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드 보아르네

Eugène de Beauharnais
1781년 9월 3일 ~ 1824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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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별은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충성해야 할 또다른 이유에 불과합니다.

- 모친 조제핀에게

1 소개

프랑스의 장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1]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기의 장군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유일한 아들. 즉,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의붓아들이다.

2 생애

2.1 전반부

귀족 집안의 적자로 잘먹고 잘살다가 그의 아버지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때 단두대에 머리가 잘리면서 가문의 몰락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외젠의 누이동생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의 회고에 의하면[2], 외젠은 정부에게 강탈당한 아버지의 칼을 되찾기 위해 당시 한창 명성을 떨치던 전쟁의 천재를 찾아갔는데, 이때 외젠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은 나폴레옹은 아예 직접 칼을 가지고 보아르네 저택을 방문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외젠의 어머니이자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 조제핀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1796년 3월 둘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외젠과 오르탕스를 자신의 양자로 거두었고, 특히 외젠은 1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참모가 되었으며 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빠르게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798년의 이집트 원정에도 종군했으며 생 장다르크(아크레)에서 부상당했고 1799년 8월 의붓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후 나폴레옹이 브뤼메스 쿠데타로 통령의 자리에 오르자 통령 경호 엽기병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렇게 털리고도 정신 못 차리는 오스트리아를 관광태우러 2차 이탈리아 전쟁에 나섰을때도 종군했으며 마랭고에서는 자신의 엽기병대를 지휘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외젠은 처음엔 조제핀의 재혼에 대해 탐탁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자신의 친아버지 이상으로[3]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었고. 특히 이집트에서 나폴레옹이 조제핀의 바람기를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 나폴레옹[4]에 감동해 어머니에게 당장 애인과 해어져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영국군에게 압류당한 탓에 전해지지는 못했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원래 이집트에서 귀국한 직후 조제핀과 이혼할 생각이였지만 외젠과 오르탕스의 눈물어린 호소에 이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5] 이후 나폴레옹은 1804년에 프랑스의 황제에 등극하고 조제핀도 황후가 되었지만 외젠은 의붓아들인지라 후계자 목록에서는 제외되었으나 황제의 가족으로 인정받고 황자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았다.

이후 근성가이 프란츠 1세가 3차 대불동맹을 일으키자 외젠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의붓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종군하였으며 훌륭한 공적을 많이 세우며 순조롭게 승진해나갔고 이후 벌어진 4차 대불동맹 전쟁에서는 이미 이탈리아 군단의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6] 그리고 1806년 나폴레옹은 이제까지의 공적을 치하할 겸 외젠을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임명하였고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의 딸 아우구스테 공주[7]와 결혼까지 주선했다. 이후 이탈리아 방면에서 주둔하게 되어 비교적 한산하게 보내는 듯했다.

1809년 나폴레옹은 결국 조제핀과의 이혼을 결심했지만, 이후에도 외젠과 외젠의 여동생 오르탕스[8]를 보호했으며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9]

2.2 스웨덴의 왕위계승를 제안받다

1810년 칼 아우구스트 황태자가 사망하여 후사가 없었던 스웨덴에서 그를 양자로 하여 스웨덴의 왕으로 맞아들이려 하였다. 물론 그가 뜬금없이 엉뚱한 사람으로 물망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스웨덴에서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이후 여러 왕조가 교체되었고 당시 국왕도 마찬가지로 계승권 다툼으로 왕위에 올랐는데다 후계자도 없어서 또 병림픽이 재현될 위기에 처한것.. 그런데 이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군대는 바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원수중에 한명을 국가 원수로 맞을 용의가 있다고 프랑스에 요청하게 된것..보아르네는 정치적 식견도 상당했고 때마침 스웨덴인들의 호감까지 사고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후보로 꼽히게 되었고, 스웨덴 왕도 이에 동조하여 보아르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왕좌계승의 조건으로 가톨릭에서 루터파 개신교로 개종해야만 하였으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보아르네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위계승자로는 나폴레옹의 원쑤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왕에 오른다. 그리고 베르나도트는 그후 나폴레옹의 통수를 거하게 친다 보아르네가 양자로 들어갔다면 스웨덴은 베르나도테 왕조가 아니라 보아르네 왕조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후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대불동맹군에 붙어서 나폴레옹의 몰락에 일익을 담당한 것을 생각하면 나폴레옹과 보아르네 자신에게 두루두루 좋았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려 스웨덴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사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는 뼈아픈 결정이었던 셈.

