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 ||||
신(新) | ||||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
439 ~ 589 | 남북조(南北朝)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한(漢) 후량(後梁) | 서위(西魏) | 동위(東魏) | ||
진(陳) | 북주(北周) | 북제(北齊) | ||
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중국의 역사 | ||||
후한(동한) | → | 위진남북조시대/육조시대 | ||
삼국시대 | → | 서진 | ||
오(동오) |
위의 지도에서 노란색으로 칠해진 국가.
얼핏 보면 오나라의 영토 크기가 위나라와 엇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1] 사실 저 영역 중 남방의 대부분은 인구가 거의 없거나 혹은 오의 통제력이 그리 크지 않은 이민족의 영역이었다. 오나라의 실질적 지배 영역은 위나라 또는 촉나라 국경지대와 건업 주변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시피 한 수준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실제로 후한 시절 주를 따진다면 위나라는 9개 주 반[2], 촉나라는 익주 하나뿐인데 오나라는 2개주 반[3]였다. 그나마도 교주[4]는 13개 주 중에서 가장 후진 주인 데다가 인구도 거의 없는 수준[5]이었고, 사실상 사섭일가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라서 없는 것이나 같았다.[6] 최훈도 삼국전투기에서 이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吳
목차
1 개요
인구 | 2,562,000명[7] |
수도는 건업(229)→무창(265)→건업(267). 229~280, 4대 52년.
4대 52년 간 중국의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국가명. 초대군주는 손권이며, 마지막 군주는 장락공 손호이다. 수도는 건업(지금의 난징)으로, 위진남북조시대의 다른 명칭인 육조시대는 오나라부터 건업에 차례대로 도읍한 여섯 국가들(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에서 유래한다.
국호인 오(吳)는 손권이 봉해진 땅이 오군(吳郡)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군벌 손책이 기반을 닦고, 그 동생 손권이 황제로 즉위했으나 내정 면에서 여러 사건사고 끝에 개혁에 실패했고, 결국 서진에게 망했다. 흔히들 수성의 이미지로 많이 굳어져 있으나 오는 합비를 통해 위 공격을 꾸준히 시도하기도 했다.[8][9]
다만 공격의 성과는, 단 한 차례조차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이 점은 촉한의 북벌 실패와 일치한다.[10]
오(吳)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기 때문에 동오(東吳), 간혹 남오(南吳)라고도 하고(위의 지도에서도 동오라고 표기한다.), 손(孫)씨성을 붙여서 손오(孫吳)로도 불린다. 손오라고 쳐도 이 페이지로 리다이렉트된다.
2 역사
198년 | 손책이 오후로 책봉 |
208년 | 적벽대전 |
219년 | 형주 공방전 |
221년 | 손권이 오왕으로 책봉 |
222년 | 이릉대전 |
229년 | 손권이 황제로 즉위, 오나라 개국 |
231년 | 공손연 외교 분쟁 |
242-252년 | 이궁의 변 |
265-267년 | 무창 천도 시도 |
279-280년 | 진나라의 침공 → 서진 |
3 영토
수도는 건업(建業)이고, 가끔 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 제2수도급 무창(武昌, 오늘날의 어저우 시 어청 구), 강릉(江陵), 교지(交趾), 오군(吳郡), 회계, 장사 등이 주요도시.
왜 이렇게 보이냐 하면, 이것은 오나라 조정이 명목상이나마 임명했던 지방장관이나, 사서에 등장하는 지역을 모두 포함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아래 단락에 있겠지만, 양주지방에 해당되는 강남은 동진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형주도 무릉쪽은 이민족들 투성이에다가 교주 쪽도 손권 사후에는 폭정으로 인해 막장이 된다. 실제로 오의 강역수준은 위 지도만큼이 아니라, 동에서는 건업으로부터 서로는 이릉과 자귀에 이르는 장강 유역의 긴 띠의 형태로 보는 의견이 존재하고 양주 쪽은 장강 유역의 긴띠, 형주쪽은 장사, 영릉, 계양정도 까지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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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통치 영역은 대략 이 정도(...)[11]
삼국전투기에서도 이 점을 지적해서 오의 근거지인 동오지방만 보면 위나라의 청주 정도 밖에 안된다고 얘기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부터, 국가의 통치구역이나 실제 세력을 면이 아닌 선, 혹은 점으로 파악하는 시도가 대세가 되고 있다. 위나라만 하더라도 서량지방이나 태원으로 대표되는 병주에 대한 지배력은 약했다고 보여지며, 촉한도 진령산맥으로 관중지방과 한중이 분리되어 있고, 한중 역시 촉과는 일정부분 분리된 지역이고 성도 이남의 경우에도 적지 않는 반란 및 이민족 거주지역이라[12]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달리 실 통치영역이나 영토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더 좁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강남지방은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는데 개발되기 시작한 건 손권 치세 중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서진이 캐발살나고 동진이 건국된 뒤 중원의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남북조시대며, 강남이 강북을 앞지르기 시작한 건 남송때의 이야기.
