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의 딸에 대해서는 정유라(승마선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柔軟
부드럽다는 뜻이다. "신체가 유연하다" 등의 용례가 있다.
2 有鉛
납이 들어간 제품을 가르치는 뜻으로 쓰인다. 납이 들어간 휘발유를 유연휘발유라고 부른다.
3 柔然
몽골의 역사 | |||||
고대 | 중세 | 근현대 |
고대 몽골의 역사 | |||||
몽골 고원 | |||||
동호 | |||||
흉노 | |||||
정령 ㆍ 고차 ㆍ 철륵 | 선비 | ||||
유연 | |||||
돌궐 | |||||
위구르 제국 | |||||
거란 | 실위 |
서기 4세기와 6세기 초까지 지금의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목민족으로 선비관련 , 더 깊이 파면 동호계열 민족이다. 본래 탁발부에 부속되어 있다가 북위가 건국될 즈음에 이르러 독자 노선을 탔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화북 지방을 통일한 탁발부 선비족의 북위와 싸웠으나, 북위의 강성한 힘에 눌려 후대의 정복왕조를 세운 거란이나 여진, 몽골족과는 달리 그다지 큰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특히 북위의 전성기인 태무제 시절에는 그야말로 샌드백 수준이었다. 영토만 보면 왠지 엄청 강할 것 같은데 실은 역대 몽골 지역의 통일 왕조 중에서는 거의 최약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북위와는 같은 선비족 계통임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 사이였다. 중국 사서에는 연연(蠕蠕)이라고 적혀있는데, 벌레가 꿈틀거린다는 뜻으로 이들을 벌레로 취급하며 멸시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무렵, 자신들에게 복속되어 있던 돌궐족의 반란으로 멸망했다.이 캠프파이어의 이름은 유연국이야
유연의 왕족에게 쓰이는 성씨는 욱구려(郁久閭)이다.
이전과의 유목민족과 달리 튀르크계열 유목민족들의 수장 칭호인 가한을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했다.[1]
3.1 유연 = 아바르족 설
일설에 의하면 돌궐에게 멸망당할 때, 살아남은 유연족의 잔당들이 멀리 서쪽인 동유럽으로 달아나 아바르라는 이름으로 8세기까지 맹위를 떨치며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고 슬라브족을 지배하는 동유럽의 강국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유목민들의 경악스러운 생활범위를 보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유연 = 아바르라 보기엔 장애물이 좀 많았다. 아바르 족이 융성했던 헝가리 땅과 유연이 패주한 서역의 끝, 사실 카스피 해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 곳 사이엔 유연을 쓸어버린 돌궐도 꽤나 주의해서 복속시켜야 할만큼 강한 부족들이 많았고(오구즈,사바르 등) 결정적으로 카르파티아 분지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인 다뉴브 강 유역을 지배하던 민족은 훈 제국의 직계를 자처하던 우티구르 족이었다. 우티구르 족은 쿠브라트 대에 하자르 칸국에게 갈려나가기 전까지 이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았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유연의 패잔병이 아바르라는 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아리안 계 스키타이 족 = 아바르 족이라는 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설이 맞다면 유연 멸망 이후 일부 유연인들이 고구려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인다....만 이것도 동로마 측 사서에 등장하는 뵈클리라는 세력이 고구려가 확실하다는 전제가 성립될 때의 이야기.
4 劉淵
오호십육국시대 전조의 역대 황제 | |||||
초대 고조 광문황제 유연 | → | 2대 양왕 유화#s-3 | → | 3대 열종 소무황제 유총 |
묘호 | 고조(高祖) |
시호 | 광문황제(光文皇帝) |
연호 | 원희(元熙, 304년 10월 ~ 308년 9월) 영봉(永鳳. 308년 10월 ~ 309년 4월) 하서(河瑞, 309년 5월 ~ 310년 6월) |
성 | 유(劉) |
휘 | 연(淵) |
자 | 원해(元海) |
생몰기간 | 251년? ~ 310년 8월 19일 |
재위기간 | 304년 ~ 310년 |
5호 16국중 전조의 창건자로 생몰년은 252년? ~ 310년로 여겨지며 재위기간은 304년~310년이다.
