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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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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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jon Family

지존파 사건이 잘 요약된 동영상.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들(살인집단) 중 하나

원래 이름은 지존파가 아니라 야망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마스칸.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을 검거한 고병천 수사과장이 지어준 이름이다.[1]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훈련을 할 때 이마에 지존이라고 쓰인 두건을 두르고 훈련을 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고반장이 조직원들과 합의 하에 지었다.

일반적으로 연쇄 살인자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례가 많으며 두 명 이상이 개입된다고 해도 서로 부부나 연인, 혈연인 경우가 많은 것과 비해[2] 약간의 인연만 있던 타인들이 오직 살인을 위해서, 그것도 6명이라는 대규모 집단을 조직한 것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3] 이들이 준 충격은 가히 엄청났으며 천하의 공영방송 앵커들조차 이들의 범죄를 전하면서 말을 더듬으며 차마 전할 수 없다는 표현을 반복할 정도였다. 범죄 내용도 내용이지만 하필 사건이 공개된 시기가 추석연휴여서 그 충격은 더 컸다. 지금이야 그보다 더한 흉악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세상 어디서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유형의 범죄였기에 당시엔 임팩트가 상당히 강했다.솔직히 오늘날 보아도 발상 자체가 상당히 엽기적인 범죄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사람들에게 최악의 범죄/살인사건을 꼽으라면 종종 꼽히고 있다.

자신들의 범행동기를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돌렸는데, 개인이 아닌 사회를 대상으로 한 보복성 살인이라는 것에 사회 전반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후에 아류인 막가파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행동강령도 있었다.

*돈이 많은 자를 증오한다.
  • 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 배신자는 죽인다.
  •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4]

2 결성

결성 계기는 대학입시부정사건에 분노하여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허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지존파는 두 번 결성되었다.그 끔찍한 범죄집단이 두 번씩이나...

1992년 말, 김기환은 고소득자들의 돈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범죄조직을 조직할 계획을 세울 결심을 하고, 탄광 일을 할 때 알게 된 조 모 씨에게 살인을 제외한 범죄 계획을 알려주며 설득에 나섰다. 평소 조 모 씨의 경제적 여건과 성정을 알고 있던 김기환은 설득에 성공했고, 조 모 씨의 친구, 도박을 하며 알게 된 사람 세 명을 포섭해 조직을 결성했다. 그러나 그 범죄 계획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이 이를 꺼려 결국 해체되었다.[5]

1차 조직 결성 실패 후 1993년 초, 갈 곳이 없어진 김기환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탈퇴한 전 멤버 이주현 씨의 소개로 '가희산장'이라는 비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김기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더 못배우고 부자에 대한 증오심이 훨씬 강한 자들을 포섭하려 했고, 실패 요인을 없애기 위해 대화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더 철저하고 견고한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 해 3월, 고향 후배인 강동은, 문상록, 송봉은과 접촉해 그들에게 범죄 계획의 일부를 조금씩 흘려가며 차분히 설득에 나섰다. 자기 의지로 가담할 수 있게 1개월이라는 유예기간도 줬다. 강동은이 적극적으로 찬성을 외치자 문상록, 송봉은도 동의하여 세 사람은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김기환 외 세 명은 전주로 이동해 함께 생활하며 조직 결성과 범죄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강동은이 교도소 동기였던 백병옥을 떠올렸고 당시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백을 합류시켰으며 문상록은 같은 곳에서 일했던 강문섭을 강동은에게 소개해 포섭했다. 이주현 씨는 같은 해 6월, 평소 "은행강도가 되고 싶다."던 김현양을 김기환에게 소개해 조직에 합류토록 했다.

이렇게 조직은 김기환을 중심으로 강동은,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은으로 조직되었다.[6]

이미 한 번의 실패경험이 있었기에 김기환은 조직의 유지에 굉장히 신경썼는데, 평소 "배신한 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잘 때 내 가슴을 열어놓고 잘테니 나가고 싶다면 내 가슴에 칼을 꽂고 가라. 다만 그러지 못하면 지옥까지 쫓아가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등 조직의 기강을 흔드는 자에게 용서란 없으며 조직에 합류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했다.

후에 김기환의 수감 후 부두목이 된 강동은이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애인이자 영광의 J주점 종업원 이경숙을 합류시켰다.[7] 하지만 이경숙이 가담한지 이틀만에 전원 검거되어, 그녀는 살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3 조직원 목록

3.1 김기환

지존파 두목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범행 당시 나이 26세.

3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 해 당시 겨우 아홉살이던 누나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파출부 일을 시작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어릴 적엔 자신은 학교에서 밥을 먹고 왔다며 형제들에게 음식을 양보할 정도로 정이 많았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반장을 해본 경험도 있었으며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사항엔 '지도력이 강하고 급우를 잘 통솔하며 간섭이 좀 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범생이었지만 가난으로 인한 상처를 심하게 받았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살 돈이 없어서 안 가져 갔더니 선생님이 ‘그러면 친구들 것을 뺏어서라도 가져왔어야지!’라고 혼냈다. 그래서 친구들의 준비물을 훔치기 시작했고, 그러면 선생님은 날 혼내지 않았다. 난 선생님이 가르친대로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라며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운동능력과 글짓기 실력도 우수했다. 다만 생활기록부 상에 준법 정신이 낮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형마저 병에 걸리자 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으로 내려간 후 가장 먼저 취직한 곳은 한 신발공장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은 어머니께 보냈고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도 했다. 그 후 몇 년 간 대한석탄공사에서 잡부 일을 하거나 공사판 등을 전전하며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나름 성실히 일했지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검정고시 준비도 그만두고 후엔 직장도 그만둔 뒤 고향집으로 돌아와 잠시 가족들과 지냈다. 그 와중에 도박에 빠져 도박으로 인한 빚도 지게 되었다. 포커를 잘 해서 ‘지존’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 지존이란 별명은 조직 결성 후 부하 조직원들에 의해 ‘두목’을 대신하는 칭호로 쓰이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돈이 필요했던 김기환은 ‘가진 자들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부자들의 돈을 갈취하여 살해하는 조직 결성’이라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고, 조직 결성을 위해 각종 범죄 관련 서적은 물론이고 처세, 대화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첫 조직 결성은 실패하고 고향 후배 강동은 등을 끌어들여 현재 잘 알려진 멤버들로 지존파를 결성하여 두목이 된다.

