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안아골타

금의 역대 황제
금 건국1대 태조 완안아골타2대 태종 완안오걸매
묘호태조(太祖)
시호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연호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9월)
여진어왕기얀(Wanggiyan)
중국어완안(完顔)
여진어아구다(Aguda)
아골타(阿骨打)
중국어민(旻)
생몰기간1068년 8월 1일 ~ 1123년 9월 19일
재위기간1115년 1월 28일 ~ 1123년 9월 19일

1068~1123(재위: 1115~1123)

금나라의 창업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여진식으로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중국식으로 완안민(完顏旻). 아골타는 여진어 아구다Aguda를 음차한 것으로, 이 때문에 한국 역사서에는 아구다, 아쿠타라고 등장하기도 한다.

완안핵리발(完顔劾里鉢)의 차남으로 형인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1]이 1115년에 죽자 완안부 여진의 수장이 되었다. 요나라의 지배하의 여진족을 모아 큰 세력을 얻은 뒤 요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아골타가 요나라에 반기를 든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반복되는 양태였다. 거란의 국세가 기울고 여진은 이제 유목민족의 새로운 맹주가 되기 위해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요사>에 의하면, 아골타는 대를 잇기 전인 1112년 요나라 황제가 관례에 따라 여진의 존장들을 초청해 베푼 연회 석상에서 정면으로 황제의 명을 거부한 적이 있다. 아골타는 이 연회에서 요나라의 퇴조와 황제의 지도력 부재를 목격한 것이다. 자신이 존장에 오른 후에는 국상을 요나라에 통보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요나라의 문책이 있자 반기를 들었다.

아골타는 1114년 요나라를 공격하여 연전연승했고 1114년부터 납림하(拉林河)와 출하점(出河店)에서 요나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2]. 다급해진 요나라는 고려에 여진족에 대한 협공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완안아골타는 게속해서 요나라군을 영강주에서 격파했고 또 뒤이어 여러 주를 점령했으며, 그 뒤에 카이위안(開原), 눙안(農安) 지방의 숙여진과 랴오둥(遼東)지방의 발해인을 회유[3]하여 15년 황제로 즉위하였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고 연호를 수국(收國)이라 했다. 그렇게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황제가 된 아골타는 여세를 몰아 요동 지역의 황룡부(黃龍府)를 함락시켰다. 요나라는 다시 한번 고려에 원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려 조정은 요나라와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해 원군을 보내자는 출병론자와 김부식 등 다른 나라들의 문제에 끼어들어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나라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일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출병 불가론자 간의 의견이 대립했으나 결국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아골타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금나라가 곧 요나라를 평정할 것임을 알렸다. 이에 고려 조정은 요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있다고 판단, 더이상 요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요나라의 황제인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는 70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대패를 당했다. 완안아골타는 그렇게 대승을 거두며 요나라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그 기세를 몰아서 요동을 공격했다. 그리고 나라의 힘을 집중시키고 분열을 막기 위해서 완안아골타는 금나라 내의 실력자들과 해상의 맹약을 맺었다[4].

한편 송나라는 부상하는 금나라를 활용해 요나라에 빼앗긴 연운16주의 회수를 계획했다. 송휘종은 1116년 고려에서 온 사신 이자량을 특별히 대우한 후 비밀리에 "다음에 올 때는 금나라 사람 몇을 데리고 와 달라"고 청했는데, 송휘종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자량은 "여진족은 인면수심이라 제휴할 것이 못된다"고 했다.

송나라 신료들은 고려가 송나라와 금나라의 통교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금나라와 직접 접촉할 것을 건의했다. 송휘종은 해로를 이용해 금나라 측에 요나라 협공을 제의하면서 다음 조건을 제시했다.

1. 송나라는 요나라에 제공하고 있는 세폐를 금나라에 제공한다.
2. 요나라 협공에 있어 금나라는 만리장성을 넘어 하북에 들어오지 않는다(연운의 반환을 의미).
3. 금나라는 요나라와 화평협약을 맺지 않는다.

아골타도 이에 동의하면서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의 군대는 1121년 요나라를 협공했다.

금나라군은 요나라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1120년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를[5], 1121년 말에는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를 함락했다. 한편 강남에서 일어난 방랍의 난으로 인해 출병하지 못했던 송나라군은 그해에 겨우 북방에 출병하여 요나라의 천조제가 있는 연경을 공격했다. 송나라 군대는 요나라 군대에 연전연패를 당하고, 승리할 수가 없게 되자 지휘관 동관은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해상의 맹약에 의해 금나라는 장성 이남에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송나라의 요청에 의해 출병하여 순식간에 연경을 함락시켰다. 이 결과 맹약대로 연운 16주 가운데 연경 이남의 6주는 송나라에 할양되었지만, 금나라군은 연운 이북을 약탈하고 연운 16주의 백성들도 금나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곳에서는 세금을 거둘 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훗날 금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어쨋든 송나라를 도와준 대가로 금나라는 출병하는 대가로 군량미 20만석, 은자 20만냥, 비단 30만 필 등을 북송에 요구했고, 송나라는 울며 겨자먹기로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이후 완안아골타는 요나라의 중경과 연경을 연달아 점령하고 요나라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도망가기에 이르러 요나라를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완안아골타는 요나라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회령부로 돌아오는 길에 1123년 병사하였고, 동생 완안오걸매가 금태종으로 즉위한 이후 금나라는 중원의 새로운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인물 이름의 일본식 발음이 일본상업지 작가인 완얀아구다의 필명과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일본에선 이 완얀아구다의 홈페이지가 북방 민족 관련 역사 홈페이지로 오해받는 일이 있다고 한다.

사족으로 묵향에선 장인걸의 도움으로 금나라를 세우고 그를 형제처럼 믿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비중있게 나오지만......묵향이 금나라에 쳐들어가 설친 여파로 장면도 안 나온 채 끔살당했다고 언급된다(...).뭐니 이게
  1. 고려의 윤관 장군이 동북지역을 원정할 때 여진족의 추장이 바로 그였다. 그때 아골타도 형을 따라서 고려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완안오아속은 금나라 건국의 기틀을 실질적으로 다진 인물이다. 삼국지로 치면 손책 포지션.
  2. 이 전투를 팔리성 전투라고 부른다
  3. 이 탓인지 금나라에서도 발해인들이 제법 중용되었으며 뛰어난 장군들도 많이 나왔다. 그 이전에 발해인들은 거란족의 요나라에서도 꽤 좋은 대접을 받는 편이었다.
  4. 해상의 맹약이란 송나라요나라를 공격하자는 동맹을 맺은 것을 의미한다.
  5. 이때 요나라 황족이었던 야율대석은 서성으로 도주해 중앙아시아의 이리간(발하쉬 호) 부근에 카라키타이를 세워 1227년까지 약 백년 간 거란의 명맥을 유지했다. 카라키타이는 훗날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