4 인구
세력은 촉보다 조금 나았다는 식으로 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ex. 위:오:촉=6:3:1을 주장한 미야자키 이치사다) 이는 사료상으로도 확인되는 인구에 따른 것이라 보통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한서 지리지(전한시기, AD 2년 기준)에 따르면 형주(3,775,884명)+양주(3,027,598명)+교주(1,372,290명) : 익주(4,548,654명) 사이에는 약 2:1 정도의 차이가 성립하며 후한서 군국지(AD 140년 기준)링크에 따른다 해도 형주(6,315,952명)+양주(4,338,538명)+교주(1,114,444명) : 익주(7,242,028명) 사이에는 약 1.65:1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후한이 전한보다 지역에 대한 통제력 및 인구 파악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호족의 세가 강한 편이었다.) 전한과 비슷한 2:1 정도의 인구비가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차이다. 인구가 밀집된 형북 일대가 오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인구 피해는 촉한에도 존재함을 감안한다면 통상적으로 2:1,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1 정도의 인구 비례가 존재한다고 예측된다.
또한 촉이 망할 때 배송지가 주석으로 남긴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의 인구는 - 호(戶) 28만 / 남녀구(男女口) 94만 / 대갑장사(帶甲將士) 10만 2천 / 관리(吏) 4만 명 하여 약 인구 108만 2천명에 병력 10만 2천명, 오의 경우에는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 4개 주(州) / 43개 군(郡) / 313개 현(縣) / 호(戶) 52만 3천 / 관리(吏) 3만 2천 / 병(兵) 23만 / 남녀구(男女口) 230만 하여 약 인구 256만2천명에 병력 23만명으로 오의 인구가 2배를 넘는다.
또한 통전 7권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아예 촉한은 건무 원년에 인구 90만 오나라는 230만으로 역시나 두 배가 넘는다.[13] 이는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한&후한 시기 지역별 인구 비례와도 유사하다.
- 간단 비교표
호(戶) | 인구(민간인) | 병력 | 관리 | |
오 | 52만 3천 | 230만 | 23만 | 3만 2천 |
촉 | 28만 | 94만 | 10만 2천 | 4만 |
규모는 오가 더 커도 고관대작은 촉이 더 많다.
참고로 오는 멸망 직전 영토가 4주, 43군, 313현 정도였다고 한다.
5 사회
촉이나 위와 비교하자면 중앙의 통제력이 낮고, 지방 호족, 그 중에서도 일종의 개발영주에 속하는 토호들의 힘이 강했다.[14] 이 때문에 손권이 별로 영토 확장을 못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등 이시대의 강남 정권들을 다룬 서적들을 살펴보면 오의 국가 구조는 이러한 개발영주들과 피란민으로 구축된 측근 세력들 간의 균형을 이루는 구조였다고 이야기된다.
어찌보면 아직 미개척지에 가까운 강남 일대를 기반으로 삼은데서 유래한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촉이나 위가 그래도 과거 400년간 중원을 군림한 한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기에[15] 잘 구축된 군현제를 기반으로 하는 탈봉건적 중앙집권국가였던 반면에 한무제시기에야 본격적으로 중국의 영역에 들어왔던 지역이 많았던 만큼 기반으로 하는 지방호족 세력의 연립정권인 오나라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앙의 힘이 약하고 지방 호족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엔 없었던 셈이다.
위에 나타나는 인구통계자료 이러한 사회 구조를 반영 하는데, 사실 관리호(吏)는 고관대작 만이 아니라 서리, 아전 같은 '지방 행정 공무원'을 통괄한 것이다. 인구는 촉의 3배 가까이 되는데 관리의 숫자는 오히려 촉보다 적은 것이다. 당연히 국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호족들은 약한 통제력 때문에 할거할 수 있게 된다.