조직 결성 후 담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조직원들에게 지리산에서 일주일 간 물 한 병과 칼 한 자루로 버티도록 훈련을 시키고 조직원들과 막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가 기거하던 집을 살인 아지트로 개조한다. 평소엔 동네 형처럼 조직원을 대했지만 강압적인 리더십으로 조직원들을 복종케 했으며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첫번째 피해자인 최미자 씨와[8] 송봉은 살해를 주도한다. 실제로 조직원들은 송봉은 살해 당시 두목인 김기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잔혹하게 살인 행위를 했다고 한다.

아지트 완공을 얼마 앞두고 실전에 돌입하기 전인 1994년 6월 17일 김현양의 생일날, 조직원들과 술을 마신 후 밤에 불현듯 자리를 비워 선배의 집에서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갔다가 자고 있던 선배의 중학교 1학년 조카를 강간해 체포된다. 이 때 김기환은 범행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는데, 전문가들은 김기환이 직접적인 범행으로부터 손을 떼고 중죄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강간치상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김기환은 수감된 후에도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임명해 부하 조직원들에게 범행을 지시했다. 수감되어 있는 중에도 그의 말은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법이었다.

후에 지존파 전원이 검거되어 서울구치소로 이전된 뒤 1995년에 사형이 확정된다. 사형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야!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여? 이건 세상 법이 X같은 것이여!"라는 말을 남겼다.

3.2 강동은

지존파 부두목

검거 당시 나이 21세, 고등학교를 중퇴 했고 특수절도, 폭력전과 2범이다. 전라남도 영광군출신으로 김기환의 국민학교, 중학교 후배 였다.선배를 잘 만나야 된다 다른 조직원들과는 달리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고 형제가 많아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학창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어 급우들을 자주 폭행했고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생활기록부 상에는 '매사에 무관심한 성향', '바른 생활이 요구됨'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동창인 문상록과 함께 이웃집의 벼 두 가마니를 훔쳤다가 절도 전과를 갖게 된다. 밴드부에 가입해 음악에 취미를 붙여보려고도 했으나 선배들의 가혹행위가 심해 그만두었다. 그 후 방황하다가 결국 문상록과 가출해 상경한 후 막노동을 시작했다. 전과삭제를 위해 4년 간 열심히 일해 모은 돈 1500만원을 변호사에게 주었다가 돈만 날렸을 뿐 여의치 않자 그 때부터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고,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질 않자 귀향해 도박에 빠졌다가 김기환을 만나 조직에 합류하게 된다. 김기환에게 충성을 보이며 문상록, 백병옥, 강문섭 등을 소개시키는 등 초반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두목인 김기환이 강간치상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부두목으로 임명되어 수감 중인 김기환을 수 차례 면회해 범행 지시를 받았다. 학창시절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짙었고 조직의 부두목이 되기도 하는 등 겉보기엔 범행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비춰지지만 사실 소심해 거의 김기환으로부터 범행을 지시받아 나머지 조직원들이 실행하도록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범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첫 피해자였던 최미자 씨 살해 후엔 죄책감에 시달려 다리 부상을 핑계로 잠시 혼자 지내기도 했고[9] 소윤오 씨 부부 살해 당시에도 지시만 하고 가담하지 않았다.

지존파가 체포되기 며칠 전 잡일과 요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단 명목으로 자신의 여자친구 이경숙이 일하던 주점에 진 빚을 대신 갚아주고 이경숙을 지존파의 일원으로 들인다.[10] 그렇게 이경숙이 조직에 합류한지 이틀 째 되던 날 아침에 찬거리를 사러 아지트를 나섰다가 잠복하고 있던 경찰과 추격전을 벌인 후 조직원들 중 제일 먼저 체포되었다.

3.3 김현양

지존파 행동대장

검거 당시 나이 22세, 중학교 2학년을 중퇴 했고 상해전과 1범이다.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김기환과 조직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인물이다. 상해 1범이라는 전과도 조직 가담 후에 생긴 전과다.[11]

검거 당시 입대를 앞두고 있던 남동생과 미성년자던 여동생이 있었으며 12세에 중국집을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사망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당 일을 시작했다. 외모가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자식들을 방치하고 식당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낯선 남자들이나 아버지의 친구들을 비롯한 여러 남성과 은밀한 만남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아 하교 후 귀가하는 것을 꺼려할 정도로 심리적인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생활기록부의 행동발달사항에는 '무기력하며 학업에 관심이 없음', '주의가 산만하고 자기가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현양의 학창시절 담임선생님들은 모두 입을 모아 김현양에 대해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학창시절엔 심리적인 방황에도 폭력적인 성향이 보이지 않았고 큰 문제도 없어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망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한다. 이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 증오심은 커져갔고 이는 일종의 여성혐오로 변모하게 되었다.[12]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다툰 후 가출하여 광주로 올라갔는데 첫날부터 걸인들에게 잘못 걸려 앵벌이를 하게 된다. 껌팔이, 절도 등을 하며 도주할 기회만 엿보다 도주에 성공해 서울로 상경한 뒤 신문팔이부터 시작해서 지역을 옮겨다니며 정착하지 못한 채 제화점 직공, 술집 웨이터 등을 전전한다. 그러던 중 전기기술을 배워 취직해 몆 년 간 모은 돈으로 트럭을 구입해 굴비 장사를 시작했으나 실패한다. 장사를 접고 운수회사에 취직했지만 취직한지 얼마 안 되어 이주현 씨[13]로부터 김기환을 소개받고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조직에 합류한 뒤 그간 내재돼있던 높은 폭력성을 보이며 두목인 김기환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고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행동대장답게 모든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체포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태연히 웃어보이며 당당하다 못해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어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오히려 두목인 김기환보다 언론에 훨씬 많이 노출되었을 뿐더러 마치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다는 발악적인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지존파 조직원들 중 얼굴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외모 때문에 유명해진 것도 있다.

지존파 조직원 중 유일하게 인육을 먹었다고 발언해 모두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14] 인육을 먹은 이유는 "인간이길 포기하려고."라고 밝혀 모두를 공포에 떨게했다.

