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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온보현(溫保鉉) |
출생 | 1957년, 전라북도 김제시 |
본관 | 봉성 온씨 |
사망 | 1995년 11월 2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1] |
학력 | 중학교 중퇴[2] |
가족 | 6남매 중 차남 |
1 어떤 사람이었나?
가정폭력의 폐해를 증명하는 예.
"내 나이만큼 사람들을 죽이겠다."
대한민국의 강력범죄자,택시연쇄살인마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에서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완전히 졸업하지 못한채, 아버지를 따라 당시 빈민가였던 서울 수유리로 올라왔다고 한다. 어릴때 온순하고 착했던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예쁨을 많이 받았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을 하다 택시 회사에 들어갔다. 퇴직을 한 그는 채소 사업을 하였는데, 사업이 잘되지 않아 결국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평소에도 그는 가족, 친구, 친척들과 연락을 끊은채 고립된 삶을 살았기에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항상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목격한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란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품은채 자랐다. 그의 분노는 81년 그가 24살이 되던 해 더욱 비대해졌는데,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원인이었다.[3]
온보현은 사건 당시 나이 만 37세였고,[4] 거주지는 서울시 도봉구 수유1동이었다.
2 사건 일지
- 1994년 8월 13일경
- 그는 약 20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그의 숙부 집에서 4일 동안 얹혀 살며, 이웃으로부터 삽과 낫을 빌려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구덩이를 팠다. 그의 고향이 곧 그의 본관이어 조상들의 묘소가 뒷산에 있었는데, 숙부는 그가 벌초를 한다고 생각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 1994년 8월 5일~15일
- 그는 곧 구체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살인 수첩까지 장만하였다. 구체적인 살인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중, 그는 그가 전에 했던 택시기사 일을 연상하고는, 차고에 세워져 있던 강북수유리의 국제운수 1바 1287 스텔라 차량을 절도하였고, 곧이어 미사리 쪽에서 대진운수 1바 1237로 번호판을 위조하였다.
- 1994년 8월 28일경
- 그는 강동구 암사동 사거리에서 한명의 여성을 태웠다. 그는 흉기로 여성을 겁박해서 학생증을 뺏은 후, 그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차문을 여는 순간 피해자는 살려달라고 크게 외치며 영동고속도로 이천 부근에서 도망쳤다. 그는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를 뒤쫒지 않은채 그대로 도주하였다.
- 1994년 9월1일
- 이후 그는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곤지암주차장에서 에스페로 택시와 택시회사와 번호판을 바꾸고 다음날 새벽에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다음날 새벽 1시~3시경 그는 43세 권모씨를 차에 태워 구리안산고속도로 입구에서 성폭행을 한차례 한 후, 그의 고향 쪽인 김제 영천마을 야산으로 피해자를 끌고 가서 앞서 파놓았던 구덩이 옆에서 한 차례 더 성폭행을 하였다. 그 후 그는 피해자의 입과 팔 그리고 다리를 포박한 뒤 구덩이 안으로 밀어넣었다. 피해자는 그가 숲 근처에서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 도주하여 인근에 위치하였던 공사장의 인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한편 잠에서 깨고 난 뒤 피해자가 도주한 사실을 깨달은 온보현은 그날 아침까지 숨어있었는데, 경찰이 그가 운전하던 택시를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본 뒤, 그날로 대전으로 택시를 타고서 도주하였다. 이후 경찰은 지난 오년간 수유리 근처에서 일했던 모든 택시기사들의 이력서들을 수집한 뒤, 피해자와 대조심문을 통하여 범인을 확정짓고 범인의 신상을 파악하였다.
- 1994년 9월 11일
- 온보현은 저녁 8시 30분경에 서울 독산동 부근에서 21세 학생 엄모씨를 태웠다. 그는 올림픽대로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한 야산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두번에 걸쳐서 한 뒤, 피해자를 나무에 포박하였다. 그는 피해자를 죽이지 않은채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뒤, 2차 범행을 하러 야산을 내려갔다. 이틈을 탄 피해자는 포박을 풀고 도주하였다.
- 1994년 9월 12일(1차 살인)
- 그는 저녁 8시 30분경에 양재동 부근에서 26세 회사원 허모씨를 태웠다. 그는 서초톨게이트 부근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전날 피해자를 포박해 놓았던 강원도 횡성의 야산으로 끌고 갔으나, 포박당한채 남겨졌던 피해자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되자 그는 분노에 가득차 피해자 허모씨를 구타하고 강간한 뒤, 피해자를 나무에 묶고 피해자의 얼굴, 무릎, 다리 등을 삽으로 가격하고는 도주하였다. 상처가 심했던 피해자 허모씨는 사망하였다. 한편 범행현장에서 벗어난 온씨는 풍납동 신한은행지점에서 피해자 허씨의 외환은행카드을 이용하여 61만원을 인출 하여 사용하였다.