이게 화북 지방의 피란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의 구성원들에게는 상당히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 사실 한(漢)나라 이래로 권위있는 왕권을 추구한 중국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이런 분위기의 사회는 거의 '혐오스러운 무정부 지역', 일본 위진남북조 개설서의 비유따나 총과 사막 대신 검과 밀림으로 배경을 옮긴 서부개척시대라 할 정도로 신천지나 다름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서 손씨 정권 역시 유교적으로 만족스러운 명분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손책, 손권 시대에 오나라에 살던 명사(화흠 등)나 신하가 조조 측으로 이탈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고, 촉에 사신으로 다녀오면 촉빠가 되는 신하들이 많았다. 심지어 손권 사후에 손씨들이 난장판을 벌여서 국가가 막장이 되자 주적은 내부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촉에 밀서를 보내 적당한 때 길을 열어줄테니 군대를 끌고 와서 난리 평정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을 한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공적 기록이 많은 위서나 기록 자체는 많이 소실되었지만 그래도 진수가 원래 촉빠의 신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조정에서의 일을 많이 담은 촉서와는 달리 오서는 뭔가 기이한 일들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그 덕분인지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역사가 아침 드라마 틱한 느낌을 받는다. 황후가 궁녀들에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칭제의 명분 자체도 그럴싸하지 못한 편. 오나라의 칭제 자체도 위나라가 한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는 것이나, 촉한이 한의 계승을 내세우는 것에 비하면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위, 촉 두 나라가 모두 칭제하자 자존심에 덩달아 칭제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손가(孫家) 3대의 군사 업적이 있긴 하지만(...)
박물지에 따르면 예장군에는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으며,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박물지가 써진 시기를 보자면 오나라 때도 이런 풍속이 있었을 것이다.
예장군豫章郡의 사대부들은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산다. 그런데 그 부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얼굴을 드러내고 시장에서 한 푼 까지도 다투며 돈을 벌어 그 남편의 수레, 말, 옷 등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 남편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다시 부잣집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도, 여자들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바친다. 먼저 들어온 아내들이 비록 몇년을 부지런히 하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 집안에 가득할 정도일지라도, 오히려 방출되어 자리를 뒷사람에게 피해준다. 박물지 314(10-4)
吳吳 하렘 吳吳
6 경제
6.1 손오정권의 경제사적 의의
국가 구조는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고, 삼국지 자체만을 다룬 기록의 경우 아무래도 촉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는 오지만, 위진남북조의 사회경제사 측면에서 본다면 오는 거의 위에 필적하는 비중으로 다뤄진다.[16] 이는 중국 경제사 측면에서 엄청나게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점을 오나라, 개중에서도 손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 이 시기 오는 이민족을 몰아내고 지금의 강동 지역인 남방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지역을 넓혔다. 당대의 오 지역은 아직 무개척지가 많아서 행정구역을 쉽게 늘릴수 있었다.
특히 건업을 수도로 정한 일은 반드시 다뤄질 정도로 중요시된다. 손권이 수도로 정하기 전까진 도시 근처에도 미개척지가 존재할 정도로 별볼일 없던 지역이 손권이 수도로 정하고 오나라 시기에 집중적으로 개발되면서 이후 오랫동안 강남지역 정권들의 수도로 사용될 정도로 발전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건업을 수도로 한 남조를 가리키는 표현인 육조시대의 선두로 오나라가 꼽힌다.
전한시기 아주 강성한 제후왕이자 오초칠국의 난의 주동자였던 오왕 유비의 영지였던 오나라의 부유함(<사기> 오왕 비 열전에 따르면 구리와 소금이 많아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을 생각하면 손권의 강남 개발 이전에도 강남은 개발이 많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전한시기 오나라는 생각처럼 넓은 지역은 아니었다. 대략 장강 하류 삼각지와 그 주변지역 정도에 불과한데 그것도 다른 왕들에 비하면 아주 크고 강성한 것이었다.
물론 손오 정권 시절 강남 개발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춘추전국시기 장강유역인 형초, 오월지역에 나라가 세워져 경제와 문화는 어느정도 발전했으나 여전히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생산력은 낮은 상태였다. 그래도 적어도 생계를 꾸리는데 큰 곤란은 없어 토지 개간에 큰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손오시기에 북방의 선진 농업기술이 강회이남 지역에 전해지긴 했으나 아직은 이러한 혜택을 입은 지역은 넓디넓은 남방지역의 일부일 뿐 이며 그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낙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경지에 불을 질러 밭을 갈아 물을 끌어다 농사짓는 화전 경작 수준이었는데, 동진시대에 들어서야 화북에서 난을 피해 대규모의 유이민이 이주해 북쪽의 생산 도구와 기술이 남방의 논농사와 결합하게 된다.