그러나 끔찍한 범행을 자행하면서도 양수리 부근에서 이종원씨와 함께 납치된 이 모씨를 유일하게 살려주며 탈출의 기회를 만들어준다. 다만 일부러 탈출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인지, 단순히 이 씨를 너무 믿어서 방심한 것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체포된 후 진술이나[15] 구치소에 수감된 후 김현양에게 면회를 와 '날 일부러 살려준 거냐' 고 묻던 이 씨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르면 일부러 기회를 준 것이라는 뉘앙스는 아니었으나 신고한 이 씨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3.4 문상록

검거 당시 나이 23세,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특수절도 등 전과 3범이다.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고등학교 재학 중 가계를 책임지고 있던 친형과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강동은과 함께 가출해 막노동판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생활기록부에 "학습에 흥미가 없고 우발적 행위가 우려되며 자기 억제를 못함."이라는 지적이 있다. 평소 충동 조절 장애로 의심되는 행동을 보였다.

1991년 입대했지만 같은 해 12월에 의가사 제대를 한 후술집 웨이터같은 잡일을 하다가 강동은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특수절도로 감옥에 있을 때 김기환과 인연을 맺었으며 출소후 조직에 가담해 첫 피해자였던 최미자씨 살해를 제외하곤 모든 범행에 참여 했다.[16] 조직내에선 조직의 부두목이었던 강동은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김기환 다음으로 연장자였지만 서열은 강동은, 김현양 아래였기 때문에 범죄 행위시 그다지 주도적인 역할은 맡지 못했으나 김현양이나 김기환 못지 않은 잔인한 성향의 소유자로, 범행시 살인 행위 자체나 피해자들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기환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였고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 모 씨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못하고 굉장히 못마땅해 했다.촉은 쓸 데 없이 좋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던 조직행동강령을 어기며 이 씨를 살려주려 한 김현양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고 주먹다툼까지 벌였다.

3.5 강문섭

검거 당시 나이 20세,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이다. 맨 나중에 합류한 막내 조직원이고 유일하게 전과가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고모 밑에서 자랐다. 양쪽 얼굴에 큰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이 때문인지 학창시절 늘 우울하고 무기력했으며 주의가 산만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장기 결석으로 제적 당한 후,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술집 웨이터 일 등을 하다가 알게 된 문상록의 소개로 강동은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거금을 쥐어주겠다.'던 김기환의 말에 현혹되어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검거 후 범행 동기가 '자신의 얼굴에 난 화상흉터를 없애기 위한 성형수술 자금 마련' 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조직 내에선 백병옥과 함께 서열 최하위로 범행에 있어서 주도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주로 뒷처리를 담당했다.

3.6 백병옥

검거 당시 나이 20세, 특수강도 등 2범.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이다. 다른 지존파 조직원과는 달리 부모 양쪽이 온전하게 있었으며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도 아니나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가 품팔이를 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지존파에 가입해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라고 밝혔다.[17]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초등학교 재학 중 장기 결석으로 이미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장기 결석으로 제적 당해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절도 전과마저 생겼다.

특수강도로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 동기였던 강동은과 친분을 맺어 출소 후 강동은과 공사장에서 일한다.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중, 김기환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던 강동은으로부터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조직 가입을 권유 받아 조직의 일원이 된다. 조직 내에서 맡은 역할은 범죄 대상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막내였기 때문에 서열은 최하위였지만 선배들 못지 않은 잔악함을 보였고 두목인 김기환에게 절대복종했다.

3.7 송봉은

본명은 '송봉우'. 이름이 송봉은으로 알려진 이유는 생전에 형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도용했기 때문이다. 사망 당시 나이 18세,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조직에 합류한다. 1993년 7월 초순 밤, 강동은, 백병옥 등과 함께 범행 모의를 하다가 홀로 걸어가던 최미자양을 발견하고 성욕을 참지 못해 인근의 다리 밑으로 끌고 가 강간한 뒤 함께 있던 강동은, 백병옥도 최 양을 강간하게 된다. 그 후 최 양의 처분을 두고 강동은 등과 함께 고민하다가 강동은이 김기환에게 상황을 보고 하면서 김기환, 김현양 등의 합류 후 살해지시를 받아 살해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의 몹쓸 욕망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꿈에 귀신이 나온다며 한동안 괴로워 하다가 1993년 8월, 조직의 자금통장에서 300만원을 빼내 도주하던 중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용서해주겠다며 "단합대회를 하고 개나 잡아먹으러 가자."고 회유하는 조직원들에게 속아 인근 야산으로 유인당해 그 곳에 대기하고 있던 김기환이 태도를 바꾸며 추궁하자 용서를 빌다가 김현양이 벽돌로 머리를 가격해 기절한 뒤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곡괭이 등으로 폭행당해 사망, 불에 태워진 뒤 암매장 당한다.

3.8 이경숙

검거 당시 나이 23세, 강동은의 애인이자 절도 전과 1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다방을 운영하던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났고 모 여중 2학년을 중퇴, 가출했다. 1992년까지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광으로 내려와 어느 작은 주점에서 접대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주점을 찾았던 강동은과 인연을 맺어 연인이 되었다. 강동은이 엄청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함구했으며, 인질이었던 이 모 씨가 탈출하자 강동은이 잡일과 요리를 해줄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주점 사장에게 진 빚 1600만원을 대신 갚아주어 풀려난 뒤 여성 조직원으로 합류하게 된다.[18] 그러나 합류한지 이틀만에 검거되었고 직접적으로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검거 당시 강동은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4 아지트 건설

대전직할시 둔산신도시 건설공사 막노동(노가다)으로 돈을 모은 다음 한적한 농촌에 농장을 구입하여 아지트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어머니를 모신다" 고 하였다. 나중에 기자들이 이 집은 무슨 돈으로 지었는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지었다는데 사실인가? 등을 묻자 피식 웃으면서 "아냐 이거 할라고 지었지" 라고 대답했다. 이어 기자가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내 손으로 못 죽여 한이다." 라고 위의 사진에 남은 말을 하여 그야말로 국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지하실에는 경찰서 유치장을 본뜬 철창이 달린 감옥화장을 하기 위한 아궁이도 만들어놓았다.

