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1 緋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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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가 짜낸 실을 가지고 만든 천. 영어로는 실크(Silk). 한자로는 가공 전 상태는 견(絹), 또는 명주, 가공 후 상태는 금(錦)이라고 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천을 찾을 수가 없었고 현재도 최고의 천이다. 가볍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흡습성도 좋고, 상당히 질긴 편이며, 방한 성능도 뛰어나다. 세탁이 어려운 점만 빼면[1] 최고의 섬유. 덕분에 에 필적하는 고급 물자로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었다.[2] 야생 누에인 산누에나방이 짜낸 실로 만든 비단은 천잠사라고 해서 일반 비단보다 훨씬 귀한 취급을 받았다. 삼국지나 역사책을 보면 , 보석, 등과 마찬가지로 상대 국가에 대한 귀중한 진상품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사천성의 비단이 유명했으며 이 지방 비단은 촉금이라고 하여 높은 품질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촉한의 유비가 조조의 조문에 비단을 보냈다든지 제갈량의 재산 목록 상당수가 뽕나무밭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 지방의 누에고치 생산량은 지금도 중국 전체에서 2위라고 한다.

비단은 단순히 사치품 용도로만 쓰이지 않았다. 중국몽고인들은 일종의 방호구 역할을 하기 위한 일종의 전투복으로 입었고,[3] 낙하산으로도 쓰였다.[4] 그래서 나일론이 개발되고 나서 누에를 군수용품으로 팔던 곳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낙하산은 미적인 면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비단을 쓴 것인데, 더 싸면서 기능도 좋은 나일론이 나오면서 비단을 낙하산에 쓰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드는 절차가 꽤 복잡하다. 우선 누에나방이 필요하고, 누에나방의 애벌레에게 잎을 먹여 기른다. 애벌레가 여러 번의 탈피를 거쳐 자라 성체가 되기 위한 변태를 위해 고치를 켜면, 고치를 삶아 실을 빼내 그 실로 비단을 짠다.
삶아버리기에 당연히 고치속의 번데기는 죽으며, 이를 식용으로 삼기도 한다.
여담으로 '누에나방을 우화 시킨 뒤 남은 고치를 비단으로 만들면 안되나'하는 생각이 들 수 도 있지만...번데기 째로 삶아버리면 한번에 고치 하나를 통째로 실로 만들수 있지만, 안의 번데기가 탈출한 뒤의 고치는 실이 계속 중간에서 끊겨서 생산성이 빵점이 된다.

비단은 중국의 특산물로, 이것을 해외에 팔면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서양으로 가는 교역로에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비단 제조법이 다른 나라로 퍼지는 것을 엄격히 막으려 했지만 몰래몰래 새어나가 결국 여러 나라에서 제작하게 되었다. 서양에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 이미 비단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웬만한 나라마다 누가 누에나방의 알과 뽕나무 씨앗을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 문익점목화 밀반입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인데, 이 일화가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급 옷감이었다.

한국에서도 근대 이전까지 당연히 옷감 및 중요 문서 기록용으로 써왔으며, 국가에서 양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가 누에치기를 권장했다고 나온다. 조선 시대에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의식을 통해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도 했다.[5] 조선 시대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따르면 큰 집에는 뽕나무 300그루, 중간쯤의 집에는 뽕나무 200그루, 제일 작은 집에는 뽕나무 100그루를 심도록 했다. 만약 규정대로 심지 않으면 그 지역의 수령을 파면했다. 서울 마포구 절두산[6]은 형세가 누에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옛 지명이 잠두봉(蠶頭峰, 누에 머리 산봉우리)이었으며, 산 아래에 뽕나무밭을 조성해 누에가 뽕잎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절두산 아래에 잠원동(蠶院洞)이란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지명에 있는 누에 잠(蠶) 자를 볼 것.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양잠을 하던 잠실(蠶室)이 2군데 있었는데 서울 잠실동과 잠원동 근처였다.[7]# 잠원역 승강장에는 벽에 타일 모자이크로 누에가 그려져있다.

