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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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의 인물이 시라소니 이성순.

1 일생

우리나라 주먹사에는 무수한 실력자들이 있다. 상상 못 할 힘의 천재나 신화와 전설을 남긴 재주꾼도 많다. 하지만 공정하게 평가하여 시라소니를 따라 잡을 사람은 없다. 힘에서는 첫째가 아닐지 몰라도 싸움의 기술에 있어서는 시라소니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 -유지광의 대명에서

본명은 이성순(李聖淳). 생몰년은 1916년 2월 29일 ~ 1983년 1월 25일. 고향은 신의주 미륵동. 내가 시라소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해방과 제1공화국 시기까지 활동한 싸움꾼. 흔히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말년에 조폭세계에서 자의반 타의반 퇴출되고 종교에 귀의해서 평범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성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아 정황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농 이기정(1878~1943년)과 그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위인 형 이성덕은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전 일본 빙상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1] 그에 반해 이성순은 어릴 적 부터 왜경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유달리 일본 아이들을 패서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종교 관련 사업에 뛰어들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성순은 1932년 부터 밀무역인 도비노리에 뛰어든다. 도비노리란 세관원의 눈을 피해 달리는 열차가 느려지는 때 빠르게 올라타 중간에 타고 내리는 밀수 수법을 말하는데 당시의 열차의 속도가 지금에 비해 매우 느린점도 있지만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적잖은 요령과 신체능력이 동반되어야했다. 이 시절 이성순은 실수로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 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2] 1936년 당시 이북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이기고 이후론 중국 일대에서 야쿠자, 권법가, 마적, 서양인들과 싸우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3] 그의 특기는 공중걸이 박치기 즉 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와 니킥, 팔꿈치 공격이었고 단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대중매체에서 이성순이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고 싸움의 달인이 된 천재로 그려지지만 젊은 시절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았고 1934년도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 [4]

해방 후 월남하여 이북계 조폭들의 큰형님격으로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고자라니에게 졌다고 한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과 이정팔의 압록강 동지회와 대동강 동지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 단합하는 성격이었다. 이 가운데에 이성순이 옵저버 역할을 하면서 중재를 담당했다. 정식 직함은 압록강동지회 감찰부장. -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1989, 건국청년협의회), 청년운동 반세기(경향신문 1987. 02. 25)

6.25 전쟁 시기에는 서북청년단 인원으로 구성된 KLO부대원으로 전쟁에 참가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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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에 서울의 조폭세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와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6]되었는데, 시라소니는 1.4 후퇴 당시 부산에서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깡패)의 사무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순은 동대문시장의 점포 양도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였다. 월남한 이북 사람들과 상이 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좀 내달라는 요구였지만 그전에도 이성순은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었다. 이권분산과 조직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는 부하들을 사주하여 사무실에서 손도끼 등의 흉기를 이용해 이성순을 잔혹하게 린치하는데 이 사건이 '시라소니 동대문 린치사건'이다. [7][8] 당시 이성순은 종로 5가의 반도 병원[9]으로 옮겨 졌고 얼마 후 백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사건 이후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시체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고 후유증 또한 심각했다.

