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赫魯
1851.3.9 ~ 1945.5.15
그는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의 영향을 받아 개화파가 되었다. 또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에 들어가 급진적인 개화를 주장하였다.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수구파, 온건개화파 인물들을 제거한 뒤 개화당 내각에 들어갔으나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정난교, 이규완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의 암살계획을 알아채고 그들에게 알려 암살을 열심히 막았다. 그러나 결국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로 가다가 암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하여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들어가 개혁을 주도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10년 이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참고로 그의 일본식 이름은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그는 1945년 94세까지 굉장히 오래 살다가 죽었다. 사망 원인은 노환에 뇌일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