따라서 영토를 개발하기엔 오나라는 영토에 비해 인구부족에 시달릴수밖에 없었고 행정장악력도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손권은 지방의 주요세족에게 행정력과 개발을 위임했고 그 결과, 사족에게 소속된 이들은 중앙정부에 소속되지 않아 조세와 요역, 병역을 부담하지 않는 개인의 부곡(部曲)이 되어 호족중심의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과장해서 반란이 일년 열두달 일어났다. 인적자원을 채우기 위한 어쩔수 없는 방편으로 손권의 인간사냥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이때문에 대만까지 가서 대만 원주민들을 끌여들여 인구를 늘리려다 실패해서 목숨을 잃는 장수도 속출했다. 이는 동진 시기에 많은 유이민이 들어오면서 이런 인구부족은 어느정도 해결을 보게 된다.
6.2 촉과의 경제규모 비교
이렇게 연구가 되면서 불거진 문제가 위, 촉, 오 삼국의 경제력 순위. 과거에는 인구와 영토를 기준으로 해서 삼국의 경제력을 위>오>촉 순으로 평가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자 아직 저개발 상태의 장강유역이 이미 500년간 개발이 되었고[17][18] 토질도 비옥했던 사천 지방보다 어떻게 더 부유할 수 있냐는 모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오나라의 인구는 200만이 넘어서 100만에 불과했던 촉나라보다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19]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력이었으므로, 인구수로 보면 촉이 오보다 경제적으로 나았다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
일단 장강이남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이에 반해 장강(양쯔강) 하류는 춘추전국 시대부터 개발되었으며[20], 오나라가 장악한 형주남부 지역(현재의 호남성지역) 하나만 가지고도 촉나라가 장악한 익주 전체의 면적과 맞먹기 때문에, 아무리 촉나라가 국가운영을 탄탄히 해도 피지컬적 한계 때문에 오나라를 능가하기는 힘들었다.
6.3 둔전제도
위의 경우 둔전이 군현 지역내에 있더라도 군현의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손오는 둔전관이 군현을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258년 손휴가 내린 조서(既出限米,軍出又從)를 보면 둔전병은 따로이 조세(限米)를 납부해야했다. 이듬해 내린 조서에는 주군의 관원과 백성 그리고 둔전병들이 농사를 등지고 장삿꾼이 된 것은 과중한 세납 때문(由租入過重)이라고 했다.
6.4 화폐, 상업
동탁이 화폐제도를 말 그대로 개박살낸 이후, 중국 전토에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고 현물거래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위에서 오수전을 다시 제대로 발행하고 촉에서 직백오수, 태평백전 등의 당백전을 발행했던 것처럼 오는 대천오백, 대천당천의 당백전들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화폐경제를 되살리려 한 손권의 노력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화폐보다는 실물거래를 더 신뢰했고, 마치 훗날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과 비슷하게 화폐 장려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동전들은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인다. 그리고 여기서도 깨알같은 사료셔틀 주연묘
한편 촉에서 만든 태평백전등이 오나라 일부 지역에서 유통되기도 했는데, 이 태평백전 역시 크기와 중량이 일정하지 않은 당백전악화(惡貨)[21]였으므로, 오나라 내에서 얼마나 유통되었는지는 많은 자료가 추가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이미 화폐경제 자체가 어떤 돼지 때문에 박살난 상황에서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아예 유통이 안 된 동탁의 소전과 달리 촉한의 직백오수와 그것을 계승한 화폐들은 촉 내부에선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유통되어, 비록 이전 시대에 비하면 악화였으나 이미 화폐경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가 가능했기에 촉한 경계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유통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나라 중앙정부가 유통한 화폐가 아니었으므로 오나라 전체에 줄 수 있었던 영향은 크지는 않았을 터다.
6.5 산출되던 물산
국가에서 중요시 여기던 소금은 많이 산출되었다. 앞서 말한 사기에도 나왔듯 이 땅은 구리와 소금이 많은 땅이었고 전한시기 오나라는 소금과 구리를 수출하며 '해염현'이라는 명칭을 가지는 현도 존재할 정도였으며 더군다나 202년에 주유가 "우리 땅은 소금과 동이 나와 부유하기 때문에 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소금은 풍족한 것이었다.
그외에 오나라는 기후 조건과 남방 교역 덕분에 진귀한 사치품을 다양하게 모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말과 같이 부족한 자원들을 거래했다. 특히 교주는 오나라가 남방의 물품을 생산하거나 들여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결국 사섭 사후 손권이 사씨 가문을 내치고 교지를 직할통치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씨 가문을 내친것이 교주의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손오 멸망 때까지 교주 지역은 손오 정권에 저항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7 군사
군사적인 면에서는 세병제를 취했는데 군대가 사병화 되어 통합된 지휘체계가 없는 점이 큰 약점이었다. 이는 호족연합체인 오의 국가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족들 개인이 이끄는 군대를 모아서 오군으로 편성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군의 지휘체계 아래에 또 별개의 지휘체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방어전에서 꽤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반면, 외정을 나갔다하면 발리는 게 일이었다. 특히 통합된 지휘체계를 요구하는 야전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죽을 쑨 다른 원인은 남중 평정 후 말을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기병을 대신해 보병 전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던 촉[22]과 달리, 오는 이런 노력이 없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런 손오의 체제를 일종의 일본의 개발영주(사무라이와 다이묘의 전신격)와 유사한 체제로 보았다.
