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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éphine de Beauharnais[1]
난 내 아내를 사랑하지, 하지만 존경하진 않는다.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오.-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조제핀의 죽음을 듣고 말하길.
1 개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첫 황후. 나폴레옹 3세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자녀로는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있다. 나폴레옹과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다.
2 일생
프랑스의 장군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아내였다. 알렉상드르가 왕당파로 찍혀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처형될 당시 투옥되나,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풀려난다. 감옥살이를 할 당시 만난 테레사 탈리앵과의 친분으로 총재정부 아래의 파리 상류층에 들어가게 된다.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드날리다가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나폴레옹의 인연을 계기로 나폴레옹과 교류하고 얼마 뒤 1796년 결혼하였다. 나이는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다. 오오 누님 오오
사실 총재정부의 주역 바라스의 정부였는데, 조제핀에게 어느 정도 질린 바라스가 관계를 정리하면서 대신 구해준 신랑감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전도 유망한 젊은이였고 마침 조제핀의 미모에 푹 빠져있었으니 서로 윈윈이었다. 그때 바라스가 조제핀을 시집보내며 딸려 준 지참금이 바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2].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비해, 상류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그녀는 볼품없는 외모의 군인 나폴레옹에게 크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애시당초 그녀가 관심을 보일 리도 없었지만 그래도 결혼하게 되었던 것은 그녀의 애인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바라스가 나폴레옹의 장래가 유망하다며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사실이라면 여러모로 흠좀무...나폴레옹이 편지에다가 "당신의 편지를 보고 있으면 결혼한지 50년 된 부부 같아!"라고 적어 보내기까지 했다. 특히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원정하고 있을 때에는 거의 대놓고 바람을 피웠고 상대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 원정에서 귀환한 나폴레옹은 아예 이혼을 생각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도 복잡했고, 무엇보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던 그녀의 아이들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화해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이후 나폴레옹은 더이상 조제핀에게 열중하지 않고, 유명 여배우나 귀부인들을 총애하게 된다.
낭비벽이 심한데다가 후사마저 없었기 때문에 결국 1810년 나폴레옹과 이혼하였다. 자신의 무수한 바람과 냉담함에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나폴레옹에게 감동해서 조제핀이 마침내 정말 나폴레옹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미 나폴레옹은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식은 데다가,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고자 했기에 이혼당한 셈이다. 나폴레옹에게 이혼통고를 받았을 때 충격을 받아 졸도까지 했으며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나중에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안 아들 외젠의 설득으로 이혼에 동의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졸도한 건 완전히 쇼였다고 한다.
(이혼 통보에 졸도쇼한 조제핀)
나폴레옹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젊어서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일로 졸도할 성격이 아니었다고. 나폴레옹도 조제핀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라서 이혼할 때도 나폴레옹은 그녀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충분히 지원해주었다. 유명한 말 메종 궁전이 바로 그녀가 말년을 보낸 궁전이다. 나폴레옹 퇴위 이후에도 탈레랑은 조제핀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것을 약속해주었다.
혼란스러운 혁명기 시절에 귀족의 몸으로 살아남았던 처세술의 달인답게 파리에 연합군이 입성한 후 알렉산드르 1세의 방문을 받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르 1세는 조제핀을 여전히 황후인 것처럼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들과의 교류를 피하지 않아 이득을 본 조제핀이었지만 전 남편에 대한 어떠한 배신행위도 단호히 거부하였고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갈 무렵 사망했다. 그가 유배갈 때 재산을 챙겨 나폴레옹이 있는 엘바섬으로 가려고 했지만[3] 마리 루이즈가 엘바섬에 와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던 나폴레옹이 오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파리에 머무르다가 사망했다. 소문에 따르면 조제핀이 죽을 때 나폴레옹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폴레옹은 이틀동안 방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심적으로 괴로워 했다고 한다.[4]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버리고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 것을 정치적 실수로 보기도 한다. 당시 조제핀은 "승리의 부인(마담 드 빅투아르)"이라고 불리며 병사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함께 하던 시기는 프랑스와 그 자신이 잘 나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 후 국내적으로는 국민들이 마리 루이즈를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까기 시작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몰락이 시작된다. 그리고 조제핀이 혁명기를 겪으면서 강한 면모를 보여준 반면 마리 루이즈는 빈에서 곱게 자란지라 어려움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유배되었을 때 마리 루이즈는 남편 곁으로 가기는커녕 빈에 틀어박혀서 자기 애인이랑 편하게 살았다(…).[5]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조제핀이 프랑스 제국의 황후가 되었을땐 이미 41세였다. 괜히 늙어보이는게 아니다!! 조제핀의 대부분의 초상화는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에 그려졌으며 그녀도 30대까지만 해도 파리에서 잘나가는 미모의 소유자였던 것을 잊지말자. 미모로 한가닥하는 여자들로 우글거리던 당시의 파리 사교계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었다. 괜히 당시 최고의 권력자 바라스의 정부가 되고 6살 연하의 나폴레옹이 그녀에게 빠져든게 아니다.
3 일화
- 검열삭제 냄새가 까망베르 치즈 같다는 소문이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직후 어느날 연회를 벌였는데, 아무리 봐도 황제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찾다보니 그는 소파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는 시종들이 황제를 그냥 깨우면 무례하니 나폴레옹이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와서 코에다가 대고 맡게 하면 일어나리라고 의견 합의를 보았는데, 막상 치즈를 들이대니까 나폴레옹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조제핀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못하겠어[6]. 이건 부인병인 냉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씻지 않은 여성에게 성욕을 느끼던 나폴레옹의 독특한 성적 취향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나폴레옹이 한창 조제핀에게 열중하던 시절, 조제핀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곧 도착할테니 씻지 말고 기다리라는 편지가 있었다고(...).