2.3 양아버지에게 의리와 명예를 지키고 살다 가다

그렇게 몇 년 간 예쁜 아내와 알콩달콩 기후 좋은 이탈리아에서 재미나게 살아가면서 그저 편하게 사는 듯 싶었는데...1812년 올 것이 왔다! 계속되는 러시아의 어그로에 결국 나폴레옹은 폭발하고 60만 대육군을 소집하기에 이른다. 이에 외젠은 자신의 이탈리아 군단을 이끌고 양아버지와 합류했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최대한 나폴레옹을 보조하며 그를 위해 싸웠다. 러시아 원정은 프랑스군의 계속되는 진격으로 승리가 가까워 보였으나 보로디노 전투에서 입은 피해와 때마침 일어난 모스크바 대화재와 러시아 최고의 장군인 동장군의 합류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철수하기로 한다. 그때 프랑스군의 퇴각임무를 위임받은 사람은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프랑스 최고의 기병대장 조아생 뮈라였는데 뮈라는 자신의 나폴리 왕국에 무슨 일이 있을까봐 혼자 먼저 이판사판으로 귀국해버리는 바람에 러시아에 남은 프랑스군은 와해될 위기에 남겨졌으나, 외젠이 나서서 이들을 수습하여 프랑스로 귀국했다. 하여간 믿을 건 자식들밖에 없다

이후 벌어진 제6차 대불동맹 전쟁에선 뤼첸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나폴레옹은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믿을 만한 최측근이자 자식이었던 외젠에게 이탈리아의 방어를 맡긴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쪽수로 밀릴 것을 예상한 외젠은 자신의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나폴레옹을 도우려 달려가려 했으나 이미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린 조아생 뮈라또 이새킈냐의 방해로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 대불동맹군은 보아르네에게 배신하면 이탈리아의 왕위를 주겠다고 꼬셨지만 보아르네는 준엄히 거부했다. 오오[10] 누구 누구는 참회해야 한다

1814년 외젠은 자신의 장인 막시밀리안에게 귀순을 권유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의붓아버지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4월 11일 결국 나폴레옹이 퇴위선언을 하였고 그제서야 외젠은 장인인 막시밀리안 폰 바이에른에게 항복하였고 다시는 나폴레옹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때 막시밀리안에게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백일천하 때 재기한 나폴레옹울 도울까 했지만 약속대로 다시는 나폴레옹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고[11] 천수를 누리고 1824년 사망한다.

3 평가

훌륭한 인격과 군사적 능력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 오현제처럼 나폴레옹이 외젠을 후계자로 지정했다면 어떠했을까?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사람이다.[12] 다만 보나파르트 가문은 능력은 어쨌든 간에 혈족주의 성향이 강했으므로, 나폴레옹이 외젠을 승계권까지 인정하면서 입양했다면 제정 자체에 참여하지 않았던 뤼시앵은 어쨌든간에 루이나 조제프, 제롬 등의 남자 형제들이 이끄는 또다른 형태의 내분에 직면했을 것이다.

4 그 외

외젠의 부인이 된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1788~1851)에겐 이미 약혼자(바덴 공왕의 아들)가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강제로 약혼을 깬 뒤에 외젠과 결혼을 시켰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 간의 금슬은 굉장히 좋았으며 둘 사이엔 무려 7명의 아이가 생겼다. 이 중 큰딸인 조제핀(어머니 이름을 따라 지었다.)은 스웨덴 왕 오스카르 1세의 아내가 되었고, 큰아들 오귀스트는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의 남편, 셋째딸인 아멜리는 브라질 초대 황제 페드루 1세의 황후가 되었다. 즉 외젠은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조상이 되는 셈. 아이러니한 것은 조제핀과 결혼한 오스카르 1세의 아버지는 바로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나폴레옹 1세의 배신자가 되는 스웨덴의 왕 그 사람이다.