군사 지휘관들 마저도 제멋대로 이며 당시 기준으로 봐도 용맹함은 어쨋든 규율은 상당히 엉망이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 감녕과 여몽이 다툰 일화에서 이러한 군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감녕의 하인인 어린애가 여몽에게 도망쳐 있다가 감녕이 그 아이를 붙잡아 죽이자, 분노한 여몽은 군사를 몰아 감녕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말리자 감녕과 화해하였다는 일화인데, 어떻게 보면 서로의 그릇을 드러내는 훈훈한 일화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국가의 최고위급 장수들이 무슨 조직폭력배들처럼 사소한 다툼으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원한을 품고 휘하 군을 함부로 동원해 전투를 벌이려다가 그만둔 엽기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게 무슨 '막장'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훈담'으로 취급된다. 이런 고위급 인물들이 어린아이 하나 때문에 내전을 벌이며 서로 죽이려던걸, '어머니의 중재로 참았다'고 자뭇 훈훈하게 기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짓을 벌였던 여몽과 감녕마저도 오나라에서는 분명 매우 양식있고 비중이 높은 용장임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손권이 오왕에 즉위한 뒤에는 보급체계라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손권이 오왕 즉위하기 전까지는 아예 봉읍제라 하여 각자 땅 나눠주고 적절 관원 임명하고 각자 무기 조달해서 군대 편성하는 체제였다.
당시 위는 문무에 이름있는 장수들을 대촉전선에 배정하였는데 촉한과 위의 대결은 아무래도 옹양주의 유동적인 상황을 촉한이 적극적으로 이용해 이민족, 현지인 포섭으로 계속 영향력을 늘리려 하고 위가 군사, 행정력을 동원해 이를 방어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선도 유동적이어서 서로 병력을 기동하는 일이 잦아 장수들이 활약을 주도 할 수 있었다. 반면 손오와 위의 싸움에선 지형의 문제로 서로 대치하는 국면이 주가 된 전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위가 공격하게 만들어 승리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육손의 석정 전투와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
오나라의 굴욕으로 대표적인 게 료래래(遼來來)로 유명한 합비 공방전이지만, 최대의 굴욕은 촉 멸망 후에 익주나 먹자고 보협과 육항에게 병력 3만명을 줘서 영안으로 쳐들어가게 했는데, 겨우 2천명 이끌고 있는 나헌한테 쩔쩔매다가[23] 진에서 보낸 형주자사 호열에게 발린 것.
한편 손오는 건국과정에서 강남 토착민인 산월(山越)의 저항을 받았다. 산월은 고대 백월(百越)의 후예로 지금의 강소성, 안휘성, 복건성, 강서성 등지의 산악지역에 분포했다. 이들은 농사뿐 아니라 무기제조도 할 줄 알았으며 전투에 뛰어났다. 손오는 병력충원과 재원 마련을 위해 산월이 비교적 많이 분포해 있던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했다. 제압한 산원인들 중 '강한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자는 민호(民戶)로 편입'시키는 방침을 세워 전쟁과 생산에 활용했다.
8 문화
양판소 수신기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다. 괴상한 사건이나 괴물은 높은 확률로 오나라에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괴물들을 물리치는 사람들도 많다. 계낭을 죽인 제갈각이라거나, 팽후를 삶아먹은 육개라거나, 낙두민이라는 괴인을 하녀로 둔 주환이라거나(...) 무릉만이나 산월 같은 이민족이나, 중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동물을 접한 경험이 이러한 전설들을 낳게 했을 것이다.레알 몬스터헌터
종교면에서는 손권의 치세에서 불교가 진흥되었으며, 손책의 기록으로 보아 우길을 숭배하는 태평도 계열의 도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호가 세운 비석이 몇개 있는데 탁본이 남아있다. 과도기적이고 특이한 서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9 해외교류
고구려와 접촉하여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담으로 한반도의 삼국만큼은 아니지만 일본과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으며[24], 애초에 삼국시대 자체가 중국이 갈래갈래 찢어진 시기이다 보니 주변국들도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줄타기를 많이 했다. 고구려가 그런 식으로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운을 띄우다가 관구검한테 한방 먹기도 했고, 베트남 지역의 사(士)씨 정권도 사섭의 통치 아래 위와 오 사이에서 외교전을 벌였다.
