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삼국지)

촉서 「유이목전(劉二牧傳)」
유언유장

劉焉
(? ~ 194년)

1 개요

후한 말 익주에 자리잡은 군벌로 삼국지의 인물. 는 군랑(君郞).

유표와 더불어 한경제 사남 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이다.

2 생애

유언은 중앙 정계가 혼란하자 싫증을 느끼고 익주로 들어가 익주를 평정, 자신의 왕국으로 쌓아올렸다. 그는 익주 지역에 황제의 기운이 있다는 도참설을 믿고 익주로 이동했다고 한다.[1] 원래는 벽지인 교주를 맡으려 했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멀수록 힘을 키우기가 쉬울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건적의 난 시절에 유주자사를 지내면서 유비와 인연을 맺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유주자사를 지낸 적은 없다. 유주자사를 지낸 사람은 유우.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인자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꽤 야심이 많았던 모양[2]. 후한 말기 각종 반란과 부패, 혼란으로 엉망이 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군 태수들을 감찰하는 역할에 머물렀던 주자사를, 실권을 가진 주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그런데 본심은? 장로를 한중에 파견해 포야곡도(=야곡)를 봉쇄하여 조정과의 연락을 차단하기도 했고, 황제의 의복, 깃발 등을 대량으로 만들기도 했다.[4]원술이 선배님 할 지경

마등한수가 난을 일으켜 장안으로 향하자 이를 뒤에서 몰래 후원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난이 어이없게 실패하자 중앙에서 관직을 지내던 유언의 장남 유범((劉範)이 살해되고 황도에 있던 차남 유탄(劉誕)이 사형되고 셋째 유모는 정신병을 앓다가 죽자[5][6], 이에 심신이 쇠약해져 4남 유장에게 모든것을 물려주고 은퇴하여 시름시름하다 사망했다.

이 양반이 익주 지역의 호족들을 전부 짓밟아 놓은 탓에,[7] 에 비해 촉한은 호족보다 외부 세력이 대부분인 중앙정권이 강한 모습을 보인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유언, 유장을 촉한 정권의 선구적 통치자로 보아 촉서에 배치하였다.

이후 중국사의 중세라 할 수 있는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호족들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기능한 것으로 볼 때, 촉이 패권을 잡았으면 중국사의 향방이 크게 바뀔 수도 있었겠지만 애시당초 어려운 일이다. 체제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중앙집권 하에서 당시 촉의 우두머리인 유선막장으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3 미디어 믹스

3.1 삼국지 시리즈

유언(삼국지 시리즈) 항목 참조.
  1. 결국 황제나오기는 나왔는데 유언은 아니었다.
  2. 위에 서술된 도참설을 믿고 익주로 이동한 일도 그렇고, 오의의 여동생이 고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그녀를 아들 유모의 부인으로 맞이한 것에서도 야심을 엿볼 수 있다. 현실은 익주 지역의 황제의 기운을 받고 오의의 여동생을 귀하게 만든 것은 유비였지만.
  3.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긴 했는데, 목과 자사는 완전히 대체된 것이 아니라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자사는 명예직 정도로 취급된 것이 아닐는지? 예: 기주 원소(하북 최강 리즈 시절), 예주자사 유비(조조에게 망명해 있던 시절).
  4. 형주를 맡고 있던 유표가 이를 조정에 고자질하였다. 그런데, 유표도 실은 똑같은 짓을 하고 다녔다. 누가 누굴 나무라는가
  5.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유언은 도참설에 심취해있었고, 오의의 여동생이 귀인이 될 상이라는 관상이 나오자 그녀를 아들 유모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유모는 얼마안가 죽었고, 먼 훗날 유비가 익주로 들어와 과부가 된 오의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황제에 즉위했으니, 오의의 여동생은 목황후가 되었다. 결국 예언들을 맞아 떨어졌으나, 유언이 바라던 형태는 아니었던 셈이다.
  6. 다만 이러한 예언들의 진실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데, 이를 기록한 진수 자신이 익주에서 성장했고,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초주 역시 도참설의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7. 다만 제대로 다 정리하기 전에 저 세상가는 바람에 유언 사후 익주는 유언이 끌어들인 동주병과 토착 호족, 북쪽의 강족과 저족, 남쪽의 만족이 뒤엉켜 어지러웠다. 이후 유비가 들어오면서 대부분 평정하였으나 유비가 자리를 비우거나 했을 때는 조금씩 소동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