5 범죄 행각

1993년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며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1993년 7월 충청남도 논산시 두계역(現 계룡시 계룡역) 부근에서 23세 여성 최미자 씨를 납치하여 성폭행 후, 연습삼아(!) 살해하여 암매장하였다. 첫 범죄부터 결성 이유와 어긋났다. 한달 후인 1993년 8월엔 전 조직원이었던 송봉은을 살해 후 시체를 불태워서 암매장하였다. 이유는 18세에 불과한 송봉은이 자신의 나이를 23세로 속여서 형님 대접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조직원들이 모아놓은 돈을 인출하여 달아나려는 것이 적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살해방법도 잔인했는데 보신탕이나 먹자고 송봉은을 산으로 불러낸 다음에 다른 조직원과 얘기하고 있던 송봉은을 김현양이 돌을 가져와 후려쳐 죽이고 1미터나 되는 구덩이를 파서 묻고 근처에 불을 질러 냄새까지 지웠다.[19] 그 뒤에 그들은 1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두목 김기환이 학교 선배의 집에서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가서 선배의 조카를 강간하다가 들켜 강간치사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당황한 조직원들은 우왕좌왕 하다,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삼은뒤 모든지시를 면회중 김기환에게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1994년 9월 8일 36세의 악사 이종원(36세) 씨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다시 살인을 시작했고 9월 15일까지 연쇄 살인을 벌이고 1994년 9월 21일 체포되었을 때까지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들은 범행 대상을 물색하기 위하여 당시 백화점 신용판매부 직원이었던 김민경 씨로부터 백화점 고액 거래자 명단을 구입하였는데 물론 지존파가 살인극에 쓸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넘겨주지는 않았겠지만 개인 정보 유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이기도 하다[20]. 그에 따라 주로 백화점에서 벤츠그랜저 등 고급차를 타고 나오는 복부인 등을 대상으로 하여 범행을 하려고 했으며 피해자들의 현금만 빼앗고[21] 협박이나 어떠한 협상 없이 그 자리에서 토막 살인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계획했다.

어처구니 없는 점은 지존자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들은 전 조직원인 송봉은 씨를 제외하고는 상류층이나 재벌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였다. 사실 이전에 연습삼아 살해했던 최미자 씨도 그냥 평범한 여성이였고, 이들이 9월 8일에 살해한 이종원 씨도 부유층과는 거리가 먼 밤무대 악사였으며 이 밤무대 악사는 차를타고 이 모 씨(26세)와 이동중에 지존파에게 포착되어 이 모 씨와 함께 납치되었다.[22] 살해 이유는 단지 타고 가던 차가 고급차인 그랜저라서 돈이 많은 사람이거나 상류층으로 착각한 것이 범행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그랜저 승용차는 무리해서 중고로 구입한 중고차 였으며 몸값을 받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 모 씨는 조직 내에서 살려두자는 의견과 죽여야한다는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결국 살려주고 살인에 가담 시키기로 하였으며[23] 밤무대 악사 이종원씨는 검은비닐로 질식사 시키고 이 과정에서 이 모씨에게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놈들 성격상 몸값을 내도 죽였을 것이다. 지존파들은 시신을 희생자 이종원씨의 차에 태워 차를 절벽에서 밀어서 떨어뜨려 완벽하게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위장했다. 위장을 위해 사전 답사는 물론 스키드마크까지 남기는 치밀함을 보였다.

불과 4일 후인 추석 전날 9월 12일에 벌초를 하다 경기도 성남시 남서울묘지에서 납치되어 살해당한 삼정기계(주) 사장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는 돈이 많은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졸부나 방탕한 상류층이 아니라 공고를 나와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빚 내어 새로 공장 인수한 건실한 사업가였다.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 또한 범행 대상이 된 이유는 타고 나왔던 차가 고급차인 그랜저라는 이유 때문이였다. 지존파가 납치해서 살려둔 이 모 씨를 차에 태우고 남서울묘지를 다니다 주차 되어있던 그랜저 차량을 발견한후 본인들의 차에서 내려 그랜저 차량을 보고 경남 넘버이며 3000cc라 돈이 많은 사람이 타는 차인것 같다고 한후 해당 차량의 주인을 찾았는데 위에서 벌초를 하던 소윤오,박미자 씨 부부였다. 납치 당한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에게는 1억원을 주면 살려서 돌려 보내주겠다고 말을 하여 총무부장 심성수 에게 광산버스터미널 앞에서 돈을 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돈을 다 받았는데도 1억을 달라고 하는데 8000만원을 준 이유로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에게 술을 먹인뒤 소 사장은 공기총으로 부인은 칼과 도끼로 살해 하였다. 회사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시기에 납치, 살해당해서 회사 직원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납치당했을 당시에도 지존파가 돈이 궁해서 저지른 범죄로 생각하고 자신도 어려운 시절을 보내서 이해한다면서 무사히 보내주면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어린 자녀들도 있는 상태에서 참변을 당했다. 지존파는 사장 부부에게서 자그마치 8천만 원을 강탈했다.

이들은 최후에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죽이고 총기를 탈취하여 MBC를 습격할 계획을 꾸몄으나 그 전에 검거되어 다행히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현양은 인터뷰에서 "더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 못 죽여서 한이 맺힌다. 내가 MBC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못 가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6 체포

양수리 부근에서 세 번째 희생자 이종원씨와 드라이브를 하다 함께 납치된 카페 여종업원 이모씨(당시 27세)의 극적인 탈출로 인해 지존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씨는 납치되었을 당시 지존파의 아지트에 감금된 후 살려달라 애원해도 살려주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현양이 이씨에게 연정을 품게 되어 이씨를 죽이려는 조직원들을 설득시키면서 이씨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24] 목숨은 부지하게 됐으나 입막음용으로 살인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은 이씨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지인이었던 이종원씨, 중소기업 사장 소윤오, 박미자 씨를 죽이는 데에 동참하여 두 건의 살인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두 차례의 범행 가담으로 문상록을 제외한 지존파 조직원들에게 얼추 신임을 얻었으나 그녀를 끝까지 믿지 못했던 문상록이 김현양과 심하게 갈등을 빚으며 언제든 지존파에게 희생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이씨의 탈출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다뤄 손과 발에 부상을 입었던 김현양이 실밥을 풀고 상처부위에 소독을 받는 날, 이씨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김현양에게 병원에 동행하게 해달라고 한다. 김현양은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고 이씨는 그와 동행하게 된다.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김현양은 현금 50만원이 든 지갑과 휴대폰을 이씨에게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간다. 이씨는 예상보다 빨리 탈출의 기회가 주어지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은 건 마찬가지인데 이왕 죽을 바에야 달아나서 이 사건을 알리는 데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피해자분들에게 속죄하겠다는 심정으로 병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는다. 지존파의 행동반경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해남경찰서로 가달라고 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하차하고 포도밭 인근의 농가에 숨어든다.[25] 비닐하우스 안 평상 밑에 몇 시간을 숨어있던 이씨는 집주인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집주인의 지인의 차를 얻어 타 대전까지 이동한다. 그 뒤 대전 톨게이트에서 택시를 잡아 서울의 한 모텔에 도착한 뒤 자신이 일하던 카페에 연락을 해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씨는 서초서에 카페 주인의 남동생과 동행하여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나 경찰들은 관할이 아니라며 사건 담당을 거부한다. 분노와 공포가 극에 달한 이씨를 보던 카페 주인의 남동생은 평소 카페를 즐겨찾던 고병천 반장(당시 서초서 강력반장)에게 연락한다.