10 이것저것
요절 징크스가 유명하며, 심지어 촉으로 양자가 되어서 와도 요절하는 나라. 요절이 많은 이유로는 원래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 기생충[25][26]이나 질병이 창궐하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한족은 강남 지방의 토착병에는 면역력이 없어서 급사하는 경우가 잦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오나라의 요절징크스 참조.
거듭된 합비 조공과 형주 뒷치기, 고구려에게 당한 굴욕 등이 겹쳐져 오나라, 특히 손권은 삼국지 갤러리를 비롯한 삼국지 관련 커뮤니티에서 허구헌날 까인다.
이러한 오를 위로하기 위해 한때 삼국지 갤러리에서
위는 황조계승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고 촉은 충의를 중시하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고 오는 모에요소로서 덕후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
라는 농담이 반짝 유행하기도 했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지을 당시, 원 왕조를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명 왕조가 장강 이남, 건업(당시 금릉)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나마 오나라의 비중이 높아지고, 오나라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는 말도 있다.[27]
삼국지연의가 촉한이 주인공인데 여기서 오나라는 아군이 되었다가 적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최후에는 제갈각의 의도에 의해 손이와 정봉형제가 촉한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이렇듯 역사적으로도 별다른 옹호론자들이 없는지라 오나라가 소금을 만들지 못했고 그 때문에 촉나라에게 수입해서 썼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연의에서 오나라 분량을 최대한 늘릴만큼 늘린게 이 정도다 라는 등의 낭설도 많이 퍼져있다. 물론 오나라 관련 내용에서 나관중이 좋게 써준것도 많고 손오 최악의 사건인 이궁의 변과 그로 인한 캐막장 상황이 빠지면서 수혜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으니 몇몇 오빠들의 주장처럼 나관중은 오까여서 오나라 비중을 축소했다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자제해야 할 것이다.
본 삼국지와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 리동혁의 연구에 의하면 오는 멸망 직전 비축된 곡식은 280만 섬, 배는 5000여 척 정도였다고 한다. 덤으로 후궁은 5000여 명 정도됐다고 한다.
11 역대 황제
대수 | 재위기간 | 묘호 | 시호 | 성명 | 약력 |
사후 추존 | 효의왕(孝懿王) | 손종(鍾) | 손권의 조부. 생몰년 미상. | ||
사후 추존 | 시조(始祖) | 무열황제(武烈皇帝) | 손견(堅) | 손권의 아버지. 156년 출생, 192년 사망. 37세. | |
사후 추존 | 장사환왕(長沙桓王) | 손책(策) | 손권의 형, 건국의 기초를 닦음. 175년 출생, 200년 사망. 26세. | ||
1대 | 229-252년 | 태조(太祖) | 대황제(大皇帝) | 손권(權) | 오나라의 초대 황제. 182년 출생, 252년 사망. 71세. |
2대 | 252-258년 | 회계왕(會稽王) | 손량(亮) | 손침에 의해 폐위. 243년 출생, 260년 사망. 18세. | |
3대 | 258-264년 | 경황제(景皇帝) | 손휴(休) | 손량의 이복형. 235년 출생, 264년 사망. 30세. | |
사후 추존 | 소헌문황제(昭獻文皇帝) | 손화(和) | 손호의 아버지. 224년 출생, 253년 사망. 30세. | ||
4대 | 264-280년 | 귀명후(歸命侯)[28][29] 말황제(末皇帝) | 손호(皓) |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242년 출생, 284년 사망. 43세. |
12 창작물 속의 모습
가족사 드라마의 소재로는 최적의 국가이나 오나라 자체가 워낙 조연포스로 무장했기 때문인지 너무 활용되지 못한다. 사실 주된 역할은 유비 VS 조조의 메인 스토리 라인에서 양측이 좀 잘 나가려하면 딴지를 걸어주는 역이다… 삼국지 공명전만 해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살아남고 위나라를 개박살내려고 하자 촉이 너무 강해지면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촉나라를 뒷치기하려고 해서 제갈첨이 활약할 기회를 준다.[30]
김용이 오나라를 중심으로 삼국지를 쓰려다가 때려쳤다고 한다(…). 힘들기도 한 게 한 명의 주인공에 스포트라이트를 줄 수 있는 촉이나 위하고는 다르게 군주가 3번이나 교체되고, 주역급으로 밀어줄만한 인물들은[31] 단명이다.
그리고 후반부의 주인공급으로 밀어줄만큼 장수하는 손권이나 육손이 나오면 오나라가 버로우한다(…).
