미군 3개 사단이 압박하기 시작한 3월 하순이 되자 끝없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6월이 되면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소규모 부대로 분산, 고산지대로 옮겨 장기전을 꾀하였다. 이들은 9월이 되어서야 일본의 항복사실을 알곤 9월 8일에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몇몇 부대는 11월(…)에 항복하기도 했다. 이로써 신부(振武) 집단 전체의 병력 약 10만 5천명 가운데 전사는 60,000명, 말라리아 및 기아로 사망한 자는 15,000명, 행방불명 13,000명, 포로 1,600명의 피해를 냈다.

이로써 미군은 마닐라 항을 연합군의 중요한 병참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필리핀을 탈환하는데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

4.4 루손 섬 북부 전투, 탈환전의 종료 (45년 2~8월)

#구글지도 참조
필리핀 일본군의 주력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쇼부(尙武)집단이었다. 이들은 사령부가 있는 바기오를 중심으로 북부 산악지대에서 방위전선을 펼쳤다. 총병력은 약 15만이었다. 이들은 곡창지대인 카가얀 협곡과 바기오, 두 군데를 핵심적인 방어지점으로 선정했다.

2월 하순, 미군 제 1군단은 산악지대로 들어왔지만, 바기오로 향하는 거점 세 곳을 완강하게 방어하는 일본군에 의해 돌파가 실패당하자, 서쪽 해안에서 바기오로 이르는 길로 우회공격을 시도했고 4월에는 북서 방면에서 바기오를 협공해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야마시타는 4월 16일이 되자 바지사장 호세 라우렐 대통령 일행을 일본 본토로 탈출시키고 최후의 저항을 펼쳤지만 결국 4월 26일에 바기오는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카가얀 협곡 방면, 바레타 언덕, 사라쿠사쿠 언덕 등 산악지대에서 미군과 일본군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되풀이했으며, 미군은 5월 중순~하순에 걸쳐 이곳들을 모두 접수하며 북진하였다. 그 동안 미군 제 25사단은 전사 685명에 부상 2,090명, 제 32사단은 전사 825명에 부상 2,160명의 피해를 당했으며, 특히 6,000명의 열대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는 큰 비전투손실을 입기도 했다.

물론 미군이 이 정도 손실을 입는 동안 일본군의 손실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건 당연지사(…). 5월 하순에 전차 제 2사단의 보유 중화기는 전차 12량과 화포 7문이 전부였다. 총 병력은 이미 처음의 20%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루손 섬 북서쪽의 아발리에 6월 23일에 연합군이 낙하산 공수작전을 펼쳤고, 남북에서 협공을 받게 된 쇼부(尙武) 집단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은 대부분이 정글지대인 루손 섬 북부에서 식량보급이 완전히 끊겨 아사자/병사자가 속출했다. 지휘체계가 와해된 탓에 조직적인 작전은 꿈도 못 꾸고 소부대로 분산되어 정글 속에서 생존왕 자급자족(…)하는 게 전부였다. 이 와중에도 항복이 엄격히 금지된 탓에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은 그대로 죽거나 자결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일본군 병사들은 점령기간 동안 극도의 원한을 품은 현지게릴라나 원주민들에게 습격당해 끔살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어떻게든 식량을 구해야 했던 일본군 소부대가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여 털어 먹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미 현대전과는 거리가 먼 상황(…). 일본군 병사들 중에는 대만까지만 건너가면 살 수 있다고 믿어 뗏목을 만들거나 헤엄쳐 가는 병사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물론 모조리 태평양에서 사라져 버린 건 당연지사.

그러는 동안 태평양전쟁은 끝났다(…). 장병들과 동고동락하며 버티던 야마시타 대장은 종전 4일 후인 8월 19일에 정전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분산되었던 각 부대로 연락이 되지 않아 반 년 가까이 지나서야 모든 군이 항복할 수 있었다.

