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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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斗漢
(1918년 5월 15일 ~ 1972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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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야인시대만 본 사람들은 저 사람이 누구인가 할 것이다.

1 개요

대한민국의 조폭 출신 정치인, 사회운동가

드라마영화, 만화 등의 매체들에서의 행적과 실제 행적과의 괴리감이 심한 인물.

한국의 주먹패 오야붕 출신 국회의원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이자, 한국독립운동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 혼란스러웠던 해방 직후 대한민국을 보여주는 인물로 전세계를 통틀어도 조폭출신 중 이 정도로 출세한 인물도 드물다. 워낙 다채로운 경력을 가졌던 인물인 탓에, 이 문서는 이 인물을 긍정적,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 의해 숱하게 이리저리 갈아엎어져 왔다. 내가 고자라니가 대유행하던 2008년 때의 꼬꼬마들은 심영을 고자로 만든 일을 1순위로 떠올린다 카더라[1]

2 생애

김두한/생애 문서 참고.

3 김좌진의 친자 논란

김두한이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처음으로 공개 지면을 통해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 바로 도올 김용옥(...).

김을동에 따르면, 이 논란은 김용옥이 1990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는 것. 다만, 김을동의 주장대로 김용옥이 이러한 내용을 최초로 주장한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거나 김용옥의 1990년 기고문 자체는 세월이 너무 지나 인터넷 상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도서관에 가면 정기간행물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단 김용옥 본인이 작성한 글은, 그저 "개성출신 고아가 거짓말한 것이다" 라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같은 해인 1990년 발표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시나리오 원안을 쓴 사람이 바로 김용옥이라는 것.(...) 이랬다가 저랬다가 나 가지고 지금 장난쳐? 다만 김용옥 자신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의 김두한이라는 인물은 영화적 픽션이라고 밝히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거나 불씨가 당겨진 것은 사실이므로 이후 제법 논의가 되었고, 여러가지 사실들이 밝혀졌으나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3.1 관련 내용 및 반론

  • 아래의 내용들은 기존에 김두한 문서에 기재되어 있던 것들을 적당하게 내용을 줄여 편집하고, 현대어로 바꾸었음을 밝혀둔다.
  • 또한, 원래 있던 내용들은 월간 말의 2003년 5월호에 실린 내용을 복붙한 것에 불과했는데, 일단 그 기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이를 임의대로 편집하고 말미에 몇가지 내용들을 추가했음을 밝혀둔다.

일단 시대 정황상 김좌진 - 김두한의 부자관계에 대한 대부분의 증거는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 특히 관련 내용들은 김두한의 회고와 증언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김좌진이 사망했을 당시 김두한은 불과 12살 전후밖에 되지 않았으며, 김두한 회고록에 따르면 아버지를 만나본 것은 단 한 번뿐이니 애매한 구석이 상당수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 김두한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제대로 된 내용을 기억할 리가 만무하며, 김좌진을 만났다는 것 또한 김두한 특유의 허세, 허풍일 가능성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

이로 인해 김두한의 회고는 세부적인 면에서 사실과 다른 점들이 상당 부분 존재하는데, 심지어 김두한 본인조차도 이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야기한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 때 자신이 7살이라고 했고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좌진이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김두한은 1918년생이고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으며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으므로 사실 관계가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솔직히,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죽은 이야기를 50살이 다 돼서 하는데 이게 몇 살 때 일인지 제대로 기억한다는게 더 이상한 일이므로 충분히 해명이 되긴 한다.[2]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모친에 대한 기록이다. 일단 김두한의 회고록에 기록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김좌진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졌다. 도피 중에 어느 집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는데, 그 집은 옛 상궁 출신인 박 씨와 그의 딸 박계숙의 집이었다. 이후 박씨 모녀는 김좌진을 보살펴 주었고, 박계숙은 김좌진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이야기는 미화, 과장되었다. 문제는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이 일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훗날 김두한의 출생 관련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단단히 일조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김좌진의 사망 이후 보도된 내용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된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한 사건은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국내언론도 중요한 뉴스로 취급하였으며,[3] 자연스럽게 국내에 남아있는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김좌진의 가족은 현재 길림성 모처에 있으며 칠십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우인 김동진 씨이다. 다만, 서울 시외 모처에 김좌진의 서자[4] 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단, 이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일단 월간 말지에 해당 내용을 작성한 사람이 신문 이름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가 김두한의 거처가 서울 시외가 아닌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며, 취재를 하였다. 이 결과가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이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어린 시절 사진이 실렸다.