강력반장이었던 고 반장조차 이 씨의 진술이 충격적이어서 처음엔 믿지 못하였으나[26] 이 씨가 소윤오 부부 실종, 납치사건에 대해 아는 듯한 말을 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 씨가 지니고 있던 휴대폰이 이 씨가 진술한 지존파의 일원 강동은의 것으로 확인되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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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작전은 수월하였다. 먼저 강동은이 포터 트럭을 타고 마을로 가다가 경찰의 미행을 눈치채고 경찰과 1.5km 추격전 끝에 검거 되었고, 김현양과 이경숙, 문상록이 강동은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유인책에 쉽게 끌려 도주하려다가 추격 끝에 검거 된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아지트에 있다가 아지트를 급습한 경찰들에 의해 모두 검거 된다. 이 씨의 탈출 후 하루라도 빨리 아지트를 떴으면 검거되지 못했거나 검거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테지만 지존파 일당이 이씨가 탈출했음에도 아지트에 남아있던 이유는 이씨의 탈출 성공 후 영광파출소 앞에 잠복해 경찰들의 동태를 살폈으나 평소와 같아 이씨가 신고하지 않은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멍청한 놈들 멀리 서울까지 달아나 신고한 이씨의 기지가 발휘된 부분이다. 또 이씨가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쉽사리 신고하지 못할 거라 믿은 것도 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거창하게 강령까지 내세워 놓곤 결국 이걸 안 지켜서 붙잡힌 꼴이다. 안그래도 검거 후 체포경위를 들은 김기환이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했는데, 바보같은 놈들.이라며 질타했다고 한다.이 와중에 김현양이 배신자라고 살해당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현재도 큰 차이 없지만 당시에는 중범법자는 검거 즉시 신상 공개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으므로 범인 체포 후 얼굴이 그대로 나왔고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것들. 압구정동 야타족들! 모조리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라는 식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또 강령에 '고급 중대형차들' 을 지정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이상의 중대형차 판매량이 일시 감소했으며 고급차들의 중고매물이 갑자기 늘었다. 언론플레이와 광적인 취재 열기가 잘못 퍼진 좋은 예.[27]

이들은 중국에 가서 훈련하려고 했었고 야인이나 뺑끼통과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았다고 자랑했다.[28]

살해한 사람들의 시체는 지하의 사설 화장장에서 태웠고 일부는 태우면서 인육으로 맛봤으며[29] 주변에 냄새가 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다른 주민들에겐 '돼지고기를 같이 구우면서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왜 식인을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길 포기하기 위해서 라는 등 반성의 기미라곤 눈 씻고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없었으며, 살인의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 모순이라며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가치 전도 현상을 정당화하려 했다. 김현양은 체포되어 끌려갈 때 "2천만 원 이상[30]자동차를 가진 놈들은 다 죽여야 해! 그래야 내 원한이 풀려!" 라고 소리를 쳤다고 주민들은 증언했으며 이들은 현장 검증에선 "잘난 놈들을 죽이려 했다" 고 거듭 말했다.

7 처벌

이들은 이경숙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조직원 6명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11월 2일 두목 김기환을 포함해 조직원 6명 모두 신속하게 사형에 처해졌다.

보통 기존 대통령 임기 중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형집행 결정도 최소 2년은 기다려 주는 게 관례임을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원래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은 그가 무고할 가능성도 감안하고 또한 마음을 정리하고 뒤늦게나마 교화될 기회를 주기 위해 정권이 바뀐 뒤에. 즉 수년 뒤에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사건은 온보현[31]이 저지른 강도 살인 행각과 더불어 워낙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준 '예외적인 경우' 이며 무고할 가능성도 전혀 없기 때문에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김영삼 정부 시절 저질러진 살인 중에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이 두 사건밖에 없고, 그 유명한 박한상이나 악질 유괴살인범들 조차도 사형 자체는 받았을지언정 집행을 피해갔을 정도니 얼마나 사회적 충격이 컸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제보자였던 여성은 강요당해 저지른 범죄라는 점을 고려하여 제외되었다. 검찰 측에서는 결정적 제보자인 여인이 처했던 상황을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으로 인정하여 기소조차 하지 않고 지방으로 피신시켜 집과 직업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일종의 신고자 및 증인 보호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한동안 영광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영광 사람이라는 것을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고 하며 영광 사람들이 객지에 나가면 살인자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코지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8 기타

8.1 여죄의 가능성

경찰들은 피해자가 최소 두 명에서 세 명 정도는 더 있을 것이란 이 씨의 진술을 토대로 최미자씨, 송봉은 살해 후 본격적인 범행에 들어가기 전의 공백기동안 추가범행은 없었는지 수사했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압수한 증거물 중 지존파가 이동할 때 평소 몰고 다니던 르망 뒷좌석에서 유골가루가 담긴 비닐봉지가 뒤늦게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또 다른 피해자의 것은 아닌지 추가 조사에 들어갔다. 일당은 그 유골이 김기환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조사 결과 마을 주민인 강 모 씨가 김기환의 부탁으로 김기환의 부친의 묘소에서 김의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유골을 직접 수습해 김기환에게 건네준 것이 확인되었으나 강 씨는 차에서 발견된 유골이 자신이 준 유골인지는 알 수 없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지존파의 아지트가 있던 금계리 마을 일대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으나 특별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

또, 1994년 4월 5일 강릉에서 일어난 신원미상의 38세 여성 토막살인 사건과 8월 28일 대관령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위장 타살사건의 범행수법이 유사하다고 보아 경찰이 추가 조사를 한 바가 있다. 이 모 씨가 납치되었을 당시 김현양이 이 씨에게 자신들이 31세의 여성을 납치해 죽인 적이 있었다고 했지만 수사 결과 밝혀진 것은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살인 이후 밝혀진 범인들의 알리바이나 수사에 협조적이었던 그들의 태도, 이 씨나 소윤오 씨 부부와 같은 억류된 피해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공범이 더 있다고 허풍을 떨었던 김현양의 태도를 종합했을 때,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으로 결론난 것이다. 그러나 수사가 일주일만에 종결되어 이에 너무 급하게 수사를 종결시킨 것이 아니냐는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8.2 여담