- 바라스의 또다른 정부였던 테레사 탈리앵과는 절친이었는데 소문에는 3P 관계까지 있었다고 한다. 바라스 외에도 당대의 권력자나 재력자들과 염문이 꽤 많았고 실제로 그렇게 남자들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하지만 사치벽이 있었기 때문에 빚을 많이 져서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에도 그녀의 빚문제로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7].
- 사실 엄청나게 남자를 밝히고 사치가 심해서 나폴레옹의 골치를 썩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선량하고 인정이 많아서 인망이 높았다. 어려운 처치의 친구나 이웃도 제법 도와주었고 고아가 된 남편의 당질녀 스테파니를 데려다 키우기도 했다. 남편이었던 보아르네 장군은 인성이 그리 좋지 않았던지라 조제핀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고[8], 때문에 장군이 혁명으로 죽기 얼마전에 이혼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이혼한 남편의 5촌 조카를 데려다 키운 거다. 이만하면 정말 대인배라 아니할 수 없다. [9] 스테파니는 덕분에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하자 나폴레옹의 피부양자가 되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함께 단숨에 왕족 신분이 되고, 외국의 왕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10][11] 게다가, 한 용기병대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굵직굵직한 전과를 올리자 그 부대의 후원자가 됐는데, 그 부대가 바로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엠프레스 드라군(황후의 용기병대). 표범무늬 투구를 쓴 기병대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조제핀이 죽고 나서부터는 그녀의 기일마다 추모행사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오스만 제국의 태후 나크시딜 술탄이 조제핀의 사촌인 에메 뒤비크 데 리베리(Aimée Dubuc de Rivery)라는 설이 있다. 프랑스 출신으로 알려진 나크시딜 술탄은 수녀원에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납치되어 이스탄불로 끌려갔고 압둘하미드 1세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친프랑스식 개혁을 시행하였기에 퍼진 소문으로 한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출처
-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94년 폐지된 흑인 노예제를 1802년에 부활시킨 것은 조제핀의 부탁 때문이었다. 마르티니크 섬에 있는 조제핀의 친정이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고 흑인 노예 없이는 사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조제핀 사후 마르티니크의 생가에는 조제핀의 흉상이 만들어졌는데 머리가 한번 잘려나가고 복원한 이후에도 누군가 계속 잘라간다고 한다.
- ↑ 국내에서는 조세핀으로도 불리지만 조제핀 쪽이 올바른 발음.
- ↑ 나폴레옹의 이탈리아군 사령관 임명은 조제핀과의 결혼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미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군의 작전계획에 여러차례 참여했던 적이 있었고, 당시 이탈리아 방면군의 실적이 영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투입했다는 쪽이 사실에 가깝다고 한다.
- ↑ 말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날 기다릴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후술하는 내용을 감안하면 그녀가 죽었을 때 나폴레옹의 충격도 상당했을 듯.
- ↑ 나폴레옹의 유언은 "프랑스, 군대, 장군, 조세핀"
- ↑ 원래 그녀는 다소 냉정한 경향이 있었고 자신의 대고모인 마리 앙트와네트가 프랑스 민중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정략결혼이므로 애정이 없었다해도 당연할 듯...이라고 써놨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마리 루이즈도 나폴레옹에게 사랑에 빠진 뒤여서 엘바섬으로 쫒겨난 나폴레옹을 보러가려고 시도했지만 그 가족이 워낙 사위하고 사이가 험악해서... 마리 루이즈 항목 참조.
- ↑ 영어로는 "Not tonight, Joséphine"이라고 해서, 남성이 여성의 검열삭제 요청을 거절하는 관용구로 쓰인다.
- ↑ 그러나 이런 사치벽 때문에 오히려 당대의 유행을 선도했고, 밑바닥에서 자수성가한 벼락출세자들이 득실거리던 나폴레옹 궁정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기여했다고(...)
- ↑ 아이들에게도 무심했기 때문에 조제핀의 아이들이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 ↑ 당시 최고의 권력자 바라스의 정부였으니 빽이야 있었지만 재정적으로는 완전히 파산 상태였다. 살고 있던 집도 남의 것인데다 생활도 완전히 빚으로 꾸려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미모가 남아있고 여기저기 인맥이 남아있어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바라스에게 버림받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라스도 그냥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나타난 나폴레옹에게 바톤터치하는 식으로 넘겨버렸다.
- ↑ 나중에 외손녀가 벨기에 왕가로 시집을 가면서 벨기에 국왕의 직계 조상이 된다.
- ↑ 스테파니의 경우 완전히 인생 자체가 로또 맞은 거였던게 이때 조세핀이 거둬주지 않았다면 운이 아주 좋아야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 같은 곳에 들어가 자란 뒤 약간의 재산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거였고, 운 나쁘면 거리를 떠돌다 굶어죽거나 창녀가 될 가능성도 다분했다. 실제로 당시 프랑스에서는 스테파니 정도의 신분으로 고아가 된 경우 그렇게 풀리는 경우가 득실득실했다. 그런 처지에서 맘씨 좋은 친척 아줌마가 자기를 데려가더니 어느날 갑자기 신분이 왕족으로 널뛰기를 하고 옛날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꿀 진짜 왕자와 결혼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