전조는 원래는 한(漢)나라[2]였는데, 319년 유연의 족자 유요가 조(趙)나라로 고쳤다.[3] 그런데 원래 유연과 유총의 장수였던 석륵이 동시대에 같은 이름의 조(趙)나라를 세웠으므로 먼저 세웠다는 의미에서 유연의 조를 전조(前趙),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로 구별한다. 당나라때 편찬된 진서(晋書)에서는 진(晉)나라를 정통으로 봤기에 그 당시 할거정권은 모두 본기가 아니라 재기로 기록했고 유연의 이름은 당나라 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기 때문에 피휘하기 위해서 이름 대신 자(字)로 '유원해'라고 기록했다.
유연의 자(字)는 원해(元海)이고 묘호는 고조(高祖)이며 시호는 광문황제(光文皇帝)다. 신흥(현재 산서성 흔주) 사람으로 일설에는 서하습성(현재 산서성 분양)사람이라고도 한다. 흉노족으로 남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4] 손자이며 좌현왕 유표[5]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호연씨(呼延氏)로 공신이었던 대사공 호연익은 외숙부이자 그의 사위였다.
위나라 가평(嘉平) 연간에 출생했으며, 어릴 때부터 비범했고 7살 때 모친상을 당하면서 통곡하자 이웃들이 이를 애처롭게 여겼다. 같은 종족과 부락에서 이를 탄복하고 칭찬했으며, 당시에 왕창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조문했다. 학자 최유에게 가르침을 받아 한족의 문화에 정통하고 문무을 겸비했고 삼국 시대 말기 인질로써 위나라의 낙양에 들어와 명사들과 교류했다. 서진(西晉) 초기 유표가 죽자 뒤를 계승해 흉노의 좌부수(左部帥)가 되었다. 279년에 무제 사마염의 아우였던 제왕 사마유가 인질로 있던 유연이 영웅의 자질이 있어 훗날이 두렵다면서 제거할 것을 상소했는데, 사마염은 이를 따르려고 했다가 왕혼은 죄도 없는 사람을 의혹만으로 죽이는게 도리냐고 해 사마염은 죽이지 않았고 훗날 유연은 진나라 영토를 잠식하고 그의 아들 유총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289년에 서진은 흉노 5부에 도위를 설치하자 유연은 북부도위가 되어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고 베풀기를 좋아해 마음을 기울이고 물건을 가지고 접대해 5부의 호걸들과 유주와 기주의 이름난 유사들이 대부분 그에게 가서 귀부했다고 한다. 유연은 북부도위로서 정치를 잘해서 5부 전체로부터 인정을 받아 무제가 죽고 양씨가 집권하던 시기에 5부 전체를 통괄하는 5부대도독이 되었으며, 290년에는 건위장군, 흉노오부대도독에 임명되었다.
원강 말[6]에 유연에게 속한 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요새를 빠져 나가자 관직에서 면직되었으며, 혜제(사마충) 말엽에 팔왕의 난이 격화되자 유연은 업에 세력을 두고 있던 성도왕 사마영에게 용병으로 고용되면서 사마영의 추천으로 관군장군이 되어 활동했다. 304년에 유연의 종조부이자 좌현왕 유선(劉宣)은 여러 흉노 유력자들과 은밀하게 모의해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했으며, 이 소식을 몰래 전해들은 유연은 흉노의 군대를 데리고 온다고 해 북흉노의 선우, 참승상군사로 임명되었다.
사마영을 속이고[7] 업을 빠져나와 좌국성에 도착했다. 유선 등으로부터 대선우의 칭호를 받고 20일 동안에 5만명의 무리를 갖게 되자 이석에서 거병하고 유총을 녹려왕으로 삼았으며, 좌어육왕 유굉을 파견해 정예 기병 5만을 인솔해서 사마영의 장수인 왕수를 만나 사마등을 막게 했지만 왕수가 사마등에게 패하자 가지도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사마등이 탁발의타에게 군사를 빌려 서하에서 탁발의타, 탁발의로 형제에게 격파되었다가 304년 10월에 수도를 좌국성으로 옮겨 한왕(漢王)[8]을 칭하고 연호를 원희라고 했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일찍이 진원달을 초청했지만 대답을 받지 못했다가 다시 편지를 보내 진원달을 등용했으며, 사마등이 보낸 장군 섭현이 대릉에서 공격하자 이들을 격파했다.