단지, 역사 소설보다는 막장 드라마를 쓰겠다고 작정하면 아직 연의에 반영되지 않은 풀어낼 이야기가 꽤 많이 있다.(...)
애꿎은 손책이 여성화되어 벗겨지는 만화인 일기당천과 BL괴작 강철삼국지 정도가 오나라를 소재로 삼은 경우라 하겠다. 한국 만화 중에는 손영기 정도.
게임상에서도 그나마 손견과 손책 정도만 상당한 후빨을 받을 뿐 대부분의 장수들은 그저 안습할 뿐이다. 특히 주연은 삼국지연의에서 모든 활약을 삭제당하고 조운에게 썰리는 걸로밖에 안나오며 주유나 여몽 등 대부분이 일찌감치 죽어버리는 통에 나오는 게임은 촉이나 위에 비해 적다. 그나마 육손은 주유에 후임근데 원래는 여몽 후임과 이릉전투의 주역으로 푸시를 받고 있는것 빼면 육씨 가문이 오나라의 중심을 지키고 있어요.
삼국지 시리즈에선 주위 땅이 공백지 투성이며, 특히 군웅할거 시기에는 주위에 약한 세력 밖에 없어서 순식간에 땅을 얻고 다른 군주들과 달리 초반에도 거대 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다. 적벽대전 이후는 수춘지역을 점령하고 조조를 공격 하거나, 유비를 공격 해서 장수진 흡수하고 천하이분을 몸소 실현하면 된다. 장수진들도 상당히 강력하고 주변에 바보들 밖에 없어서 플레이어가 잡든 AI가 잡든 거대 세력으로 자라나는 진영 중 하나.
삼국지 3에서는 채모와 제갈탄정도를 제외하고는 오나라 장수들만 유일하게 수전지휘가 육전지휘보다 높다. 특히 주유는 육전지휘는 73에 불과한 주제에 수전지휘가 100이다. 채모(육전지휘 67 수전지휘 85)야 삼국지연의에서는 해상전 전문가로 나오니 그렇다 쳐도(...) 주유는 아마도 적벽대전 때문에 수전지휘가 극에 달하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오나라의 별명은 아이돌 군단. 주유, 육손 같은 미남계열부터 시작해서 불멸의 커플 능통과 감녕, 목소리와 검법이 간지나는 주태[32], 그리고 여캐 4총사인 대교, 소교, 손상향, 보연사 등 비주얼이 좋은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다. 덕분에 섬나라가 오나라를 좋아한다는 말까지 나왔다.사실 일본은 오빠가 꽤 많은 편이다.허나 진실은 저 너머에 그런데 6부터 등장하는 남자캐릭터들의 거의 다 괴물(정봉), 아저씨(노숙, 한당)들이라서 이러한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것 같다. 근데 이 아저씨들도 인기가 넘친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촉나라의 어린 신세대들로 대체시키려는 듯.
SD건담 삼국전에서는 '굉(轟)'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손상향 가베라가 먼저 죽은 손견 제피랜서스와 손책 사이살리스에게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 ↑ 간단히 생각하면 강원도가 수도권보다 더 넓다고 해서 더 힘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 ↑ 사례(후한의 수도), 예주, 기주, 연주, 서주, 청주, 량주(서량), 병주, 유주, 형주 북부
- ↑ 형주 남부, 양주(서량이 아니라 강동 지역의 주), 교주
- ↑ 오늘날의 베트남, 광둥 성 인근.
- ↑ 명색이 주(州)인데도 어지간한 군(郡)과 인구가 비슷했다.
- ↑ 손권이 사섭 사후 여길 잘못 건드려서 교주가 반란의 온상이 된 것 덤. 덕분에 손오는 멸망때까지 이 지역의 반란에 고생하게 된다.
- ↑ 군인까지 포함한 숫자로 위략에 의하면 삼국시대 말기 군인의 숫자는 23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 ↑ 다만 실제로 벌어진 규모나 담론의 거대함, 그리고 지속성 면에서 촉의 북벌 이상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말은 과장이 있다. 이후 남북조 시대의 전개를 볼 때 합비는 아예 애초부터 남조의 영역이었고, 체제가 내부적 요인으로 망가진 양(梁)나라 시대 외엔 북조에게 빼앗긴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남조 국가들은 합비보다 북쪽 축선에서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공격의 성과는 생각보다 미미했다.