본 항목은 각종 기사와 서적,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 그리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고병천 전 강력반 반장의 논문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이 모 씨와 이경숙은 대면한 적은 없으나 통화한 적이 있다. 이 씨가 탈출하기 며칠 전 강동은이 이 씨에게 "여성 조직원을 들이려 하는데 어떠냐"고 물으며 이경숙과 통화하도록 했다.이미 강령따윈 잊어버린지 오래다. 뭐 애초에 결성 목적도 망각한 놈들이다. 이경숙은 이 씨에게 "충고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동은씨를 도와주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달라. 신이 있다면 동은씨를 도와줄 것이다."(...)라고 부탁했으나 이 씨는 황당해하며 자신이 지금 납치되어 있는 상태라고 태도를 분명히 했다.
  • 지존파는 자신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단가(團歌)도 있었다. 나중에 김기환은 '야망'이란 이름의 책까지 쓸 계획이었다고 한다.(...)
  • 평소 문상록뿐만 아니라 강동은도 부두목으로서 김현양에게 이 모 씨를 죽이라고 압박했다. 두목인 김기환이 출소했을 경우 부두목으로서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이 씨가 사라져야만 이경숙을 데려올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강동은은 김현양이 이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갈 당시 김현양에게 이 씨를 '처리하고 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한편 이 씨의 처분을 놓고 김현양과 심하게 대립했던 문상록은 김현양과 주먹다툼을 한 후로 김현양 앞에서 이 씨를 죽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피해자 이종원씨의 승용차는 그렌저 2.4(2400cc)였으나 평소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역할을 맡았던 백병옥이 3000cc 차로 오인해 범행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소윤오씨 부부 납치 당시에도 소 씨의 그렌저가 "3000cc인 것 같은데 돈 좀 있을 것 같다"고 했던 걸 보면 당시 이들은 그렌저 3.0 이상의 차를 소유한 이들을 주 범행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 씨의 차도 겉만 3000cc로 개조한 차였다. 이러나 저러나 그렌저 3.0 이상의 고급차를 탔다고 범행 대상으로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매우 단순하단 걸 보여준다. 이들에게 무고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들만 안타깝다.
  • 이 씨가 탈출한 후 조직원들이 영광경찰서 앞에 잠복할 때 김현양이 아지트에 남아 다이너마이트를 쌓아놓고 책임을 지겠다며 자결하려 했지만 강동은이 이를 만류했다. 최종적으로 이 씨가 영광경찰서에 신고한 정황이 포착되지 않자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들은 검거 전 날 회식을 했다고 한다. 김현양은 검거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날 처음으로 노래방에 가봤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해장용 콩나물국을 끓이려고 강동은이 콩나물을 사러 나섰다가 붙잡혔다.
  • 아지트를 급습했을 당시 방 한 구석에 돈 다발이 그대로 있었는데 김기환이 출소하면 그대로 주려고 필요한 만큼만 쓰고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조직원은 돈을 쫙 깔아놓고 그 위에 드러누워 '한풀이'를 했다.
  • 지존파가 현장 검증을 하던 때 형사들을 끌어안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 동반자살할 생각도 했으나 그러지 못한 이유가 조사 과정에서 형사들이 자신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인간적인 대우였다면서. 재판 과정에서도 검사나 변호사들이 자신들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인간적으로 대해줘서 법조계 인사들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고 말하며 감사하다고 했다.
  • 지존파의 증거품 공개 및 압수 당시 맨 앞 줄에 있던 취재기자 중 여성 기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기자를 붙잡아 인질극을 벌일 생각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 지존파의 아지트에서 현장검증을 할 때 일부 여기자들은 혼절하기도 했다. 참혹한 광경에 베테랑 형사들조차 공포감을 느꼈으며 지하 감금시설에서 나는 악취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곤혹스러워 했다.
  • 지존파 검거 직후 과열된 취재열기로 조사 중에 몰상식한 기자들이 경찰서 유리창을 깨고 들이닥쳐 조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도저히 조사를 진행할 여건이 되지 않자 형사들은 지존파 일당들과 유치장 안에서 같이 생활하며 조사를 진행했다.
  • 취재열기가 과열되어 범죄자들에게 미디어가 따라붙으면 대개 범죄자들은 흥분하는데, 지존파도 미디어 앞에선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이며 전혀 뉘우침이 없는 언동으로 세간의 분노를 샀으나 형사들 앞에선 유순해졌다고 한다. 죄질로 보나, 태도로 보나 악질 중의 악질들이라 강하게 나가려고 했던 형사들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 조사 중에 형사들이 잡탕밥을 시켜줬는데 7000원짜리 잡탕밥이 자신들이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비싼 음식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먹어 본 제일 비싼 음식은 6000원짜리 뷔페였다고.
  • 강동은은 재판 내내 이경숙은 잘못이 없다며 감쌌다.
  •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 김현양이 이 모 씨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고 이 씨가 답장을 하면서 둘은 사형 집행 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 지존파 검거 후 지존파 조직원이나 공범을 사칭한 범죄가 몇 건 일어났다. 1994년 10월, 대구에서는 한 약사가 자신의 약국에 납품을 하는 김 모씨 집에 김현양의 이름으로 '지존파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이천만원을 준비하지 않으면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내용의 협박편지를 보내 구속되었다. 이 약사는 약국 이외에도 사업을 벌리다가 돈이 부족해지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또, 1997년 7월, 육군 모 부대 상근예비역 병장과 그의 지인이었던 정육점 종업원이 지존파와 막가파의 선배를 자처해 부유층 부녀자를 납치해 금품을 갈취했다가 긴급체포되기도 했다.