참고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어머니인 조피 대공부인의 형부가 된다. 이 여자는 한때 나폴레옹 2세와 염문설이 돌았다.
  1. 부왕(副王). 이 시기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은 나폴레옹 본인이었다. 즉, 국왕인 나폴레옹을 대리해 이탈리아 왕국을 통치하는 총독에 가까운 개념이나, 일반적인 총독보다는 권한이나 권위가 훨씬 더 크다. 스페인 제국이나 영국에서도 나폴리나 인도를 통치할 때 그 총독에게 부왕 직함을 붙인 바 있다. 다만 외젠은 나폴레옹의 제위상속권이 없는 양자였기 때문에 스페인이나 영국에서 설치했던 부왕보다는 약간 급이 높다고도 볼 수 있다.
  2. 다만 이는 오르탕스의 어머니 조제핀이 바라스의 정부였다가 나폴레옹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한 세간의 가쉽(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직이 바라스가 옛 정부를 나폴레옹에게 떠넘기기 위한 지참금이었다던가)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므로 가감해서 볼 필요는 있다.
  3.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는 사생활이 굉장히 문란했으며 가정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4. 다만 휘하 장교의 아내 폴린 푸레스와 맞바람을 피우기는 했다(...).
  5. 이때 상황 자체가 나폴레옹이 이혼한다면 나폴레옹 자신에게도 정치적인 치명상이 될 상황이었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조제핀이 나폴레옹의 인기가 최고 자리에 도전해도 될만한 것 같자 정신차리고(?) 바람기가 사라져 부부 생활도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 후 나폴레옹이 거꾸로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6. 참고로 이때 외젠은 24살이었다. 나폴레옹의 상급 지휘관들이 상당히 젊은 편이였다지만, 외젠의 경우는 좀 나이에 비해 과한 지위를 준 듯 싶다. 나폴레옹도 이 사실을 인지했는지 마크도날 원수를 외젠의 군사고문으로 임명해서 외젠을 돕게 했다.
  7. 원래 칼스루헤 왕자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뜻에 의해 파혼. 다만 나폴레옹은 이후 아내 조제핀의 조카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를 자신의 양녀로 입양하여 프랑스 제국의 황녀 지위를 수여한 다음 칼스루헤 왕자와 결혼시키고 푸짐한 영지까지 얹어주어 나름대로 보상했다.
  8. 루이 나폴레옹, 나중의 나폴레옹 3세의 어머니이다. 오르탕스는 사실상의 이혼 상태에서 플라오 백작(실제 아버지는 탈레랑이라는게 정설이다)과 밀통하여 모르니 (자칭)백작을 낳았다. 나중에 모르니는 이부형인 루이 나폴레옹을 도와서 제2제정을 만드는데 참여하고 여러 장관직을 거친 후 모르니 공작이라는 진짜 작위를 받았다. 모르니는 극작가로도 활동했는데, 다작에 비해서 작품의 질은 그저 그렇다는 평이고, 연극계에서의 진짜 업적은 19세기의 대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를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
  9. 참고로 조제핀은 이혼 조건으로 외젠을 이탈리아 부왕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높이라는 것을 내걸었으나 외젠은 무슨 개수작이냐며 열을 내며 반대했다. 나폴레옹의 가족들 중에서는 가장 개념인이라고 할 만하다.
  10. 보아르네는 모친 조세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황제의 별은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충성해야 할 또다른 이유에 불과합니다.라는 간지어린 편지를 보냈다.
  11.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만약 나폴레옹의 편을 들었었다면(...)
  12. 나폴레옹에겐 친아들인 나폴레옹 2세가 있었지만 너무 나이가 어려서(1811년생) 당장 실질적인 후계자로 지정하기란 불가능했다.
  13. 나폴레옹에게 옹호를 해주자면, 이 혼담을 밀어붙인 대신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전 남편 알렉상드르의 조카뻘되는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를 양녀로 삼아 약혼자를 빼앗긴 바덴 왕자에게 시집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