유요를 파견해 태원을 공격하고 현지, 둔류, 장자, 중도 등을 빼앗으며, 또한 관군장군 교희를 파견해 서하를 공격해 개휴를 빼앗았다. 교희가 개휴 현령 가혼와 그의 처인 종씨를 죽인 사실을 알고 교희의 관직을 네 등급 강등시키면서 가혼을 장사지냈으며, 사마등을 격파하고 병주를 손에 넣었다.
305년에는 이석에 대기근이 들자 여정으로 옮겨서 주둔했다가 저각에 곡식이 있는 곳으로 가면서 태위 유굉을 머물게 해 이석을 지키게 하고 대사농 복예에게 곡식을 운반해 공급하도록 했으며, 307년 겨울 10월에 석륵, 장배독, 풍막돌 등이 귀부하자 이들을 받아들였다. 오환족의 장복리도가 초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석륵이 그를 붙잡았다가 풀어주면서 그의 무리와 함께 귀부하도록 하자 장복리도가 이끌던 무리를 석륵에게 배속시켰다.
308년에 무군장군 유총 등 10명의 장수를 파견해 태행산을 점거하고 보한장군 석륵 등 10명의 장수에게는 동쪽으로 조, 위 지역으로 내려가게 했으며, 가을 7월 2일에 평양을 침략했고 포자로 도읍을 옮겼다. 겨울 10월 3일에는 황제에 올라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연호를 영봉으로 바꿨으며, 12월 5일에 종실 사람들을 군왕이나 현왕으로 책봉하면서 신하들을 전공에 따라 군, 현의 공, 후로 책봉했다.
309년 봄 정월에는 태사령 선우수지의 진언에 따라 평양을 도읍으로 옮기면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하서로 고쳤으며, 서진의 좌적노장군 유탄이 귀순해 낙양이 외롭되고 약하다고 알리자 주탄을 전봉도독으로 삼으면서 멸진대장군 유경을 대도독으로 삼아 영양을 공격하게 했다. 유경이 여양에서 이기고 거기장군 왕감을 연진에서 패배시켜 남녀 3만여 명을 황하에 빠뜨렸다는 소식을 듣자 사마씨가 아닌 힘없는 백성을 죽인 것을 듣고 유경을 평로장군으로 강등시켰으며, 왕미, 유총 등에게 호관을 공격하게 했다.
가을 8월에 초왕 유총 등에게 진격해 낙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며, 유총이 평북장군 조무를 격파했지만 의양에서 빠르게 승리한 것을 믿고 방비하지 않다가 패하자 겨울 10월에 유총, 왕미, 시안왕 유요, 여음왕 유경 등에게 정예 기병 5만명을 인솔해 낙양을 공격하게 했다. 정로장군 호연호가 진나라의 북궁순이 이끄는 군사들의 공격으로 죽고 호연익이 부하들에게 살해되자 군사를 돌아오게 했는데, 유총이 진나라의 군사는 약하니 두 장수가 죽은 이유로 군사를 돌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낙양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하자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14일에 관군장군 호연랑을 동해왕사마월의 참군인 손순이 기습해 호연랑을 죽이고 평진장군인 안양애왕 유려를 익사시켰으며, 선우수지가 지금 진나라의 기세는 왕성해 대군이 돌아가지 않으면 패할 것이라면서 신미년(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하자 유총 등을 불러 돌아오게 했다. 12월에 도호대장군 곡양왕 유현을 파견해 정북대장군 유령, 안북장군 조고, 평북자군 왕상과 함께 동쪽으로 가서 내황에 주둔하게 했으며, 왕미가 좌장사 조억을 안동장군의 업무를 수행하게 해 동쪽으로 가서 청주를 공략하게 하면서 그의 집안 사람들을 영접하겠다고 청하자 이를 허락했다.
