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의 이상향
李丁載
1917년 1월 6일 ~ 1961년 10월 19일
1 소개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5월 21일에 혁명재판에서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시내 한복판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는 이정재 등 깡패들의 모습. 현수막에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고 써 있는데 당시에는 ㅆ 뒤에 읍니다로 쓰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1]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 모습을 본 김두한이 나중에 회고하길, "그때 내가 싸웠더라면[2] 정재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라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왔으며, 같은 드라마에서 국회에 난입한 이정재와 한 번 맞붙으려다가 참고 김두한이 물러난 적이 있었다.[3] 유지광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무풍지대에선 김두한이 "잘못했어. 그때 정재가 국회에 들어왔을 때 그놈의 국회의원 뱃지고 뭐고 다집어던지고 정재를 눌러야했어....그놈의 이정재도 안 죽고, 유지광이도 안 죽고....눌러야했어...그래야만 그놈들을 살릴 수 있었는데..."라는 대사를 한 바 있다. 방학기 만화 감격시대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선 술자리를 하던 김두한이 비슷한 말을 한다. 그만큼 아주 비참하게 쳐다봤던 모양이다.
2 생애
한국의 조직폭력배. 이승만 정부 시절에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렸다. 단성사 저격 사건 및 야당 정치인들을 향한 정치테러 등을 지시한 배후이기도 하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힘이 굉장히 셌다고 한다. 마을에서 씨름대회를 개최하면 그날 상품으로 걸린 황소는 전부다 그의 몫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 본래 처가살이로 동대문에서 광목 장사를 했으나 얼마후 한 깡패와 시비가 붙자 그 깡패를 씨름기술로 들어 메친 걸 계기로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세계에 입문, 대한청년단[4] 종로구 동부단장직을 맡게되면서 본격적으로 동대문 시장의 이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김두한의 정계진출로 종로파의 조직이 사실상 정리된 이후 시장점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열승, 차석환을 포섭하여 '가족회'라는 조직을 결성. 6.25 전쟁 이후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 3000평을 '광장주식회사'로부터 매입하여 점포를 짓고 상인들을 입주시키는 한편으로 상인들을 모두 '가족회'의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이처럼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킨 이정재는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행위 및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보호세를 뜯는 폐단을 없애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해주어 한번도 상인들의 원망을 산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망을 사지 않는 한편으로 실은 절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었는데, '광장 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것을 비롯, 시장의 전기/전화 관리세에 자가발전을 구실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에 불과하던 관영요금을 2000에서 2500환까지 거출하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을 부과하는 등의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상인들에게서 이정재의 평판은 좋을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정재의 세력은 날로 거대해져 경마장에까지 미쳤는데, 그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시장의 규모는 종로4가에서 6가까지 이르는 7만평 규모에 2900여 점포를 아우르며 상인의 수는 약 1만 2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위세가 어느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쉽도록 동대문파의 조직도를 기재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 뿐만아니라 당시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총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위원회(최고급 간부) * 3인위원회 : 이정재(두목), 조열승(부두목), 임화수(부두목) * 7인위원회 : 상기 3인 외 오영환, 고일심, 김양수, 차석환 참모부(감독반, 정치반, 사법반, 양성반, 사무반으로 구성) 외곽부(임화수가 주도하는 반공예술단) 행동부(서울시내 하부조직 10개 파로 구성) * 특수부대(이석재 외 7명) * 종로파(심종현 외 20명) * 소공동파(홍영철 외 20명) * 서대문파(최창수 외 30여명) * 광화문파(장영빈 외 50여명) * 종로4가파(유지광, 강승일 외 50여명) * 경마장파(이창수 외 50여명) * 동대문시장파(장세규 외 50여명) * 평화극장파(이천일 외 100여명) * 청년도장파(이창수 외 300여명) |
이런 거대한 이권을 쥐게 된 이정재는 동대문 광장 입구에 당시 시가 1억환에 달하는 3층 건물을 짓고 옥상에 도장을 설치하여 부하들을 육성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 점포양도를 요구하던 시라소니를 이 사무실로 유인하여 손도끼 등의 흉기로 난자한 '시라소니 린치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의형제인 곽영주가 경찰이 되고 싶어하자 이정재는 경찰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고 곽영주를 경사로 임관시켰다. 그후 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띄어 이승만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었고, 이정재의 위세는 자유당 이기붕의 권력을 업고 정계에까지 미치게 되어 야당인사들에 대한 집회방해, 이기붕의 자유당 의장 취임 공작 등 수많은 정치테러를 벌였다.
이때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제3세력(야당인사)의 동시다발적 암살기도를 획책하기도 하였음이 혁명재판 당시 밝혀졌는데, 당시 암살대상이 되었던 인물로는 김태선, 이순용,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김상돈, 백두진, 문봉제 외 40여명 가량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당시 이정재의 참모장격이었던 김동진이 경찰에 밀고함으로 무마되었다고 하는데, 이 보복으로 김동진은 단성사에서 영화 '형제는 용감하였다'를 감상하고 나오던 도중 조직원 이석재에게 저격을 받고 복부 관통상을 입기도 했다. 이 사건이 야인시대 등 드라마에서도 주요 사건으로 언급되는 '단성사 저격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검찰의 수사도중 자유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이정재는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나게 된다.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않고 정계진출까지 꿈꾸고 있었는데, 고향인 이천에서 민의원 출마를 계획했으나[5] 당시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바닥이던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반 강제적으로 양보하게 된다. 이때 이기붕과의 마찰로 인해 이정재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을 걷게된다.
