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화파 정치인, 자치권 운동가
모범적이며 선량한 친일파[1]
李圭完 1862.11.15. ~ 1946.12.15.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 무신, 군인, 개화파 정치인이자 일제 강점기 때는 민원식과 함께 참정권, 자치권 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그는 1910년 한일 합방 직후부터 참정권과 자치권 운동을 주도했다. 임영대군의 15대손이다.
오래전에 몰락해서 광주군 남종면에서 살다가 아버지 때는 뚝섬에서 나무꾼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그는 소년시절 박영효를 찾아가 그의 식객으로 생활했다.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서재창 등과 함께 정변군의 지휘관이었고, 검술 실력이 뛰어나서 민영익 등의 귀를 칼로 베었다 한다. 특히 이완용, 송병준 등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불알 간수 잘하라고 농담하면서 수근댔다.
1907년 순종에게 조선 최후의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됐는데,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후 그대로 조선총독부의 강원도 도지사에 유임되면서 최초의 강원도 도지사가 되었다.
친일파로 등재되어 있는데, 실제 일제강점기때 도지사 등의 고위직을 지낸 것은 맞으나, 조선인 참정권 및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경술국치 직후에 주장한 내용으로 3.1운동 이후 친일반민족 행위자들과 문화통치를 사용하는 총독들, 40년 이후 총독부에서 민족분열정책 및 전시활동참여 장려의 일환으로 사용된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내용이며, 그의 활동으로 짐작해보면 연방국처럼 민족은 다르지만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나라를 구성하는 체계를 생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 여성들의 인권향상을 주장하였고 다른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이 흔히 보인 탐욕적이고 조선인들을 탄압하던 것과는 다르게 일상생활에서 성실하였으며 악습근절에 앞섰고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거기다 창씨개명, 병력동원, 공출, 일제를 위한 군수물자 지원 활동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전쟁관련해서 참여한 것은 조선인 참전병사 위문품 후원회 및 원조처럼 순전히 조선인과 관련된 활동에만 참여하였다.
다만 조선인들이 악질적인 구습을 타파하지 못하였고 나라를 충분히 발전시키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합병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독립운동에 대하여 현실성이 낮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3.1 운동 당시 평안도의 최고직위에 있었으나 독립운동에 반대한다는 경고문을 붙이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스스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니 경고망동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고, 자신은 나라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에는 미군정 관계자들은 물론 이승만의 특별조문단 이기붕, 윤치영 등과 김구의 특별 조문단 이외에도 강원도지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어있는 사람이기에 과연 선정이 공정하였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될만한데 아직까지 유명세가 낮기 때문에 그리 큰 논란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다만, 후에 이 사람이 유명세를 얻게된다면 충분히 여러 말이 나올 수가 있다. 특히 장례식 당시에 독립운동가의 거대한 축이였던 김구와 이승만이 조문단을 보낼 정도라면 최소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지 아니하였던 것은 분명하고, 해방 이후에 암살시도와 투석, 수많은 비난이 이어졌던 윤치호와는 달리 오히려 임시 강원도지사를 맡는 등 명망이 높은 것으로 보면 반민족행위가 있었는가는 의심스럽다.
더구나 본인은 독립운동한 거 없다고 하지만,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활동 자금을 보낸적도 있으며#, 이 때문에 사후에 이승만이 조문단을 보냈던 것[3]. 특히 이승만은 이규완 사후인 1953년 그의 차남 이선길에게 신신백화점 부지 및 주변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해주겠다 제안하였으나 이선길은 도가 지나친 호의라며 이를 거절했다.
물론 이 사람이 괜찮았다고 나머지 친일파들의 친일행적이 옹호받는 것은 아니다. 직위가 높았으나 행적에서는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매우 강하게 보였고 일제의 동화정책 및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특이한 경우가 있고 단순히 직위만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기엔 무리있으며 실제 행적을 충분히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행적으로 보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 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1.1 관련 일화
소탈하고 호방한 성격이라 여러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김옥균, 박영효 등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때 나이와 신분, 위상에 따라서 잡일을 시켰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은 나이가 많고 사회적 위상이 높다는 이유로 유혁로, 이규완, 서재필을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이때 이규완이 분노하여 "어찌 조선의 폐단을 바로잡겠다는 자들이 조선의 악습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가?"라고 일갈하였고 시중을 받던 이들이 부끄러워 사죄하였고 각자의 일은 각자가 하도록 하였다.
