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성

1 대한민국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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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모비스 피버스 No. 43
이대성
생년월일1990년 5월 30일
국적한국
출신지경상남도 김해시
출신학교삼일상고 - 중앙대학교 - 브리검 영 대학교
포지션슈팅 가드 / 포인트 가드
신체 사이즈193cm, 85kg
프로입단2013년 드래프트 11번(울산 모비스 피버스)
소속팀울산 모비스 피버스(2013~ )

울산 모비스 피버스 소속의 농구선수.

1.1 아마시절

임호중 시절에는 포지션이 포워드였으나 고등학교 및 중앙대를 거치며 가드 포지션으로 역할이 바뀌었고, 가드 중에서도 주로 2번인 슈팅 가드를 보았다. 브리검영대 재학 이후 본인의 희망 및 요청으로 1번 포지션을 맡게 되었다. 삼일상고에서는 유망주 포워드였지만 중앙대학교에 진학한 후 기라성 같은 선배들(김선형, 함누리등)에 밀려 제대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여러 부상이 겹치면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 고교시절 인연이 있던 에이전트를 통해 미국 진출을 모색하였고 몇몇 캠프를 거치다 NCAA 디비전2에 속해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BYU Hawaii)에 편입하였다. 그리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으나 발목부상에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는 못했고, 중앙대학교 3학년때 잠깐 출전한것이 문제가 되어 당초 2년을 계획했던 브리검영 대학생활은 1년으로 그치게 되었고, 국내로 U턴후 KBL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

1.2 프로 생활

2013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 2라운드 1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하였다.

일반적인 농구선수들이 대학에서의 적응 후 프로 입단 과정을 거치는데 비해, 중앙대를 중퇴하고 미국 하와이에 있는 브리검영대에서 1년동안 미국 농구를 경험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드래프트 참가 전부터 한국 특유의 팀플레이 농구에 과연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 섞인 시선을 받았다.

시즌 초반 모비스에서는 적응기간을 고려 출전 시간이 많지 않았으나, 주전가드 양동근의 백업으로 기대를 모았던 상무 복귀 선수 김종근이 기대 이하의 활약을 펼치자 백업선수로 출전비중을 서서히 늘리기 시작했다.

2013년 11월 16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홈경기에서, 주전가드 양동근이 돌파 중 착지하는 과정에서 상대 가드인 주희정의 발을 밟아 양쪽 발목에 부상을 입었고, 이에 대체선수로 낙점되어 이후 일시적으로 모비스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경기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SK-LG-KCC전을 내리 3연패 하긴 했지만 준수한 드리블과 돌파능력, 슛팅능력을 보이며 특히 KCC전에서는 34분 14초간 출전하여 25득점 4어시스트 4스틸을 기록하는 등, 상대 팀 가드인 2순위 특급신인 김민구 못지 않은 활약을 보이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양동근이 빠진 최근 5경기에서 12.8득점, 5.2어시스트, 2.5리바운드, 1.8스틸을 기록하는 등 타 팀 주전 포인트가드 중에서도 상위권의 성적을 보이고 있다.

양동근의 복귀 이후에도 주전 슈팅가드와 백업 포인트가드를 두루 담당하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신인왕에도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2014년 2월 16일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경기 중 덩크를 시도했다가 발목 부상을 입었다. 이후 남은 정규시즌은 전혀 출장하지 못했으나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결승 무대에 부상을 입은 채로 복귀, 상대 주포인 문태종을 적극 수비하며 나름대로 2연패에 기여했다.

유재학 감독이 2014 스페인 농구월드컵의 국가대표 후보 명단에 이대성을 선발했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과 신장과 기술을 갖춰 선발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견으로 갈렸으나, 얼마가지 않아 치유되지 않은 발목 부상 탓에 탈락했다.

2014-15 시즌에는 부상입은 발목에 뼛조각이 자라 복귀가 늦춰져 12월 말에 복귀전을 치뤘다. 몸도 만들어져 있지않고, 긴부상에 따른 후유증인지 데뷔 시즌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2년차 시즌을 엉망으로 보낸 탓에 상무 지원을 늦출 것으로 예상했으나 상무에 지원, 합격했다. 15년 4월 27일 상무에 입대했다.

상무에서의 1년차에는 다쳤던 발목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으며, 두터운 상무의 가드진 속에서 많은 출전 시간을 가져가지는 못하고 있다. 부상이 완쾌되고, 이관희, 변기훈 등이 전역하면 좀 더 기회가 있을듯하다.[1]

2년차가 되어서는 예전의 폼을 되찾은 듯 프로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연일 20득점을 넣는 등 상무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2016프로-아마최강전에 출전하여 KCC를 상대로 공식경기 최초로 덩크슛도 성공시키는등 대회 덩크슛 3개를 성공시키며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냈다. 최부경, 김시래와 함께 주력으로 활약하며 차기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1.3 플레이 스타일

193cm에 85kg의 건장한 체격으로, 국내 농구 특성상 키가 193cm가 넘어가는 가드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강점이 있다. 체구도 크지만 타고난 통뼈라 유재학 감독과 양동근에 의하면 힘이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2][3] 큰 체구에 비해 드리블 능력도 준수한 편으로, 상대의 압박수비에도 혼자서 드리블을 통해 빠져나오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강점은 드리블 및 돌파능력과 큰 체구에서 나오는 대인방어이다. 유재학 감독도 이 능력 때문에 국대에서 필리핀 등 잘하는 가드들을 막게 하겠다는 의도였다.