  • 지존파 조직원들의 IQ는 대부분이 90점대였고 유일하게 김기환만이 100 이상이었다. 90~110 정도가 평균수치기 때문에 특별히 지능이 낮다고 볼 순 없으나 이들의 지능 수준이 결코 높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토리 키재기지만 일각에선 그들 중 지능이 제일 높은 김기환이 상대적으로 지능 수준이 낮은 부하 조직원들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존파의 교도소 동기들이나 교도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르던 녀석들이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로 의외로 어리숙하고 순진해서 놀랐다는 얘기가 많다.
  • 김현양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존경할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탈주행각을 벌이며 권총으로 자살했던 지강헌”이라며[32] “그렇게 죽고싶어 권총을 구입하려 했다.”고 답했다. 그 외에도 수사과정에서 프로살인마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진술하는 등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보였다.
  • 김기환이 여중생 강간치상죄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 재소자들에게 구타를 당할 때마다 “형님, 나중에 저희 아지트로 한 번 놀러오십시오.”라고 하곤 했다.소름
  • 지존파 일당이 이 모 씨에게 “여자 때문에 배신한 조직원을 죽인 적이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송봉은 이외에 살해 당한 조직원이 있다고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아 김기환이 현 조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초창기 멤버 중 한 명이 배신해서 죽인 적이 있다고 허풍을 떨었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이를 그대로 믿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이전 조직 결성에 실패한 이유도 여자 때문이 아니라 잔혹한 범죄계획에 모두 겁을 먹고 발을 뺀 것이기에 ‘여자 때문에 배신한 자’에 대한 얘기가 거짓말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아니면 조직원들이 단순히 이 씨를 겁박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송봉은이 사귀던 여자 때문에 조직 자금을 인출해 도주했다는 설도 있지만 진실을 알 길이 없다. 아무튼 그것이 김기환의 선견지명이었는지 김현양은 결국 여자 때문에 조직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머지 조직원들은 그를 응징하지 않았다.서열빨?
  • 강동은은 검거 후 한 인터뷰에서 술집 접대부였던 애인 이경숙을 술집에서 빼내온 후, 범죄로 인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가능한한 이경숙과 비슷한 처지의 접대부들을 풀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일부 철없는 여학생들은 지존파 사건 보도가 나간 후 당시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모 배우를 닮은, 멀쩡한 외모를 가진 김현양에게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교도소에 수감된 후 그의 앞으로 팬레터가(...) 날아들었다는 카더라가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팬레터라고 하긴 뭐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어린 여학생, 김현양 또래의 남성들이 김현양에게 위로를 건네고 회개를 독려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김현양에게 편지와 함께 일기장을 보내 일기를 써서 보내달라고 요구했던 한 여인과 여학생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 두 사람은 김현양을 이용해 베스트셀러를 노렸던 한 출판사의 직원들이었다. 그들이 보낸 일기장과 편지는 구치소 교무과에서 '교화상 불허'라는 이유로 불허가되어 영치되었다가 사형 집행 후 지존파 일당들의 유품 정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 김현양, 강동은, 백병옥, 강문섭은 개신교, 김기환, 문상록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김기환은 종교에 대한 거부 반응이 아주 강해 맨 나중에 종교를 받아들였다.
  • 일명 ‘지존파 전도 특공대’를 조직해 지존파 일당에게 전도했던 한 대형교회가 아지트가 세워졌던 땅을 매입해 아지트를 허물고 교회를 세우려고 했으나 현재까지 공터로 방치되어 있다. 영광군은 몇 년 전 아지트 주변의 땅을 매입해 공원을 조성했다.
  • 지존파 조직원들은 아지트를 '아방궁'이라 칭했으며 철근 등 기본적인 자재들을 제외한 아지트 건축용 자재들 중 모자란 것은 자신들이 일하던 건설현장에서 조금씩 훔쳐왔다. 그러면서도 자재를 사느라 진 빚 천 만원을 갚기도 했다. 물론 그 천 만원 역시 소 사장 부부의 몸값 8천만원 중 일부였다.빚은 아주 성실히 갚네
  • 김현양은 검거 직후부터 각종 인터뷰에서 사죄의 의미로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사회의 냉대를 되갚아 줘서 후련하다는 등 여전히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내비치고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태도를 보여 그 의중을 의심한 대중들은 장기기증의 숭고한 의미를 알고나 떠드는 것이냐며 질타했다. 첫 공판 당시엔 이미 극형을 각오했는지 진지하게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이 모 씨의 생일을 기해 사형 선고 전이라도 신장 한 쪽을 산 채로라도 기증하고 싶단 뜻을 밝혔다.[33] 하지만 산 채로 장기기증을 하는 것은 규정에 위반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장기기증서에 서명한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사후 안구와 신장 등을 기증을 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김현양에 이어 다른 조직원들도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고 기증서를 제출했다. 김기환은 끝까지 버티다가 사형을 앞두고 역시 장기기증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의 장기이기 때문에 인수를 거부당한 것인지, 절차상 문제가 발생했던 것인지, 뚜렷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반면 지존파와 같은 날 사형이 집행되었던 사형수들 중 일부는 장기기증이 이루어졌다.[34]

