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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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미도의 역대 장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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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魯
(? ~ 216년?)
1 개요
후한 말 오두미도의 교주이자 삼국지의 인물. 자는 공기(公祺). 그 공기가 아니다
2 생애
2.1 신흥 도교 교단의 교주
패국 풍현 사람으로 후한(後漢) 말에 장로의 조부인 장릉(張陵)이 서천(四川) 지방에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창시하였고, 그 후손인 장로는 교주가 된다.
오두미교라는 것은 이들이 병자를 치료할 때 쌀을 받았는데 그 양이 다섯 말이라 붙은 이름이라 한다. 원래 이런 식으로 병을 고치는 일로 시작한 것이 점차 종교화되어 장로에 이르러서는 종교 왕국에 가깝게 되었다.
2.2 한중의 군웅
장로는 일찍이 유언(劉焉)에 의해 독의사마로 임명되고 별부사마 장수와 함께 한중태수 소고를 쳐서 한중을 손에 넣었다. 또 장수를 죽이고 그 무리를 거두었으며 유언의 명으로 한중을 지키며 한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을 끊고 조정의 사자를 살해했다.
그런데 유언이 죽고 그의 아들 유장이 뒤를 잇자 그를 따르지 않았는데, 이에 유장은 장로의 어머니와 식구들을 모조리 죽이면서 방희 등을 파견해 장로를 공격했지만 장로는 항상 이겼다.
이 때부터 장로는 한중에서 완전히 독립해 한중의 이름을 한녕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사군(師君)이라 칭했으며, 가장 아래에 있는 제자를 귀졸(鬼卒), 신자를 간령(姦令)·좨주(祭酒) 등으로 불러 한중과 파 지역에서 제정(祭政) 일치의 종교 왕국을 세웠다.
좨주는 백성을 가르치고 병자에게 자기 과실을 털어놓게 했으며, 의사(義舍)를 설치해 쌀과 고기를 공짜로 의사 안에 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했다. 범법자는 세 번 용서한 후에 처벌했는데, 이렇게 해서 관리를 두지 않고 좨주들로써 잘 통치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장로를 정벌할 수 없어 진민중랑장 겸 영 한녕태수로 봉해 단지 공물만을 받았다. 백성이 땅에서 옥으로 된 인장을 얻어 사람들이 장로를 한녕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장로는 공조 염포[1]의 반대 의견을 따라 이를 거부했다.
건안 16년(서기 211년), 승상 조조는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하고자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수, 마초 등 서량의 군벌들은 자신들을 토벌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동관까지 나아가서 조조와 싸웠으나 패퇴했다. 이 때 관서 사람 수만 가(家)가 자오곡을 넘어 장로에게로 달아났는데 정은, 후선, 이감은 마초와 함께 조조와 싸웠다가 패해 이감은 죽고 정은과 후선은 장로가 있는 한중으로 도주했다.
마초는 양주(서량)에서 다시 일어섰으나 양부에 의해 결국 패배하고 장로에게 의탁했다.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로 임명하고 딸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반대하는 말이 있어 무산되었다. 장로는 마초의 청을 받아들여 병사를 주어 양주를 회복하게 했으나 이득이 없었다. 마초는 장로가 함께 일을 꾸미기에는 부족하였으므로 근심하다가, 장로를 떠나 유비(劉備)에게 귀순한다.
2.3 조조에게 항복
건안 20년(서기 215년), 조조는 한중(漢中)을 공격하였다. 장로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그의 아우인 장위가 따르지 않아 장위와 장수 양앙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평관에서 저항했다. 양평관이 함락되자 투항하려 하였으나, 염포의 의견에 따라 파중으로 후퇴해 항거하였다. 떠날 때 측근에서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고 떠나기를 원했는데 장로가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다.'라고 하고 창고를 봉해 놓고 떠났다.[2]
조조는 한중을 점령한 후, 한녕군이란 이름을 옛날의 한중군으로 되돌리고 군현제로 바꾸어 관리를 파견했다. 11월에 마침내 장로는 드디어 조조에게 항복했다는데 조조는 장로의 본의가 저항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창고를 태우지 않은 것을 높이 평가해 장로를 매우 칭찬하였고 열후에 봉하였다.