“김좌진의 애첩이었던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에 대한 다른 소식들은 모두 잘못 전해진 것으로, 그들은 현재 개성에 있다. 김두한은 현재 개성 서본정(西本町) 254번지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머물고 있다.” (중략)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의 외할머니만 병들어 누워있었다." 『조선일보』 1930년 3월 17일자)

나머지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에 몰락하였다. 결국 집안이 파산하여 김계월은 15세 때(1916년)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이 무렵 김좌진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에 김계월을 서울에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이 때 김계월은 태중에 김두한을 가진 상태였다.

한편,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어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떠나면서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 딸을 낳으면 두옥이로 이름을 정하라 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치고, 김두한이 말한 자기 어머니 성씨가 실제와 다르다(...).

여기에 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은, 김두한이 당시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증언한 내용. 김두한은 회고록에서는 이후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신이 7살 되던 해에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증언할 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보다 나중의 육성증언인 '노변야화'에서 “8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 최문우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엔, 분명히 "12살 김두한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라고 했으니 일차적인 모순이 발생.

위의 두 의문점은 결국 어떤 기회주의자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사칭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생산해낸다. 사실 모든 의혹은 이 주장으로 모이긴 한다.

그런데 월간 말의 기사는 위의 모순점들이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래 내용은 월간 말에 인용되어 실렸던 것을 약간 편집한 것으로, 원 출처에 대해서는 다른 위키니트용자가 추가 바람.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따라서 김두한이 자신이 6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잘못 기억하여 연도가 틀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이후의 사실까지도 연도가 죄다 실제와 다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김계월은 노모의 건강이 악화되고, 김좌진으로서도 김계월 일가를 보살피기에 벅찼기 때문에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가 대략 1926년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실천에 옮길 수도 없어 그저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결국 연고가 없어 알아볼 사람이 적은 개성으로 옮겨 기생 일을 다시 시작한 것. 그런데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기에 결국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기생 2명과 함께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이때 어린 김두한은 외조모 아래 개성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김계월은 이후 다시 더 북쪽의 홍원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결국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계월은 행방이 묘연하고 김두한과 외조모 둘만이 남아있었다.

이 길고 뻔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좌진의 이었던 김계월이 김두한을 낳았다. 그런데 김좌진은 이미 만주로 떠난 상태라 김계월로서는 김두한을 먹여살릴 방법이 없었고,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결국 어린 김두한은 외할머니와 둘만 남겨졌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기생 첩 출신 어머니, 그리고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이국에서 독립운동 중인, 얼굴도 모르는 위대한 아버지. 이런 사실에 대해 김두한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히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 김두한이 기초적인 사실을 근거로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잔뜩 집어넣어 스스로를 높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김두한의 관련 증언들이 애매하고 사실관계가 다소 어긋나 있는 사실들은 모두 해명이 가능하며,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꾸며내었는지 또한 설명이 된다.

또한, 김두한의 자서전에 어머니 성씨가 엉뚱하게 기재된 것은 어머니가 일찌감치 집을 나가 버린 탓에 어린 김두한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또,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과정 중에 대필작가가 대충 기재한 내용일 가능성도 있다. 김두한 본인은 어느 정도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의 구술에 의존해서 대필되었을 것이며, 사후 검토나 퇴고 또한 이뤄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여기에 더하여 몇 가지 의혹들이 더 있다.