여러모로 강점이 많은 선수이긴 하나, 지나치게 볼을 길게 소유하고 가끔씩 무리한 플레이를 보이는 단점이 있다. 감독인 유재학으로부터는 '팀파울이 몇 갠지도 모르고 농구를 한다'라는 따끔한 훈계를 들었다. 다만 개인기술 및 대인방어수비에 있어서는 칭찬에 인색한 유재학 감독조차 리그 상위권이라고 인정해 주는 등 차세대 모비스를 이끌어갈 주전가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양동근이 데뷔 초반 얼마나 감독에게 혼이 났는가를 상기해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화려한 기술과 좋은 운동능력에 비해 득점 성공률은 저조하다. 3할정도의 3점과 4할에 못 미치는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했는데, 다소 경직된 인상의 슈팅폼으로 3점슛은 기복이 있고, 미드레인지에서 풀업 점퍼는 확률이 낮다. 플로터와 같은 기술이 없어서 골밑에서의 득점루트가 한정적인데, 그나마 쉬운 레이업 찬스에서도 미스가 잦다. 리키 루비오 팬이라더니 안좋은걸 배웠다 수비에서도 대인방어와 오프볼에서의 수비는 뛰어나지만 2:2 게임에서의 스크린 대처는 매우 좋지못하다. 다만 이러한 평가는 이대성에게는 다소 변명거리가 있는 것이, 제대로 된 출장시간과 몸상태로 뛴 경기가 루키시즌 양동근 부상 후 ~자신의 부상전의 경기에 불과하기 때문. 상무제대이후 이러한 지적을 극복 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할 부분이다.

또 한가지 특징이라면, 체이스다운 블락을 많이 시도한다.

1.4 여담

  • 브리검영대 켄 와그너 감독은 모비스 유재학 감독이 과거 선수 은퇴 후 미국으로 코칭스태프 연수를 갔을때 친분을 쌓은 관계로, 유재학 감독은 이대성이 브리검영대 재학 중일때 간간히 와그너 감독과 연락을 하며 이대성에 대한 정보를 묻곤 했다 한다. 모비스 입장에서는 미리 염두에 두고 있던 선수를 영입하게 된 셈.
  • 미국 진출 전 한 인터뷰에서 제레미 린을 이길 수 있다고 호기로운 인터뷰를 해[4]팬들 사이에서 건방지다/자신감 있어보인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후에 라디오에 나와서 그런 의도로 말한게 아니였다고 밝혔다.
  • 10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동생도 농구선수로 뛰고 있으며[5]드래프트에서 '동생에게 자랑스러운 선수가 되겠다'고 인터뷰를 해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2 대한민국코미디언

李大成
1936년 8월 3일 ~ 2010년 9월 11일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본명은 이용직이며, 1936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에 악극단 낙랑극단의 단원으로 들어가 악극단 활동을 하였다가, 1970년, KBS 2TV의 전신인 TBC 동양방송신인 코미디언으로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1960년대 악극단 낙랑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여 극장식 식당 등지에서 재밌는 입담으로 풍자를 주었으며, 1970년 현재의 KBS 2TV의 전신격인 TBC 동양방송 코미디언 오디션을 통해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였고 이후 MBC로 이적하여서 코미디 프로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당대의 동료 코미디언들이자 선배격들인 구봉서, 배삼룡 등과 함께 활동하며 전성기를 누볐다. 당시 70, 80년대상 수려한 외모를 가진 영향 때문에 미남 코미디언으로 불려웠고 다양한 표정 연기와 풍자를 만들어내며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전성기를 누비던 중 간경변 증세로 인해서 코미디계를 은퇴하여 이후로는 근황 없이 일반인으로 지내 오다가 2010년 9월, 식도암 발병으로 치료를 받던 중 그 해 만 74세(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70, 80년대를 살아온 입장에서는 이대성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지만 식도암 발병으로 인해 코미디를 은퇴한 후인 90년대 이후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이후 세대들은 아예 그가 코미디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사망하게 된 이후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
  1. 지금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양동근 역시 상무에서는 부상 회복에 전념했고 최진수도 상무에서 웨이트를 늘리고 어깨 부상을 치료했다.
  2. 양동근도 힘이 좋은 선수로 유명하지만 이대성과 사이즈에서 차이가 나는 편이다.
  3. 유재학 감독이 이대성을 국대에 데려가고 싶어 했던 이유이다. 국내에서 나름 한다는 가드들이 국제대회에서는 상대 가드들에게 운동능력부터 피지컬까지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대성은 피지컬이 타고난 선수라 그 선수들 수비가 가능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
  4. [1]당시 제레미 린은 린세니티 돌풍을 일으키는 중이였다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