시위대 병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병영으로 복귀하던 도중 나뭇짐을 짊어진 사내를 만났다. 지친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군장을 떠넘기며 "이것도 나라를 위한 일이오."..라며 변명을 댔다. 그러다 사내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사내 曰, "연대장 관사 옆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병사들이 알기로 연대장 관사 옆은 이규완 장관 관사 뿐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장관댁 머슴이요?"라고 물으니 사내는 "아니, 내가 장관이오."...라고 대답했다. 기겁한 병사들이 바로 군장을 내리고 사죄하려 했으나, 이규완 장관은 "이것도 나라를 위한 일 아닌가."...라면서 병영까지 마저 날라 주었다고 한다.
일본인 사업가의 부인이 집 근처를 지나가던 추레한 행색의 조선 노인을 불러다가 심부름을 부탁했다. 시장에서 물건 몇 가지 사오면 심부름값을 주겠다고 해서 노인이 쾌히 수락하여 심부름을 해줬는데, 이 여자는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심부름값도 주지 않았다. 노인이 이에 항의하여 밥 한술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항의하자 여자는 할 수 없이 노인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남편과 하인들을 불러다가 몰매라도 때릴 작정이었는데, 남편이 노인을 보고 깜짝 놀라 넢죽 엎드렸다. "아이고 장관 나리께서 저희집엔 웬일이십니까?" 부인은 몰랐지만, 남편은 노인, 아니 이규완 장관과 안면이 있었던 것.
그는 며느리가 될 사람, 사위가 될 사람을 볼 때 집안 문벌이나 형식적 예의 보다는 성실성, 성공 가능성 여부가 있는가 없는가 여부를 보고 골랐다. 이규완은 아들이 결혼하면 결혼식 다음날 반드시 밭에 데리고 나가 가래질을 시켰다. 그의 며느리들 중에는 당시 고등여학교를 나오고 교사를 하거나 상류층의 여자라 해도, 셋 이상이 협동해야 일이 잘 되는 일을 시켜 서로 협동하는 일을 시험했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넷째 며느리가 왔을 때는 가래질할 철이 아니어서 이규완은 새로운 넷째 며느리에게 나흘 동안 계속하여 돌담을 쌓게 했다.
이규완은 공무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개간에 힘썼다. 개간을 하고 보니 여름에 물이 부족할 듯 싶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마침 분가한 아들의 집을 저수지 뚝 위에 지었다. 아들이 "홍수에 뚝이 무너지면 큰일이잖습니까?"라고 울상을 짓자, 이규완은 "큰일이지,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뚝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젊은이가 돈을 모으는 방법을 묻자 그는 오락하지 않고, 유흥에 빠지지 말고, 도박하지 않는 것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 답하였다. 그러면서 “야구란 미친 짓이야. 그런 짓 하는 놈은 나중에 실업자 되지. 이상한 유희는 할 생각을 말고 퇴근하면 청소부터 하고, 과수원도 가꾸라”고 하였다. 이규완은 술과 담배를 시간을 허비하는 미친 짓이라고 조롱하였고, 게임, 스포츠, 오락, 도박 등을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규정하였다.
손자가 마당에 다알리아 꽃을 심으려 하자, 이규완은 "그거 심지 말고 도라지 꽃을 심어라. 도라지는 꽃도 보고 뿌리는 반찬과 약으로 쓸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라고 하였다. 그는 상당히 구두쇠라서 사소한 나무 토막, 목재라고 해도 쓸 데가 있다고 보고 함부로 버리지도 않았다.
1.2 백수 혐오증
이규완은 남자 백수, 니트족을 상당히 미워하고 혐오 하였다. 남자 백수들은 전통적인 남성관에 의거, 얄짤 없는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아왔다. 이규완 역시 별 다르지 않았다..
2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李圭完 1901.06.15. ~ 1961.05.07.
경기도 안성군 출신으로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3.1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발생하자, 여기에 호응하여 시위대 1천여 명을 모아 원곡면과 양성면 일대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면사무소와 경찰서, 우편취급소 등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1921년에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산부인과 의사이자 대학 교수
李揆琓 1947 ~
4 기업인 겸 충북도의회 의원
李揆完 1953 ~
충청북도 옥천 출신 기업인이자 충청북도 도의원.- ↑ 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언행과 실제 행동 모두 다 친일파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머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괜찮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 사람이 가장 나은 경우일뿐.
- ↑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같이 말이다.
- ↑ 위키디피아에 상해 임시정부에도 자금을 송금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인이 되진 않고 있다.
- ↑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이광수 등은 나중에 민족주의를 버리고 일제에 적극 협력하였으니 민족주의 노선을 포기한 것이고 이규완은 민족주의 노선을 끝까지 지킨 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보아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