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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쓰마 국
일본의 옛 지명 | |||||||
호쿠리쿠도 北陸道 | 토산도 東山道 | 토카이도 東海道 | 키나이 畿內 | 산요도 山陽道 | 산인도 山陰道 | 난카이도 南海道 | 사이카이도 西海道 |
에치젠국 越前国 | 무츠국 陸奥国 이와키국(磐城国), 이와시로국(岩代国), 리쿠젠국(陸前国), 리쿠추국(陸中国), 리쿠오국(陸奧国) | 히타치국 常陸国 | 야마시로국 山城国 | 하리마국 播磨国 | 탄바국 丹波国 | 키이국 紀伊国 | 치쿠젠국 筑前国 |
에치고국 越後国 | 데와국 出羽国 우젠국(羽前国), 우고국(羽後国) | 카즈사국 上総国 | 야마토국 大和国 | 미마사카국 美作国 | 탄고국 丹後国 | 아와지국 淡路国 | 치쿠고국 筑後国 |
엣추국 越中国 | 코즈케국 上野国 | 시모사국 下総国 | 카와치국 河内国 | 비젠국 備前国 | 타지마국 但馬国 | 아와국 阿波国 | 부젠국 豊前国 |
사도국 佐渡国 | 시모츠케국 下野国 | 아와국 安房国 | 이즈미국 和泉国 | 빗추국 備中国 | 이나바국 因幡国 | 사누키국 讃岐国 | 분고국 豊後国 |
노토국 能登国 | 시나노국 信濃国 | 무사시국 武蔵国 | 셋츠국 摂津国 | 빙고국 備後国 | 호키국 伯耆国 | 이요국 伊予国 | 히젠국 肥前国 |
카가국 加賀国 | 히다국 飛騨国 | 사가미국 相模国 | 아키국 安芸国 | 이즈모국 出雲国 | 토사국 土佐国 | 히고국 肥後国 | |
와카사국 若狭国 | 미노국 美濃国 | 카이국 甲斐国 | 스오국 周防国 | 이와미국 石見国 | 휴우가국 日向国 | ||
오미국 近江国 | 스루가국 駿河国 | 나가토국 長門国 | 오키국 隱岐国 | 사쓰마국 薩摩国 | |||
토토미국 遠江国 | 오스미국 大隅国 | ||||||
미카와국 三河国 | 이키국 壱岐国 | ||||||
오와리국 尾張国 | 쓰시마국 対馬国 | ||||||
이세국 伊勢国 | |||||||
이가국 伊賀国 | |||||||
시마국 志摩国 | |||||||
이즈국 伊豆国 |
薩摩[1]国(살마국). 오늘날 가고시마 현 서부 일대로 삿슈(薩州)라고도 불리웠으며, 5기 7도 구분에 의하면 사이카이도(西海道, 서해도)[2]에 속한다.
2 사쓰마 번
사쓰마 번(薩摩藩)은 에도 시대 큐슈 남부의 사쓰마 국, 오스미 국, 휴가 국을 지배하던 번이다.
사쓰마(혹은 사츠마)는 통칭으로, 판적봉환 이후 가고시마 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90만 석(류큐 포함)의 수확량으로, 시마즈 가문이 영주로 지역을 다스렸다.
2.1 역사
가마쿠라 막부 초기, 시마즈 가문이 사쓰마(薩摩), 오스미(大隅), 휴가(日向) 3국에 슈고 다이묘로 임명되어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 에 의해 도요토미 가문에에 복속되어 영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가문은 서군에 동참하지만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하나인, 이이 나오마사의 중재를 통하여 시마즈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가 도자마 다이묘로서 인정 받았다. 이 시점이 본격적으로 사츠마의 성립이라고 본다.
1609년, 류큐에 출병하여 류큐 왕국을 복속하고 류큐의 수확량 12만석을 추가로 징발하게 되었다. 이때, 아마미 군도는 류큐와 분리되어 사쓰마가 직접 통치하였다. 이 출병은 막부의 지령을 받지않은, 사쓰마 독단의 결정이었다. 류큐의 점령으로 인하여 류큐를 대중 무역의 창구로 이용하였다. 또한 아마미 군도산 설탕이 사쓰마로 유입되어, 향후 일본 전국으로 산포되었다.
사쓰마는 토양 자체가 시라스 대지(규슈 남쪽 반도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화산재와 속돌의 층)로, 물이 잘빠지고 토질이 좋지 않아 벼농사가 적합치 않았다. 하여, 소규모의 밭농사와 대외 무역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도요토미 정권, 후에 이어지는 에도 막부에서는 쇄국 정책을 폈던지라, 사실상 암암리에 밀무역을 행하며 먹고 살았다.
밀무역과 반도쿠가와 등 이런저런 이유로, 에도 막부로부터 역사적으로 찍혔던 지역이었다. 각종 공사에 사쓰마 번은 동원되기 일쑤여서, 그 피로감과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은 8대 당주 시마즈 시게히데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세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약간 해소되었다. 또한 정치적 영향력도 상승되었다.
1827년, 가로(家老)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를 중심으로 개혁이 단행되어 채권 정리, 설탕특허 제도강화, 류큐 무역의 확대(덤으로 밀무역, 위조화폐 제조) 등을 내세워 재정이 신장되었다. 오유라 소동을 거치고 1851년에 제11대 번주가 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고, 서양식 공장 시설을 설립하고 증기선 군함을 구입하는 등 군비 확충을 추진하였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병사한 후, 이복동생인 시마즈 히사미쓰가 실권을 잡아 공무합체파로 활동하나, 나마무기 사건으로 사쓰에이 전쟁을 겪고, 양이를 접고 영국과 우호관계를 갖는다.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는 요코하마항 폐쇄를 두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공무합체 운동은 좌절을 겪는다.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토막파 하급 무사들에게 권력을 잡는다. 에도 막부의 초슈 정벌 명령에 따르자니 번의 재정이 망할 것을 염려해, 이때까지 견원지간이었던 초슈 번과 동맹을 맺어(삿쵸 동맹)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대정봉환)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식 해군을 육성할 때 이 사쓰마 지역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위의 조슈번과의 라이벌 의식과 맞물려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의 역사 및 사회 등은 가고시마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2.2 트리비아
- 예로부터 일본 중앙 지역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고 밀무역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라, 반골 기질과 상무 기질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심심치 않게 중앙정부에게 개긴 적이 많다. 고대에는 아예 일본 야마토 조정이랑 달른 별개의 이민족 거주지대로 구마소, 하야토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츠마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사츠마하야토(薩摩隼人)라 부르며 여전히 본토에의 대항심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지역감정에 가깝다. 본토인들은 큐슈인들을 남만(南蠻)이라 불렀다. 이 단어는 가고시마 사람들을 사쓰마하야토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다분한 지역차별적 뉘앙스가 깔려 있는 단어이다.
고대의 지역드립 - 일찍이 임진왜란 때 비록 출병한 병력 수는 적었다 해도 조선을 침공하여 많은 도공들을 끌고 간 시마즈 가문이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고, 메이지 유신지사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배출된 지역이다.
- 현재 해당 지역은 여느 큐슈 지방과 마찬가지로 보수색이 강하며 자민당이 강세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