  • 우리 김좌진 장군님이 기생 따위와...
    •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남자들 중에 본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두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 김두한이 김옥균김좌진의 양아버지라고 말한 것. 그러나 김좌진은 1889년 생인데, 김옥균은 188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못했으므로 사실이 아니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본인과 아버지인 김좌진을 더욱 돋보이게끔 같은 가문인 김옥균을 끌어들여 거들먹거린 듯하다.
  • 김두한은 형평운동 중에 김좌진과 인연을 맺은 원노인 밑에서 컸다고 주장하는데, 김좌진과 형평운동의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시간적으로도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x 2. 원노인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존재하였는데, 억지로 김좌진과 연결시키기 위해 형평운동 이야기를 꾸며냈을 가능성은 있다.
  • 그 외 김계월의 나이가 잘못되었다거나, 연도가 살짝 맞지 않는다거나, 김계월의 아버지라는 '김상희'라는 인물이 조선말 참판을 지낸 기록이 없다는 지적
    •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신문 기사에서 연도나 나이에서 약간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 정도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김계월의 어머니이자 김두한의 외조모로 배움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는 민간에서는 음력으로 생일을 따지고, 공식 기록이나 신문 등에서는 양력으로 따지던 시대이니 혼동이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사소한 오류점을 제외하면 정황 자체는 그럴싸하다. 참판 기록이 없다는 문제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데, 조상 중 누구가 참판을 지냈다는 핑계로 참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
  • 김두한이 해방 이후인 1945년에서야 김좌진과 이혼했던 옛 본처 오숙근의 양아들이 되어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는 주장.
    • 이미 1930년부터 김두한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오히려 오숙근이 해방이 되고서 뒤늦게 자신과 김좌진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김두한의 존재를 이용했다는 것이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
  • 김좌진의 사망 보도 기사에는 양자인 김문한이 언급될 뿐이며, 김두한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등장한다.
    • 김문한은 김좌진의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 김좌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 장례 문제로 급하게 양자가 되었을 뿐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 이후 김문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이 이야기는 아래에 적혀있다.
  • 총독부에서 고의적으로 김좌진의 명예를 폄훼하기 위해 김두한이라는 사생아를 만들어냈다는 주장
    • 이런 행위를 한 것은 매일신보로, 최초 보도한 것 역시 매일신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1925년 그 어머니 김계월이 어린 김두한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을 만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매일신보 1925년 9월 15일 「金佐鎭과 金桂月 八年만에 異域에 邂逅 오래동안 서로 그리우든 정랑정부가 서로 맛낫다」) 김두한의 회고와 비교하면 이 기사가 조작이 아니라 도리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상봉 이야기는 유학자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에도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에서도 보도되었는데, 이 당시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친일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당시 김두한의 나이는 불과 12세로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또한 김두한과 그의 외조모는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불우한 생활을 했는데,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했다면 왜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것인지?
  • 굳이 총독부가 아니더라도 김두한의 외조모 혹은 기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다.
    • 뭐하러? 이 시점에 김좌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이국에서 사망한 불순한 독립운동가였다. 대체 그와 관계있다고 주장해서 얻을 게 무엇이겠는가?
  • 김좌진과 김두한은 전혀 닮지 않았다.
    •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 각자 나름이겠지만, 김좌진과 김두한의 외모는 아무래도 하관 쪽이 닮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외에 백범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의 글에서도 보인다.(1948년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3.2 결론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다.

