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지트 조약

Frieden von Tilsit (독일어)[1]
Treaties of Tilsit (영어)
Traités de Tilsit (프랑스어)


본격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나폴레옹 얼굴 일그러진거 봐

1 개요

1807년 나폴레옹이 동프로이센(Ostpreußen)의 틸지트(Tilsit)에서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과 맺은 평화 조약. 보통 하나로 뭉뜽그려 틸지트 조약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두 가지 조약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프랑스-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며 다른 하나는 프랑스-프로이센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은 중부유럽에서의 패권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으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나폴레옹의 리즈시절. 이 평화조약은 러시아 원정을 통하여 무효화 된다.

2 배경

1807년 6월 14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을 프리틀란트(Friedland) 전투에서 말 그대로 발라버린다. 프리틀란트 전투 이틀 후 프로이센 왕국의 옛 수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가 프랑스의 수중에 떨어지고 버틸 수가 없게 된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한다.

3 진행

러시아에게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나폴레옹은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러시아 사절단에게 취했고[2], 이에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 직접 평화교섭을 진행할 것을 결정한다. 틸지트에서 만난 양국의 황제는 몇일간 서로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양국 군대를 나란히 사열하고, 연극을 보고[3], 문학에 관하여 논하면서 친목질 우애를 다졌고 최종적으로 7월 7일에 양국 사이의 강화가 조인된다.[4] 그리고 이 때 알렉산드르 1세가 보여준 우애에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완벽히 자신의 영향력에 들어왔다고 므흣해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대륙봉쇄령 당시 제대로 러시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된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와는 달리, 나폴레옹은 외무장관 탈레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강화조건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상대할 여력이 없던 프로이센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폴레옹의 강화조건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민족주의 성향과는 거리가 먼 현대의 사학자들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에게 강요한 조약안을 '관뚜껑에 못박기'라고 말할 정도이니(...) 어쨌든 그리하여 7월 9일에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도 평화 조약이 체결됐고 프랑스 혁명전쟁 이후 10년 넘게 총성이 끊이지 않던 중부 유럽에 간만에 평화가 찾아온다.

4 조약 내용

4.1 프랑스 - 러시아 간의 강화

  •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가한다. 그 대신 프랑스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공략하는 것을 지원한다.
  • 러시아는 영국과 스웨덴에게 전쟁을 선포할 것.[5]
  • 러시아는 왈라키아[6]몰도바에서 병력을 철수한다.
  • 러시아 해군이 점령한 그리스의 로니안 섬을 프랑스에게 넘겨준다.
  • 프랑스는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주권을 존중한다.[7]
  • 차르의 여동생과 나폴레옹의 혼인.[8]

4.2 프랑스 - 프로이센 간의 강화


노란색, 주황색, 하늘색, 분홍색이 틸지트 조약 이전 프로이센의 영토. 그리고 주황색이 틸지트 조약 체결 이후 잔존한 프로이센의 영토. 한마디로 영토의 절반이 날아가버렸다. 망했어요

  • 엘베 강 서부 영토[9]에서 새로이 베스트팔렌 왕국을 건설. 새로 건국된 베스트팔렌 왕국에는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가 임명.
  • 2차, 3차 폴란드 분할 과정 당시 차지한 폴란드의 옛 영토는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부활.
  • 프로이센의 상비군은 4만3천명으로 그 규모가 제한된다.[10]
  • 프로이센은 1억 2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

이쯤되면 19세기 판 베르사유 조약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5 결과

유럽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것 처럼 보였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특히나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받은 프로이센에서는 프랑스에 복수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드높았으며 러시아에서 역시 틸지트 조약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심지어 러시아의 병사들은 틸지트 조약을 통해 명목상 차르와 함께 총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의 지시를 공공연히 무시할 정도였다. 결국 러시아-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불안불안한 평화는 조약체결 후 채 3년이 지나지 않은 1810년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공공연히 반항하면서 실질적으로 무녀졌고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면서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린다.
  1. 직역하면 그냥 틸지트 강화라는 의미이다.
  2. 비스툴라 강을 러시아아 프랑스 세력권 사이의 경계선으로 유지할 것을 사절단에게 분명히 전했다고 한다.
  3. 여담이지만 2013년도 수능특강 영어지문 중에 이 때 나폴레옹이 연극을 통하여 암묵적으로 러시아에게 양국 사이의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렉산드르 1세에게 전했다는 관련글이 있다.
  4. 한가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전해져오는데, 두 황제가 만나자마자 꺼낸 대화주제가 바로 영국 뒷담화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1세가 '나도 프랑스만큼이나 영국 싫어함'이라고 하자 나폴레옹이 '올ㅋ 그럼 우리 친구 먹을수 있겠네'라고 화답했다고(...)
  5. 스웨덴을 다구리쳐서 강제로라도 영국에게서 이탈시키기 위한 나폴레옹의 노림수였다.
  6. 오늘날 루마니아 남부 지역이다.
  7. 올덴부르크 대공은 차르와 인척관계였기 때문에 이 시기 올덴부르크 대공국은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영토였다. 즉 러시아를 달래기 위한 나폴레옹의 떡밥.
  8. 러시아 귀족들이 가장 불만을 품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결국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면서 흐지부지.
  9. 물론 엘베 강 서부 영토를 싹 다 때낸 것은 아니고 대략 오늘날의 니더작센 정도의 크기이다.
  10. 다만 예비군의 시초격을 만드는 편법을 이용해서 어떻게 어떻게 8만명 정도의 군대 규모를 유지해냈고 이것은 1813년 독일 해방 당시 프로이센 군의 병력 동원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