5 남부 필리핀 전역

레이테 섬 전투 이후 미군은 두갈래로 나눠져 제6군[4]이 루손섬을 포함한 북부 필리핀 지역을, 제8군은[5]필리핀 중서부의 섬, 남부의 섬(대표적으로 민다나오섬)들에서 전투를 치렀다. 잘 아시는 분은 계속 추가바람..

6 결과

필리핀 탈환전 전체를 통틀어,

  • 미군 및 연합군은 육군기준(+육군항공대 포함) 13,973명의 전사자와 48,541명의 부상자, 총 62,514명의 병력손실. + 해군 3470명 전사(레이테만 해전 전사자 3800명 제외. 해군 전사자에는 레이테만 해전 이후 태풍으로인한(...) 전사자 778명이 포함되어 있음 이게 바로 진짜 카미카제다!) 합계 총 전사자 17,443명
  • 일본군은 육군기준(+육군항공대 포함) 336,352명이 전사, 12,573명이 포로, 총 348,925명의 병력손실. + 해군 육전대 및 해군 병력 108,000여명 전사(레이테만 해전에서 발생한 전사자 12,000명은 제외함). 합계 총 전사자 444,352명(ㅎㄷㄷㄷ)
#출처 : 영문위키

전사자 비율로 치면 거의 1:40에 근접하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다(…). 기본적으로 방어자가 공격자보다 유리한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 그만큼 일본군이 얼마나 지독한 삽질을 거듭했는지를 말해 줄 뿐이다.

여담으로, 일본군은 이 기간 동안 순식간에 엄청난 점령지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각 섬에 잔존해 있던 일본군 부대들은 미처 사령부의 연락을 전달받지 못하고 그대로 해당 지역의 잔존병력으로 남아서 빨치산화돼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6] 일본 패전 후에 이들은 대부분 투항명령을 받고 항복했지만, 그 중 일부는 투항을 거부하고 계속 싸우다 죽거나, 심지어는 수십년동안 혼자 싸워온 케이스도 존재한다. 오노다 히로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예.

  1. 완전히 농담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사실로 봐야 한다. 맥아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2. 유투브에서 관련 영상을 보면 마닐라 시가지의 일본군 거점 곳곳에 미군 포병들이 155mm포 m114를 끌고와서 영거리사격으로 조져버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3. 미군 제6보병사단은 1944년 7월, 미군의 서부 뉴기니(현재 인도네시아령 뉴기니) 전역의 후반부인 포켈곱 반도의 침공(샌서포르)에서 처음 투입되었고 이후 루손 섬의 전투에 참여했다. 뜻밖에도 사단에는 미군 제1보병연대(1783년 창설)가 편제되어있었다.. 미6사단과 미1보병연대는 전후 한국으로 진주해 미 군정에도 종사했다.
  4. 미국 육군이 태평양에 전개시킨 야전군은 3개 군으로 제6, 8, 10군이 있다. 이 중 6,8군은 맥아더 장군의 휘하에, 10군은 니미츠제독의 휘하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첫 데뷔를 했다. 니미츠 제독의 구역의 경우 육군과 해병대 부대가 혼성편제된 수륙양용군단으로 흔히 지상전을 치렀고 전쟁 후반기 오키나와 침공에 동원된 대규모 합동지상군을 통제할 사령부로 제10군을 선정했다.
  5. 현재 주한미군을 구성하는 그 8군이 맞다./지휘관: 로버트 아이켈버거 중장 - 미군의 초기반격이 있었던 1942년 후반(파푸아 전역)부터 활약했던 장성이다. 전쟁기간동안 파푸아, 서부뉴기니, 남부 필리핀에서 군단(제1군단), 야전군(제8군의 초대 사령관 재직기간 1944-1948)을 지휘했다. 후임 사령관이 바로 월튼 워커 중장..
  6. 현대에도 필리핀 지역에는 수많은 섬이 존재하고, 지금까지도 개발이 제대로 안 돼서 반쯤 밀림지역으로 남아 있는 오지 중에 오지인 곳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