1954년 퇴원 후 그는 팔당 산기슭에서 이정재를 암살하기 위한 재활 훈련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러번에 걸쳐 암살을 시도했으나 줄줄이 실패하자 거의 폐인이 되어 장티푸스에 걸리기도 했는데, 이 치료기간 중 개신교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이 구악 일소라는 명분하에 조직폭력배들을 일제히 검거할때 이성순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도들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당시 검찰에서 구속중이었던 이정재를 추가기소하기 위한 방증을 수집중 시라소니 린치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정재와 대질 심문을 가지기도 했는데[10] 린치 사실을 부인하며 이정재를 감쌌다고 한다.[11] 이 일은 조폭생활의 허망함을 깨달은 시라소니가 결정적으로 은퇴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이후 시라소니는 영락교회 집사로 두칸 짜리 셋방에서 생을 마쳤다.[12] 그는 죽기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이기고 지는 것은 다 의미 없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이 진실이다.오 지져스
'허름한 차림의 중년 사내 하나가 물론 병신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그렇다고 절대로 온전한 걸음걸이로는 보이지 않는 그런 걸음걸이로 식당 입구 쪽에서 슬며시 안으로 들어섰다...어딘지 몹시 꾀죄죄해 보이고 워낙 가느다란 허리통이 그나마 허리띠로 바짝 졸라매 놓아서 두 손바닥을 펴 감으면 그대로 손안에 들어올 것 같은 그런 비쩍 마른 중년 사내 하나가...이따금 극히 조심해서 한 장씩 꺼내주는 지폐를 조용히 받아서 넣기도 하며 냉면을 시켜 먹었다...당시만 해도 그런 상이군인들이 상당히 많았고 또 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며 얻어먹었다...그 사내야말로 시라소니였던 것이다.난 대단히 놀랐다. 왕년의 그 무섭던 주먹. 핑퐁대 위를 날아가 상대를 박살내던 그 공포의 사나이가 거의 폐인으로 보였다.' 소설가 강용준

조폭세계의 비참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가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말년에는 완전히 신앙에 귀의하여 가난하지만 평온하게 삶을 마쳤다고 한다. 막내 아들인 이의현씨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목사가 되었을 정도.

그의 아내의 회고에 의하면, 결혼하기 위해 괴팍한 방법도 썼다고 한다.

48년에 친척의 소개로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솔직히 너무 못생겨서 안 만나려고 했어. 그러니까 하루는 우리 집안 친척들을 다 모이게 하더니 쌍권총을 딱 꺼내놓고 결혼을 안 시켜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더라고. 그러니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친척들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지.”

괴팍이 아니라 범죄잖아
그래도 이렇게 얻은 아내를 학대하거나 하지는 않고 매우 사랑했다고 하며, 아내 역시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는 식으로 회고했다.

2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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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는 이혁수 감독, 이대근 주연으로 영화화 되어서 서울 관객 40만의 흥행을 거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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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무되어서 1980년에는 신성일까지 기용해서 협객 시라소니 part2라는 제목으로 속편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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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1992년작도 있다. 100편이 넘는 한국영화 각본을 맡았던 이일목이 첫 감독 데뷔를 했던 작품. 일본군 장교 앞에서 화장하고 남은 친우의 유골을 씹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영화가 저예산이라 자동차도 그냥 90년대 차를 썼을 정도다. 티날까봐 밤장면에만 나오는데 어차피 헤드라이트가 사각형이면 일제시대 차량으로 보일리가(…). 서울 관객 10만으로 흥행은 기대 이하였으며 당시 언론 평은 장군의 아들 영화 흥행 성공에 나온 짝퉁 수준으로 평가하며 평도 안 좋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감독인 이일목은 그 뒤로 카루나같은 영화를 더 감독했지만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고 결국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KBS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박건식.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차룡[13]이 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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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재학이 그린 협객 시라소니라는 만화가 있는데, 이는 대본소용으로 출간되었던 '히라소니' 만화를 서점용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다. 당시 이재학 문하였던 허영만이 전체적인 작화를 담당했다.[14]

이후에는 극화가 방학기가 스포츠서울에 연재했던 일제 치하부터 1공화국 종말까지의 주먹계 에피소드들을 그린 '감격시대'에서 김두한과 더불어 주연급 캐릭터로 등장했고, 여기서 시라소니 에피소드만 따로 재각색하여 별도로 연재한 '바람의 아들'이란 만화도 있다.[15] 여기서는 어린 시절 서북지역 유지였던 가문이 기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해 호구지책으로 열차를 이용한 섬유 원단 밀수를 하는 일명 '도비노리' 일을 하면서 훗날 자신의 싸움실력의 근간이 되는 신체 능력을 키웠으며, 이때 열차에서 떨어질 뻔하고 순사들에게 짐을 모두 빼앗긴 뒤부터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만주 웨스턴물과 무협물같은 분위기를 지향해서 과장과 왜곡이 심하니 믿지는 말자.