8.3 미디어

영화 추격자 초반부의 모티브 사건이 되었고 영화 무법자에 나오는 범죄 조직도 지존파를 일정 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과 장경철의 친구의 범죄방식과 거주지 등의 설정은 지존파가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었다면 - 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하철에서 파는 성인지에서 지존파가 잡히지 않고 근교에 놀러온 재벌 회장과 애인을 먹은 다음 서울로 직행하는 대체 역사 소설이 연재된 바 있다.

영국 드라마 화이트채플에서도 식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조사하는 에피소드에서 참고 사건으로 언급되었다.

2012년 제9회 광주 비엔날레 출품작인 정윤석의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존파 사건을 통해 자본과 권력, 그리고 사형제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담고 있다.

2015년 9월 11일 한겨레에서 유일한 생존자-위에 나온 제보자 여인-의 증언록을 연재했다. 피해자의 정신적 외상과 이를 치유해가는 과정, 그리고 사회적 관심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일인칭으로 연재되었으며, 담담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피꺼솟을 체험할 수 있다. 읽을 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하자. 강력 범죄 피해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특이한 사례이다. 1화 2화 3화 4화 5화 6화
  1. 그런데 당시 언론은 이들이 홍콩 영화를 보고 지은 것으로 보도했고 홍콩 영화를 좋아하던 청소년들이 덩달아 욕을 먹었다. 여기에 표창원도 낚여서 자신의 저서인 '한국의 연쇄살인'에 무협영화같은 대중매체의 안좋은 영향의 예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2. 물론 친구 사이에 살인 조직을 결성한 경우도 있다. 존 더피와 데이비드 멀케이가 대표적.
  3. 당시 CNN에서 취재를 오기도 했다.
  4. 그러나 결국 이걸 어겨 검거된다.
  5.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김기환의 보복이 두려워 외지로 피신하기도 했다.
  6. 그러나 송봉은은 몇 달 후 배신자로 낙인 찍혀 동료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7. 납치되었다가 도망친 이 모 씨와 혼동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모 씨와는 전혀 다른 여성이다.
  8. 조직원들에게 사람은 이렇게 죽이는 거다. 라고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9. 강동은의 집은 아지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10. 웃긴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기환이 정한 규칙 중 '여자를 만나지 않으며 친구와 술을 멀리한다'는 규칙도 있었다. 강동은은 아예 처음부터 이를 어긴 셈이다.
  11. 조직 자금을 벌기 위해 전 조직원이 대전의 한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던 시기에 강문섭을 다른 직원이 폭행했다는 이유로 전치 4주에 해당하는 폭행을 가했고 합의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 가족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12. 체포 직후 "어머니요? 내 손으로 직접 못 죽인 게 한입니다."라고 말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발언에 정작 김현양의 어머니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13. 김현양의 중학교 동문이자 지존파 초창기 멤버였으나 범죄 계획에 거부반응을 일으켜 탈퇴한 멤버 중 한 명이다.
  14. 소윤오 사장의 부인인 박미자씨를 살해하고 피해자의 시신에서 한 쪽 유방을 도려내어 먹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이 모 씨의 1994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현양이 인육을 먹은 경험은 '지존(김기환)이 시켜' 송봉은의 인육을 울면서 먹은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다만 김현양은 체포 후 이것에 대한 진술은 전혀 하지 않았다.허풍인가
  15. 동료들에게 "내가 처리하고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
  16. 당시 합숙소에서 자느라 참여하지 못했다.
  17. 마지막 공판에 지존파의 부모 중 유일하게 백병옥의 부모만이 참석했는데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여관에 묵을 돈이 없어 대합실에서 잤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가난을 물려준 자신들을 탓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본인은 효도하기 위해 범죄를 했다지만 도리어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18. 이 1600만원은 지존파가 희생자 소윤오, 박미자 부부로부터 뜯어낸 8000만원 중 일부였다.뜯어낼 거 뜯어내고 목숨까지 앗아가놓고는 자기 여자친구는 소중한가 보다.
  19. 훗날 현장검증을 할 때 김현양은 송봉은은 내가 특별히 귀여워 하던 놈이지만 배신자는 죽일 수밖에 없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 전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20.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 그렇게 큰 이슈는 되지 못했는데, 개인정보 유출 문제가 크게 부각된 것은 인터넷으로 인한 개인정보가 손쉽고 무분별하게 복제가 가능한 세상이 온 이후다. 이 때는 개인정보 복제라고 해 봤자 종이에 쓴 명단을 복사기로 복사하는 정도였다.
  21. 당시에는 카드보다 현금을 많이 들고 다녔다.
  22. 이 모 씨는 피해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지존파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기존에 이 모 씨와 이종원씨가 연인사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씨는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인터뷰에서 이종원씨는 절친한 직장 동료였다고 밝혔다.
  23. 정확히는 김현양만이 살려주려 했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조직행동강령에 위배된다며 반대했으나 김현양이 여자도 함께 죽이면 수상해 보일 수 있으니 일단 살려둬서 차라리 공범으로 만들자고 설득한다.
  24. 김현양이 이씨에게 가진 감정이 연정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여성을 향한 혐오로 번졌던 김현양이 자신이 납치한 여성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 결과적으로 붙잡히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25. 그 이유는 택시기사가 생각 없이 한 농담에 이씨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씨가 “납치됐다가 도망쳤다”고 했더니 택시기사가 “아니, 우리 영광에 그런 놈들이 어디 있어?”라며 “후배들 내가 다 아는 놈들인데 어떤 놈들이 그랬지? 백수(영광군 백수읍)놈들이 그랬나?”고 했다고 한다.
  26. 처음에는 '정신이상자가 말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애시당초 이런 사건은 심영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 단독범행이나, 김경훈 & 허재필에서 보듯이 많아야 두세 명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씨로부터 내용을 들었던 카페주인은 경찰이 아니라 안기부에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7. 1990년대의 한국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갓 벗어난 뒤 언론이고 사회고 외부 가치관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 등지에서 문제가 되던 과열 취재경쟁과 시청자들이 생각은 고려하지도 않는 자극적인 언론 보도도 받아들였는데, 그 첫번째 타겟이 바로 지존파가 된 것이다. 게다가 지존파는 그때까지 흔하던 가족살인범이나 연쇄살인범 혹은 친구 단위의 살인집단 등이 아니라 별다른 안면이 없던 제3자들의 연합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28. 그래서 그 책들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이걸 자랑하는 사람이 뺑끼통의 저자 이진수 씨. 이 사람은 나중에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의 이름도 뺑끼통으로 지었고 희대의 불쏘시개. '거짓말 선생님' 이라는 책도 내었다.
  29. 김현양은 인육을 혼자 먹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당시 조직원들 간 경쟁심리가 팽배해 과시를 위해 일부러 경쟁적으로 잔혹한 행위를 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범죄심리 전문가들도 김현양이 자기과시용으로 일부러 이와같은 엽기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와중에 그 부위가 유방이란 것에서 김현양의 여성 또는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엿볼 수 있다.
  30. 2010년대 물가로 약 4,000만 원 정도에 해당한다. 현대 그랜저, 기아 K7, 쉐보레 임팔라같은 준대형차BMW 3시리즈, 아우디 A4 등 프리미엄 브랜드의 준중형차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31. 사실 온보현의 경우에는 스스로 화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 실상 비슷한 시기 저질러진, 사회에 충격을 준 살인 행위가 한두 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보현만 사형을 당한 것은 지존파와 자신을 비교해 달라는 등 스스로 화를 자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온보현과 비슷한 사건 자체에 대한 사형선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나 많았고, 현재도 이들 중 상당수가 사형수 신분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32. 정확히는 지강헌은 자살로 숨진 건 아니고 자살기도를 했지만 경찰이 쏜 총에 맞아 과다출혈로 죽었다.
  33. 김현양이 그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으나 이 발언은 곧바로 가십거리가 되어 그녀가 이 씨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방청했던 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었다.기레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34. 지존파와 같은 날 사형이 집행되었던 박성규, 이두견, 최명복은 안구와 콩팥을, 신민철은 시신을 각각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