- 1994년 9월 13일
- 그 후 그는 강동구 천호동 사거리 부근에서 19세 회사원 노모씨를 태웠다.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그는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김천에 위치한 여관으로 끌고가 강제로 범하였다. 피해자는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차분했기에 그는 피해자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온씨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홀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피해자의 말에 묘한 감정을 느껴 14일 새벽에 피해자를 고덕동에 위치한 피해자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 1994년 9월 14일(2차 살인)
- 온씨는 가락동에서 24세의 아동복지학과 교사 박모씨를 태운 뒤, 올림픽아파트 앞 사거리 부근에서 칼로 피해자를 위협했으나, 피해자가 심하게 반항한 나머지 흉기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이에 극도로 흥분한 온씨는 피해자의 허벅지와 배 등을 수차례 찔러 살해한 뒤, 경북 금능군에 위치한 도로변에 시신을 유기하였다. 이후 상처를 치료하고 은신하기 위해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C여관 3층의 구석진 방에서 13일 동안 은신하였다. 손을 베인 온씨는 범행을 중단하였는데, 부상과 더불어 이전까지 겪을 수 없었던 피해자의 심한 반항으로 인하여 본디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온보현은 범행를 저지르고자하는 의욕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범죄 프로파일러 표창원씨는 마지막 희생자였던 박모씨의 거룩한 희생이 추가적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고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여전히 온씨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한채 였다.
- 1994년 9월 20일
- 지존파가 검거되었다. 이와 함께 온보현과 관련된 강력범죄 사건 공개수사가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공개수배와 더불어 그가 택시 기사이자 범행에 택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어 불심검문 탐문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 1994년 9월 27일
- 그는 당시 지존파를 검거하여 유명해졌던 서울 서초경찰서 입구에서 의경에게 "자수하러 왔다" 고 말하며 자수하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밝히기를, "지존파와 나를 비교해보고 싶다. 지존파와 같은 감방에 넣어달라" 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자수를 했으니, 선처가 될 리 없었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것과 같이 온보현은 지존파 못지않게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던 것은 물론 다음해 11월에 신속하게 집행된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 1994년 10월31일
- 서울지검 강력부 박충근 검사는 온씨가 훔친 택시를 이용하여 부녀자 여섯명을 납치하고, 이 가운데 두명을 살해한 혐의를 들어 그를 구속 및 기소한 지 열여덟일 만에 사형을 구형하였다.
- 1994년 11월 14일
-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재판장 김주형 부장판사)는 피고인 온보현(37)에게 강도살인 및 시체유기죄 등을 적용하였고, 앞서 구형된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 1995년 2월 24일
-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 1995년 11월 2일
- 그는 지존파 등 19명과 함께 사형되었다. <범죄의 재구성>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같은 흉악범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력범죄자들에게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줄 것이며, 형을 신속하게 집행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3 경찰은 무능했다?
어째 경찰이 많이 무능해보인다는 평가가 있지만, 사건이 일어난 94년 당시에는 고도로 발전한 정보화 수사 시스템이 없었을 뿐더러, CCTV나 도로교통정보 수집 장치도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목격자나 증언이 접수되지 않는 이상 잠적해버린 범인의 동선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아무리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경찰이라도 직접적인 물증이 없으면 범죄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는 매우 어렵다. 만일 당시에도 도로교통정보 수집장치가 오늘날처럼 활발하게 설치되고 운용되었다면, 자동차 번호판과 차종식별을 통해 범인의 동선을 파악하고 곧바로 수사망 압축을 해나갔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범죄자 검거율이 높아진 것은 CCTV와 교통정보 수집장치 그리고 네트워크 정보교류가 정립된 뒤의 일이었다.
사담 후세인 정권처럼 대국민 2중 3중 감시 시스템[5]이나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이상, 당장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4 이후
8년 뒤에 유사 사건인 용인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불행히도 이 때 살해당한 사람은 6명.- ↑ 검거 당시 수유동에서 살았었다.
- ↑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상경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관계로 중퇴.
- ↑ 다만, 2008년에 방영된 tvN의 범죄 재연 다큐드라마 범죄의 재구성 온보현 편에 출연한 범죄심리학자는 온보현의 불안정한 성장과정을 들어 그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온보현이 도덕이나 법률을 무시하는 성향(즉 상대방에 대해 분노, 공격성을 표출하는)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성장 과정만을 들어 그의 근본은 선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 ↑ 2016년 현재 살아있었다면 60세로, 장년층에 속한다.
- ↑ 악명 자자한 이 대국민 감시+프락치 시스템도 사담에 대한 수 차례의 암살 시도를 막지는 못했다. 사담의 장남인 우다이는 행사 중에 바그다드까지 잠입한 다와당원의 폭탄 테러로 다리를 못 쓰게 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