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소

1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

오서 「종실전(宗室傳)」
손정손유손교손환손분손보손익손광손소손환

孫韶
(188 ~ 241)

후한,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자는 공례, 손하의 조카다. 자치통감에는 손하의 아들로 나와있다. 아들로는 손해, 손월, 손이가 있다.

1.1 정사

17살에 손하의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경성을 수리하고 누각과 노를 세우고 기계를 수선하여 적을 막을 방비를 했다. 손권은 초구에 있다가 단양에서 변란이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오면서 난을 수습했다. 오군으로 돌아오면서 밤중에 경성에 이르자, 시험삼아 성을 공격했다. 성의 병사들이 모두 성에 올라 방비 준비를 마치자, 손권은 손소에게 사람을 보내 싸움 준비를 그치게 했다. 날이 밝자, 손권은 손소를 그릇감으로 여기고 즉시 승렬도위를 배령케 하고, 손하의 부곡을 거느리게 하고, 곡아와 단도 2현을 식읍으로 주고, 손소가 스스로 관리를 두게 하여 옛 손하와 같이 대우했다.

나중에 광릉태수, 편장군이 되었다. 손권이 오왕이 되자 양위장군으로 승진하고 건덕후에 봉해졌다. 우리가 아는 건덕후가 아니다. 그리고 225년 광릉에서의 전투에서는 고수 등을 파병해 황제를 요격해 부차와 우개를 빼앗는 공을 세운다. 손권이 황제가 되자 진북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변경에서 십수년 간 재직하면서 병사들을 잘 길렀고 항상 경계를 지키며 멀리까지 정찰하여 적의 동정을 먼저 알고 대처했기 때문에 지는 일이 드물었다. 또 청·서·여·패의 사람들이 자못 귀부하여 서·사·강·회 지역 수백 리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손권이 무창으로 천도하자 십수년 간 조회하지 않다가 건업으로 돌아오자 조근하였다. 손권이 청주와 서주의 사정을 묻자 막힘없이 대답하여 손권이 기뻐하고 유주목을 겸임하게 하고 가절을 주었다. 적오 4년에 죽었으며 아들 손월이 뒤를 이었다.

1.2 연의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손권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화가 있다. 조조 사후 조비가 다섯 방향으로 촉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손권이 장온을 보내서 촉한과 다시 동맹을 맺었는데, 이에 열받은 조비가 동오를 공격했다. 이에 손권도 방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서성이 자진하여 국경지대로 나가서 지켰다. 헌데...(김홍신 평역판 기준)

서성이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방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 서성의 부장격으로 있던 손소가 나서며 말했다.
"오왕께서 쳐들어오는 적을 섬멸하라 하셨는데 장군께서는 왜 지키기만 하십니까?"
이에 서성이 그를 달랬다.
"맞는 말이긴 하나 위군의 기세가 가볍지 않고 선봉이 뛰어난 장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소는 물러나지 않고 계속 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소는 계속 나가서 싸우자고 했는데, 몇 번이고 그의 제안을 무시하다가 마침내 화가 치밀어서 말했다.
"네가 이렇게 명령을 듣지 않는데 어찌 전군을 통솔할 수 있겠나? 이놈의 목을 쳐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소는 사태 파악이 안 된 채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러자 손소의 부장이 얼른 말을 달려서 손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손권도 재빨리 서성의 영채로 가서 손소를 구했다. 손소가 말했다.
"저는 이 지방을 잘 아는데다 기습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에 손권은 그를 달래고 곧장 서성에게 가서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서성이 군법이라며 거절했다. 이에 손권은 그가 형님께서 사랑하시는 아이라 본래 유씨인데 손씨 성을 내려줬다는 말까지 꺼내며 결국 설득했다. 이에 손권이 서성을 데리고 손소에게 가서 용서를 빌라고 하자 손소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되려 따졌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가서 조비를 치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사죄할 수 없소."
이에 서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자 손권은 얼른 그를 꾸짖어 물리치고는 서성에게 그를 다시 쓰지 말라고 했다.

그 직후 손소는 곧장 자기 군사를 이끌고 조비를 기습하러 갔다. 서성은 화가 나면서도 손권을 위해 결국 그를 가서 도왔고, 손소는 화공[1]을 이용하여 조비를 위급한 상황에 몰아넣었고 같이 돕던 정봉장료에게 활을 쏴서 중상을 입힌다. 어쨌든 손권은 셋 모두에게 상을 내렸으니 해피엔딩.

1.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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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삼국지 12,13

손소 항목에 있는 있는 삼국시대 인물 셋 중에 유일하게 삼국지 12에 등장하였다.

연의의 용맹을 반영하였는지 통솔, 무력이 괜찮고, 나머지 능력치도 준수.인재가 넘치는 오라서 주목은 잘 못 받지만, 수명이 길어서 후기 시나리오까지 가면 손꼽히는 인재이다. 특히 오는 훌륭한 장수들이 대체적으로 요절하는 경향이 있는지라...

삼국지 3에서의 능력치는 육65수82무72지32정21매70으로 장군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만 달고 나온다. 다만 오나라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수전지휘는 높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80/78/76/65. 돌진을 보유하고 있으며 병력 숙련도가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다. 단 유독 수군계 병법는 몽충밖에 없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82/78/73/68/73의 만능형.

삼국지 11에서도 전작과 비슷한 80/79/75/69/74의 능력치. 능력치 총합으로 따지면 50위안에 든다(공동 44위). 그러나 특기가 잉여이지만...