말하자면 제후. 한중군 총위임권을 주어 정식으로 다시 한명의 군웅으로서 임명한 것. 장남과 주군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부하를 죽인 완의 장수도 태수로서 그대로 통치하게 한 일 등으로 봤을때 조조가 대인배적인 것도 있지만 점령 직후 곧바로 적의 총수를 이렇게 대우하는 일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조조는 사람을 보내 장로를 위로하고 진남장군에 임명하고 빈객의 예로 대우했으며 낭중후로 삼아 식읍 만 호를 주었다. 또 장로의 다섯 아들과 염포를 열후에 봉했고 딸은 자신의 아들 조우의 아내로 삼았다. 순순히 항복했기에 용호산 일대를 식읍으로 받고 교단도 존속되었으며 이 후 용호산은 오두미도의 본산이 된다. 이후 삼국시대, 서진, 남북조시대까지 살아남아 천사도로 발전한다.
2.4 사후 및 후사
정사 삼국지에는 장로의 사망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육조시대 송나라 사람 허밀이 쓴 <진고>에는 건안 21년(서기 21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림에 따르면 위나라 장로에게 열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말했다.
장씨 집안의 열 마리 용은 학문이 깊고 고상하며 온화하고 공손하다.
시호를 다시 내려 원후(原侯)라 했으며 그의 작위는 아들 장부가 뒤를 이었고 오두미도 종단은 또다른 아들 장성이 뒤를 이었다. 또 감로 4년(서기 259년)에 일어난 홍수로 무덤이 침수되어 관이 열렸는데 시신이 여전히 썩지 않아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요즘은 하도 방부제를 많이 먹어서 개나소나 시신이 잘 안썩지만 당시로서 시신이 안썩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시해선인가?
여담으로 그의 사위가 된 조우는 장로의 딸 장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조환을 낳았다. 조환은 위나라 5대 황제 조모가 사마소와 싸우다가 살해되자 사마소에 의해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되었는데 장로의 외손자가 황제가 된 것이다. 또 마초의 입장에서는 조조, 양부와 더불어 충분히 원수가 될만한데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하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 후 마초가 남기고 간 마초의 아들 마추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 또 마초의 첩이었던 동씨는 염포의 부인이 되었다.
3 도교
천사도에서는 장천사(張天士)라 불리며 신격화 되어 있다.
삼국지연의만으로 보면 그저 그런 3류 군웅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실제로 묘사도 딱 그 정도이다. 하지만 장로는 도교의 발달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용호산에 봉해지며 현대까지 연결되는 천사도의 기틀을 닦았으며, 한중에서는 '도교에 기반을 둔 종교 국가'라는 독특한 정치적 실험까지 시도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현대 교단 종교로서의 도교의 원류는 삼국시대에 형성된 태평도와 오두미도의 양갈래로 보는데 태평도의 경우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으므로 초창기 도교의 연구에 있어선 비교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오두미도의 중요성은 매우 크기때문에 도교를 연구하는 입장에선 장로의 비중은 매우 크다.
거기다 장로가 항복하여 중원으로 이동한 뒤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태평도의 신자들과 교리를 흡수했으므로 태평도연구에 있어서도 오두미도의 자료가 큰 역할을 하므로 다시금 장로의 이름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현대 중국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고 또 그 기원을 연구한다면 웬만한 삼국지연의의 군웅들은 비교불가능한 비중을 가진다. 단일 인물로서 장로와 버금갈 법한 것은 진짜로 신이 된 사나이 관우 정도.
중국사 전체에서 삼국시대를 보는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구품관인법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것이 오두미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4 미디어 믹스
- 장로(삼국지)/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