310년에 선징의 딸을 황후로 세우고 양왕 유화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가을 7월에 유총, 유요, 석륵, 안북대장군 조국이 하내태수 배정을 회현에서 포위했다가 진에서 파견한 정로장군 송추를 석륵과 왕상이 격파하면서 하내 사람들이 배정을 잡아 항복하자 배정을 상서좌승으로 삼았다. 9일에 병이 들어 누웠다가 이희가 충성스럽고 독실했기에 임종할 때 중요한 임무를 맡겼으며, 16일에 태재 유환락 등을 불러 유언하는 조서를 내려 보정하게 했다가 18일에 죽었다.
9월 11일에 영광릉에 장사지내졌고 시호를 광문(光文)이라 하고 묘호를 고조(高祖)라고 했다.
유연은 낙양 공략을 노렸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으며, 그의 뒤는 태자이자 양왕이었던 유화가 뒤를 이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유연이 임종시에 조카이자 태재였던 유환락과 태부 유양, 태보 유연년을 불러들여 자신의 셋째아들이자 대사마, 대선우, 녹상서사였던 초왕 유총과 힘을 합쳐 유화를 보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하며, 그는 큰 뜻을 품었던 관용이 풍부했던 영걸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의 다음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후삼국지에서 유연은 유선의 일곱째 아들인 유거(劉據 또는 璩)가 개명한 인물로 나오고 있지만 정사 기록은 아니다. 4세기 흉노, 티베트계 저족이 중국 내부에 나라를 세우면서 중국의 한식 성씨을 사용했다.
5 劉延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동군태수로 조조가 원소와 대치할 때 백마에 주둔했다. 200년에 원소는 안량, 곽도, 순우경을 보내어 백마를 공격했는데, 조조는 관우 등을 보내어 유연을 구원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백마를 지키고 있다가 관우가 구해줬으며, 관우가 유비가 원소군에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서 조조와의 선약에 따라 그의 곁을 떠났다. 길을 가로막는 다섯 관의 여섯 장수를 베고 다섯 관을 지난 후에는 활주에 이르러 황하를 건너기 위해 배를 구하게 되었다.
이 때 유연을 만난 관우는 이전에 구해준 은혜를 이유로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를 요구하지만 유연은 조조의 지시가 없었고 하후돈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요구를 거절한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장수들처럼 길을 막지는 않았기에 죽지는 않는데, 관우는 황하 나루터에 이르러 지키고 있던 진기가 길을 막자 베어버리고 강을 건넌다.
창천항로에서 성을 지키다가 위험에 빠졌지만 조조가 보낸 관우가 나마하게 가면을 쓰고 전장을 휩쓸자 우리 군에 저런 장수가 있었냐고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화봉요원에서는 백마성으로 몰려드는 원소군의 군세를 보고 놀라는 모습으로 나오며, 이후 원소의 두번째 공격 때 퇴각했다고 언급된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 등장한다.- ↑ 일단 비공식적인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전에 선비족에서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 유연이 본래 선비족 탁발부에 부속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쪽이 연원일 수도 있는 일.
- ↑ 유연의 조상은 흉노족 선우였는데, 한고조 유방이 종실녀를 묵돌선우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대대로 유씨라고 자칭했다. 유연은 그래서 한나라의 후손이라는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정했던 것이다.
- ↑ 이 때문에 유요의 조나라를 조한(趙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 그의 아우는 호주천으로 5호 16국 시대에 하나라를 세운 혁련발발은 호주천의 자손이다.
- ↑ 채옹의 딸로 유명한 채염을 보쌈한 그 흉노족이다. 채염은 정실은 아니고 아마 첩실이었을 것이, 유표의 두 아들을 낳았지만 조조가 돈을 줘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원강 연간은 291 ~ 299년이다.
- ↑ 이전에 유연은 장례식 등을 핑계로 계속 떠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는데, 마침 안북장군 왕준, 병주자사인 동영공 사마등이 군사를 일으켜 병력이 필요했던 사마영에게 흉노 군대를 데리고 온다고 하자 귀국을 허락받았다.
- ↑ 유연의 선조 묵특이 한고제와 화의를 맺을 때 형제가 된 기념으로 유씨를 칭했다. 그래서 자기는 유씨라서 멸망한 한(전한과 후한)나라의 뒤를 잇고 병주를 얻어 한인들을 통치한다는 이유로 한나라라고 칭했다. 이것은 나중에 유요가 조나라(전조)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