한편 종묘 근처에 있는 성북동에 선잠단(先蠶壇)을 세워 음력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골라 서릉(西陵)씨[8]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에는 선농단 제사와 마찬가지로 선잠단 제사도 중사(中社)로 등급을 매겨 순위가 꽤 높았으니, 조선이 그만큼 양잠산업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1908년(순종 2년)에 서릉씨 신위를 선농씨 신위와 합치면서 선잠단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됐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당연히 제사 자체가 사라졌다. 지금은 문화유산 체험 차원에서 선잠단 자리에서 왕실 제례에 맞춰 제사를 매년 거행한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방 하나에 누에를 키우고 아이들이 뽕잎을 해와서 먹여다 고치를 공장에 팔았고 부산물로 번데기도 생산되었으나 농약의 사용과 중국산 비단의 저가공세[9]로 국산 비단은 사실상 숨통이 끊겼고, 과거 비단실을 잣던 누에들은 이제는 동충하초 등 건강식품 용도로 전용되고 있다. 현대에는 각종 섬유 기술이 매우 발달해서 비단을 재료로 한 옷의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비단 자체의 희소성 때문에 고급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헤르만 괴링은 자기 제복을 비단으로 만들어 입은 것으로 유명한데, 근현대 남성복은 고급이라도 을 사용하고, 비단은 셔츠넥타이, 안감 등에만 쓰는 게 보통이었던지라 여러 의미로 말이 많았다. 지금도 실크 정장은 너무 번들번들해서 소화하기 힘든 걸 생각해보면...

보통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오로지 여성들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 양대 사치품인 비단은 남성에게 금지되어있으니 이쪽 사람들에게 선물할 때는 주의하자. 다만 이슬람 문화권도 매우 넓으니 문화권에 따라, 그리고 개인 성향에 따라 상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본래는 무함마드가 사치를 방지하기 위해 선포했지만 이 금기사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인지 "남자가 비단옷을 걸치면 여자처럼 된다"(...) 같은 미신도 횡행하는 중. 하지만 100% 순수 비단이 아닌 견혼방 같은 섬유는 이 금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술탄의 옷은 모두 천의 씨실은 면이되 날실은 비단인 혼방섬유를 사용했으며, 가지안텝 지방에는 이 시절 만들어진 전통 옷감(Kutnu라고 부른다)이 아직도 수공업으로 제조되고 있다.

2 非但

‘아니다’ 따위의 부정하는 말 앞에 쓰여 ‘다만’, ‘오직’의 뜻을 나타내는 말.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위의 것과 혼동되기 쉬운 단어다.

ex) 비단 모든 사람들이 악한 건 아니다.

3 그 외의 뜻

飛湍: 흐르는 물살이 센 여울

鼻端: 코의 끝
  1. 중앙아시아에서는 비단용 세제로 석유를 썼다. 현대에도 견직물은 드라이클리닝이 기본이니 사실상 그 때로부터 달라진 게 없다.
  2. 사기에 기록된 바, 당시 비단 가격이 한 필에 대략 6백 전, 고급은 8백 전까지 갔는데, 당시 물가로 비단 한 필이 백미 6석(720kg)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120kg에 1백 전쯤 했다고 한다. 20kg 쌀을 5만 원으로 잡으면 180~240만 원에 이르는 고가템. 당나라 개원 13년(725)부터 천보 연간까지 장안과 뤄양의 쌀값은 항상 한 말에 15~20문 정도였고, 비단도 줄곧 한 필에 200문 선을 유지했다고 하니 이 당시엔 쌀 한 석당 비단 한 필은 되었을 것이다.
  3. 장수들은 갑옷 아래에 비단옷을 받쳐입었다. 관운장의 상징인 풀빛 비단옷이 대표적. 하급병은 풀솜이라 해서 비단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을 이용했다. 질긴 재질 특성상 화살이 박히더라도 옷이 찢어지지 않아서 그냥 잡아당기면 화살째로 뺄 수 있었다. 현대에 와서도 방탄복의 소재로도 사용되었으며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나쁘지 않은 방탄 효과를 보여주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도태.
  4. 일부 참전용사들은 사용 후 회수한 낙하산을 집에 보내 결혼할 여성에게 웨딩 드레스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5. 친잠은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권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었다.
  6. 천주교 성지가 있는 그 절두산.
  7. 잠원 역시 원래는 잠실이라 불렸으나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송파구 잠실동과 구분하기 위해 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8. 중국 전설에 따르면 서릉씨는 황제 헌원의 부인이다. 어느 날 서릉씨가 뽕밭 아래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데 야생 누에의 고치가 찻물 속으로 떨어져서 서릉씨가 고치를 꺼내려 하자 실이 줄줄 풀려나오는 것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누에고치에서 처음으로 비단실을 자아 헌원씨에게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이 전설 때문에 서릉씨는 처음으로 양잠을 시작한 자, 양잠의 시조로 기려졌다.
  9. 그럴 만도 한 게 아직도 세계 1위의 비단 생산국은 중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