- ↑ 위가 오의 침공을 다소 가볍게 생각한 정황은 있다. 대표적으로 234년 촉-오의 위 침공에 대해 삼국전투기에서는 손권의 입을 빌어서 '아 놔 왜 우리는 변변치 않게 합비 침공을 하는데 왜 위협적인 제갈량 놔두고 조예가 친정을 함?' 이라고 디스를 하는데,조예 스스로 '어차피 손권은 내가 도착도 하기 전에 달아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 ↑ 제갈량 사후(정확히는 비의 이후 진지시대까지) 촉의 북벌이 촉한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처럼, 오나라의 북벌 역시 오나라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손권대부터 시작해 제갈각 때 절정을 이룬 합비전투(...).
- ↑ 다만 이는 한중, 무도가 위나라 통치 영역이라고 잘못 적혀 있다. 실질적으로는 삼국전투기의 실질 통치 지역과 비슷하다고 봐야 한다.
- ↑ 애초에 춘추전국시대때는 중국의 영역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전한때에도 남월과 민월, 동월이라는 국가가 존속해있었다. 이 지역이 중국의 영역하에 편입된건 한무제때의 일. (정확하게는 진라라도 점령한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가 붕괴되어서 다시 독립하게 된것)
- ↑ 이걸 근거로 병사가 남녀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 일본에서는 중세 일본의 무사정권시기와 유사하다고 보기도 한다.
- ↑ 촉이 위치한 사천 일대는 전한시기에 수도권이었던 관중을 부양하는 배후지로 집중 관리되면서 한나라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고조 유방이 어느 지역을 기반으로 일어섰는지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온다.) 화북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위는 두말할 것도 없다.
- ↑ 반면 사천지방은 이미 개발이 대부분 끝난 탓에 사회경제사에서 촉은 별로 안 다룬다. 안습
- ↑ 기원전 316년 파촉정벌로 사천 지방을 손에 놓은 진은 이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더욱 부채질 한 것이 기원전 256년 촉군태수 이빙의 관개수로 도강언 건설. 사천 지방의 주요하천인 민강의 유량을 통제하게 되면서 연례행사였던 홍수까지 사라지자 개발속도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도강언 건설로부터 불과 50년이 흐른 초한전쟁에서 사천 지방은 유방의 경제적 배후 기반이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
- ↑ 이때 건설되고 역대 왕조가 계속 보수해온 관개수로 도강언은 220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5,300㎢의 토지에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가 되었다.
- ↑ 바이두 백과가 인용한 (진양추)에 따르면, 오나라의 남녀인구가 2백30만이라고 밝혔다... 정사삼국지 촉서에 의하면 촉나라 멸망시 28만호였으므로, 100만정도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 ↑ 춘추시대 오(춘추시대)와 월나라의 영역이었고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의 영역이 된다.
- ↑ 중국을 말한다 7, 251p 여기서는 태평백전이 서진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태평백전은 촉때부터 만들어졌다.
- ↑ 유명한 팔진도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다.
- ↑ 보협은 아예 출전한 나헌에게 발렸다. 이건 농성전 변명도 안 통한다. 육항은 먼저 나간 보협이 못 뚫고 빌빌거리니 추가 병력 끌고 지원나간 것이다.
- ↑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일본에 '조공을 바친 나라'(...)로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오나라가 일본에게 조공을 바쳤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위나라에게 매년 조공을 바쳤던 것처럼 오나라에게도 매년 조공을 빌미로 접근한 것에 가깝다. 일본서기가 워낙 일본 위주로 역사가 기술되어 있기에 과거 일본과 교류했던 나라들을 어떻게 보고 기록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 ↑ 특히 강가나 습한 지역에서 창궐하는 주혈흡충이 기생충의 주요 비중을 차지했다. 오나라는 위나라나 촉나라와는 달리 고온다습하고 강이 많다.
- ↑ 주혈흡충은 유럽에 있는 빌하르츠 주혈흡충, 미주지역과 아프리카에 창궐하는 만손주혈흡충, 아시아에 분포되어있는 일본주혈흡충 이렇게 3종류인데 이 지역에서는 일본주혈흡충이 창궐했다.
- ↑ 참고로 장강 이남을 본거지로 한 왕조 혹은 정치 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사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주원장의 명 왕조와 장개석의 남경 국민정부 정도.
- ↑ 서진에서 받은 시호.
- ↑ 안습인게, 먼저 항복한 촉의 유선은 안락공으로 봉해졌는데 유선보다 더 넓은 땅과 많은 백성을 다스리던 손호는 고작 후작에 봉해졌다. 통일이 되어 꺼릴 것이 없어 굳이 유선처럼 적을 유혹하기 위해 높은 관작을 줄 이유가 없어서 그런 듯 하다.
- ↑ 근데 사실은 사마의가 흑막이었다는 묘한 반전이 나온다.
- ↑ 여몽, 주유, 손책 등
- ↑ 물론 진삼국무쌍5는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