예를 들면 중국에서 벌어진 악녀 '데구치 가야'와의 이야기라든가 '모일화'와의 이야기 등이 있는데, 모일화 같은 경우 감격시대에서는 포악한 성격의 꽃미남 마적으로 등장했지만 바람의 아들에서는 시라소니와 잠깐이지만 불같은 사랑을 나누는 여협객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방학기의 원작 감격시대를 드라마화 한 KBS 드라마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에서는 원작만화의 시라소니를 모델로 했음이 분명하지만 '신정태'라는 이름의 가상인물로 등장하는 듯 하다. 방송가에서 시라소니를 주연으로 한 방학기의 원작의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이야기는 야인시대 방영 이후부터 꾸준히 나왔다. 주연으로 이성재, 임호등이 거론되었지만 수차례 좌초를 거듭한 끝에 겨우 만들어지게 되었지만, 원작만화 자체가 왜곡과 과장이 너무 심한 상태에서 따로 각색까지 햇으니 결과는...

2.1 야인시대

시라소니(야인시대) 항목으로.

2.2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

여기서는 신정태라는 인물로 재창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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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58095&cid=42876&categoryId=42876 네이버 체육학 대사전 발췌.
  2. 이때의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였다.
  3. 그 당시 무용담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이 사실 상 거의 없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
  4. 애초에 아무런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싸운 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5. 이 경력을 바탕으로 3.1공수유격단의 부부대장 자격으로 한국군 최초 공수 강하훈련을 교육했다고 그의 아들은 주장한다. 위의 사진이 그 증거 자료
  6. 그 이전까지 가장 큰 세력이었던 종로파는 보스 김두한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7. 야인시대에서는 그걸로 끝난게 아니라 이 사건으로 백병원에 입원한 그를 이정재의 부하인 이석재가 후환을 없애겠다는 의도로 단독으로 병원으로 찾아가 쇠막대로 2차 린치를 벌여 그나마 하나 남은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린다. 뒤늦게 이 사실을 들은 이정재는 이석재를 크게 꾸짖고는 근신처분을 내린걸로 묘사된다. 이래서 드라마의 허구성을 조심해야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린치 당하기 전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깁스로 얼굴을 치고 그 소란을 들은 간호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이석재는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 후에 임화수가 오자 시라소니는 마구 화내며 준비한 총을 들이대면서 임화수를 돌려보냈다.
  8. 린치 당시 정황도 인물간의 주장이 상당히 엇갈린다.
  9. 지금의 보령 약국이 있는 자리다.
  10. '이석재와 이정재는 이성순이란 사람을 도끼로 때려 중상해를 입힌 사실을 발견 수사를 재개'. - 동아일보 1960. 05. 29
  11. 실제로 사건에 관한 조사가 검찰에서 실시된 기록이 존재하나 이정재의 재판 당시 수많은 죄상 중 해당 사건에 관한 기록이 없는걸로 보아선 처벌불원에 의한 공소권없음 불기소처분으로 보인다. -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12. 영락교회는 이북 평안도 출신인 한경직 목사가 세운 교회로 역시 이북 출신들이 결집했던 서북청년단과 밀접한 관계였다. 한경직 목사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서북청년단을 반공활동의 중심이었다고 자랑했을 정도. 이성순이 조폭 세계를 떠난 뒤에 영락교회에 몸을 의탁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13. 야인시대에서는 동대문 사단의 고위간부인 조열승을 맡았다.
  14. 이후 본인 이름으로 출간한 각시탈 시기와 그림체가 거의 같다.
  15. 전작이 최영의의 일대기를 그렸던 바람의 파이터였던 관계로 저런 제목을 채택한 듯 하다. 후에 '바람의 아들 시라소니'라는 이름으로 소설판이 출간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