이후 직함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채 권력을 잃은 이정재는 자택에서 칩거하게 되고, 이틈에 처세의 달인 임화수가 실질적인 동대문파의 1인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임화수에 관한것은 해당 문서 참조.
그러던 와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사정부의 조직폭력배 척결사업 대상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 등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겼다. 결국 혁명재판부에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제7조1항(단체적 폭력행위)외 11개 범죄행위로 기소되어 범죄단체 수괴로 인정,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백주의 시내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1961년 10월 1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세. 이날 교도소장 면회라는 명목으로 이동 중 간수들이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이정재는 담담한 표정으로 "음 오늘이 그날이군" 이라면서 제발로 조용히 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면회왔다고 하여 가던 길에 갑자기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놀래 당황해하지만 곧 덤덤히 사형장으로 간다.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대략 이렇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6]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오랫동안 정치깡패로 욕만 먹고 묻혀졌더니만 몇몇 지인들 주장으로 그 홀로 욕만 다 먹기엔 억울하다고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야인시대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로 이런 주장이 기사화되기도 했지만 묻혀졌다. 더불어 이정재를 두둔하는 이들은 임화수를 두둔하는 이철승 같은 이들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본다. 그들 주장에 의하면, 일자무식으로 깡패 영화제작자이던 임화수를 정치계에 연결시켜 주었더니만 나중엔 죄다 이정재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오리발이나 내밀었기에, 법정에서 같은 처지이던 유지광이 "정재 형님 덕에 네놈도 은혜를 입었건만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나?"라면서 분노에 찬 소릴 지르며 욕설을 해댈 정도였다. 아예 당시 유지광은 뚜껑이 올라갈대로 올라간 상태로 달려가서 임화수를 패던지 하다못해 두 눈깔에 손가락을 박아 장님으로 만들어버릴까 할 정도로 이성을 잃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곁에 있던 4.19 당시 발포를 명령한 내무부장관으로서 임화수나 이정재와 같이 교수형으로 죽게되는 최인규가 말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봐야, 이정재만 역시 정치깡패 왕초라면서 더 욕먹이는 짓."이라는 말에 참았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임화수를 두둔하는 이들을 죄다 이정재 탓만 한다고 굉장히 싫어한다고.
1989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무풍지대나 제2공화국, 제1공화국에서는 조경환이 이정재를 연기했었다.조경환은 이전까지 MBC에서 어린이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을 비롯하여 전속으로 활동하다가 이 드라마로 KBS에서 처음 나오게 된다고 토크쇼에 나와 이야길 했다. 무풍지대를 찍을 당시 이정재를 기억하던 지인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체로 드라마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는 투로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철승이 무풍지대나 야인시대를 왜곡이라고 발악거리던 거와 대조적.
야인시대에서의 이정재 담당 배우는 청년기 김혁, 장년기부터 마지막까지는 김영호가 역할을 맡았다.
야인시대에서 김두한, 시라소니와 맞먹을 정도의 실력자로 비춰지는데 실제 싸움 실력은 이 둘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7] 실제 이정재는 주먹패의 이미지보다 모략가의 이미지가 강했다고 한다.
3 미디어믹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혁, 김영호가 연기하였다.
3.1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의 이정재
이정재(야인시대) 문서로.
3.1.1 내가 고자라니에서의 이정재
형사양반 문서를 참조.(...)- ↑ 1988년 한글 맞춤법을 고시하면서 모든 받침 뒤 어미를 '-습니다'로 바꾸었다. 때문에 386세대(대략 90학번) 이전 어른들은 필기를 할 경우 ㅆ 뒤에 습관적으로 '-읍니다'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 ↑ 그리고 다시 깡패일을 하지 못 하도록 박살을 내서 주먹계에서 손을 씻도록 하였더라면
- ↑ 유지광이 이정재의 말씀이라며 권총을 은밀히 보여줬고 이를 본 김두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유지광과 이정재를 깐다.
- ↑ 1948년 10월 4일 창립된 반공주의 우익청년 단체이다. 단장은 신성모.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은 김두한이었는데, 당시 김두한의 부하들중 가장 고학력이었던 이정재를 김두한이 높게 평가하여 이 직책을 맡겼다. 참고로 이정재는 오늘날의 휘문고등학교인 휘문고보 출신.
- ↑ 이정재는 오래전부터 이천에서의 정계진출을 꿈꾸었는지 부하들에게 '길가다 이천 사람이 곤란을 겪고 있으면 발벗고 도와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 ↑ 영화판을 주름잡던 임화수까지도 재판에선 난 이정재가 시켜서 학생들을 구타하게 했다고 주장했을 정도이니...다른 정치인들이나 그의 부하들이야 오죽할까. 물론 유지광같은 경우는 임화수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정재를 옹호하긴 했다.
- ↑ 부산 깡패 5명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이정재를 시라소니가 구해주었고 이정재를 납치하였던 켈로부대원은 4명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