삼국지 12로 가면서 일러스트가 엄청나게 다운그레이드 된 인물 중 하나. 잘생기지는 않았어도 11때는 나름 간지였는데 12는 인상쓴 찌질이 한명... 그래서 일러스트와 능력치랑 매치가 잘 안된다. 그래도 능력치 총합이 304에 전법이 쓸만한 전공격강화이라서 좀 좋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기동전사 건담 UC리디 마세나스로 패러디 되었다. 캐릭터 소개에 건덕후임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아 고증을 살려(?) 건담 관련 캐릭터로 설정한듯. 더 적절한 그라함 에이커도 있잖아?[2] 리디가 미남 타입이다 보니 위의 게임의 일러스트와는 달리 잘생긴 얼굴로 등장했고 설명에도 손씨 집안 내의 유전자답게 미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승상

의 승상
손소고옹육손보즐손준손침복양흥육개(左)□연장제
주거손은만욱(右)


孫邵
(163 ~ 225)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장서(長緖), 청주 북해국 사람이다.

오나라의 초대 승상을 지냈으며 정사 삼국지 오서 오주전(손권전)에는 승상으로 죽었다는 기록밖에 없다. 그의 기록은 주석으로 인용된 <오록>과 <지림>, 그리고 훗날 허숭이 편찬한 <건강실록>에 분산되어 있다.

손소는 신장이 8척으로 처음에는 북해상 공융에게 출사하여 공조가 되었고 그에게서 '조정의 인재'라고 극찬받았다. 나중에 동향 사람 유요가 양주자사로 부임하자 함께 강동으로 갔다.

손책에게 임관하여 손권이 집정하자 여러 차례 진언을 올렸다. 여강 태수를 지냈고 거기장군장사로 옮겼으며 황무 원년, 손권이 오왕에 임명되자 승상, 위원장군이 했고, 거기장군장사(車騎將軍長史)로 옮겼으며, 황무(黃武) 원년(222년) 손권이 오왕(吳王)에 임명되자 승상, 위원장군이 되었고 양선후에 봉해졌다. 사실 승상 자리에 관한 중신들의 중의는 오랫동안 손씨를 섬긴 장소에게 있었지만 당시 손권은 장소와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손소를 승상에 삼았다. 장온과 글염이 상주하자 스스로 위계를 사임하고 죄를 청했으나, 손권이 복직시켰다. 황무 4년 5월에 죽으니 시호를 숙후라 했고 후임으로 6월에 고옹이 승상이 되었다.

<지림>에 따르면 <지림>의 저자 저자 우희가 박물군자 유성숙에게 정사 삼국지에 손소전이 없는 까닭을 묻자 '<오서>의 편찬자 위소가 손소와 사이가 나쁜 장온의 당이기 때문이오'라고 답했다[3].

그런데 이것이 국역 삼국지에는 손서는 장혜서와 말도 안 나누고 손서의 전기가 없다고 되어있다. 사마소의 피휘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일단 본문에서 라는 한자를 찾지 못해서 일단 손소로 바꿔둔다. 한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아시는 분은 수정바람
吳錄曰:邵字長緒,北海人,長八尺。為孔融功曹,融稱曰「廊廟才也」。從劉繇於江東。及權統事,數陳便宜,以為應納貢聘,權即從之。拜廬江太守,遷車騎長史。黃武初為丞相,威遠將軍,封陽羨侯。張溫、暨豔奏其事,邵辭位請罪,權釋令復職,年六十三卒。志林曰:吳之創基,邵為首相,史無其傳,竊常怪之。嘗問劉聲叔。聲叔,博物君子也,云:「推其名位,自應立傳。項竣、(吳孚)〔丁孚〕時已有注記,此云與張惠恕不能。後韋氏作史,蓋惠恕之黨,故不見書。」

100만인의 삼국지에서 신일러로 등장. 전형적인 문관 능력치.

3 삼국시대 오나라의 후작

오나라의 오후
후한 오후 손책손소봉지 변경
오나라의 상우후
봉지 변경손소손봉

孫紹
(190년대 ~ ?)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손책의 아들로 서기 200년에 손책이 26세로 급사할 당시 손소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손책은 그의 동생인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손권이 제위에 오르자 오후(吳侯)로 봉해졌다가 이후 상우후(上虞侯)로 다시 봉해졌다.[4] 손소가 죽자, 그의 아들 손봉이 뒤를 이었다. 손봉은 나중에 손호 시대에 제위에 오를 것이라는 뜬소문 때문에 결국 손호에게 죽음을 당한다.

참고로 진수정사 삼국지에서 손권이 형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존한 것과 손소, 손봉에게 왕작도 아닌 후작에 봉한 것을 대차게 깠다. 하지만 이는 손권 자신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4 조선의 인물

손소(조선) 문서 참조.
  1. 조비가 올 법한 길에 갈대밭이 있었는데, 여기에 생선기름을 뿌려놔서 조비의 배가 다가올 때 불을 질렀다. 덕분에 조비는 장료가 업고 내린 덕분에 배가 타오르기 전에 구조된다.
  2. 그라함 에이커는 조모가 가져갔다. 아마 가면남 캐릭터라 그런 듯.
  3. 위소가 편찬한 <오서>는 오나라의 공식 관찬 사서로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때 그대로 인용했기에 손소의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4. 오후는 손소의 부친 손책이 후한 때 받은 칭호와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후의 '오'가 황조(皇朝)의 이름과 같기 때문인지 손소의 칭호를 바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