결정적으로, 김좌진의 본가는 김두한의 존재를 인정한다. 사실, 김두한에게는 배다른 남동생이 존재하는데 이름이 김철한이다. 이쪽은 1929년 김좌진이 결혼을 통해 낳은 아들로 호적이 깨끗하다. 김철한의 모친 나혜숙 여사는 독립운동하다가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정식으로 결혼한 분으로 이 분이 김좌진 장군의 자손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게다가 서울에 남아있던 김좌진 본가의 오숙근 여사는 해방 이후 김두한을 양자로 입적시켜서 김두한이 장남으로 김철한이 차남으로 호적에 오른다. 이 쪽 일가에서 김두한을 으로 인정하였으니, 이걸 내세우면 제3자로서는 그저 닥치고 데꿀멍. 김좌진 문서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원래 김좌진의 집안은 상당한 명문가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뜨내기가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외에도 1942년에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작성해 경성지방법원에 보낸 문서(京鍾警高秘 제1721호)에도 김좌진을 김두한의 아버지로 쓰고 있고, 중외일보 1930년 5월 20일 기사에는 "수일전 계동(桂洞) 김병목(金炳穆)씨 집에서 고 김좌진(金佐鎭)씨 유고 두한(斗漢)소년의 장래교육을 위하야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더라" 운운하여 어린 시절부터 문중 차원에서도 김좌진아들이란 걸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 경찰의 내부문서에서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해놓고 감시하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해방 이후에 김좌진 장군 밑에서 같이 독립군 활동을 하던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말하면서 구명운동을 했다. 김구 선생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군이라 지칭하면서 걱정해주었다. 김구 선생도 거물이지만,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던 우익폭력계의 거물이고 이승만의 바로 아래급 거물이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폭력으로 김좌진 문중을 위협해서 호적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는 과거 김좌진의 측근들이 김두한보다 더 거물이었으므로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아들이라고 해서 억울하게 생각하거나 분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역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호부견자가 있기 때문이다. 즉, 김좌진은 김좌진, 김두한은 김두한이라는 것. 또 김두한의 자녀들 중에서도 김을동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자녀가 있다. 당장 국정교과서 문제에서도 새누리당김을동은 찬성했지만, 배다른 동생인 김경민 씨는 반대운동을 했다. 즉, 여러 후손이 있는 만큼 정치적 견해도 다양하다.

3.3 김좌진의 또다른 유족 문제

한편 1989년, 김좌진의 딸이라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갑툭튀하면서, 위의 가짜설과 엮여 논란이 심화되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사실만을 간추리고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당시는 냉전이 막 끝난 상황으로 중국, 러시아 등지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유족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시점이므로 이 사람이 등장한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그런데 저 위의 링크된 기사 내용으로만 보아도 의문스러운 점이 상당하다. 김좌진의 내연관계였다는 이 여인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사망한 상태이며, 김좌진의 부하였다는 양아버지 역시 사망한 상태. 게다가 이 여인은 문화대혁명 당시 이름을 바꾼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 신분에 뭔가 애매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6] 또한, 본인이 직접 국가보훈처에 먼저 연락을 취한 것도 따지고 보면 마뜩치 않은 부분.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이며 실제 이후로도 문제가 된 것은,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 또한, 기존에 알려진 김좌진 암살 내용과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 이후 소식은 알 수 없고, 1999년 중국에서 열린 김좌진 자택 복원 기념회에 한국의 유족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 기사화되었다.
- 위의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이 기사에서도 '장군의 딸로 알려진'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애매한 점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05년, 김강석의 딸이자 김좌진의 외손녀라 주장하는 위연홍이라는 여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 기사로 간단하게 소개되었다.

참고로, 김좌진과의 관계를 주장한 사람은 김강석 이전에도 존재하였다. 김좌진의 양자 김문한의 아들이라는 주장 기사에 따르면, 신뢰하기도 적고 사실이라 해도 김문한 자체는 일시적으로 장례 문제로 양자 취급한 조카이므로, 유족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김을동도 말했듯이 바로 유전자 검사뿐. 그런데 김강석 쪽과 김두한 쪽을 비교대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련성이 없다고 나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가짜라고 주장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따라서 제3의 유족이자 호적상으로나 기록상으로나 명백한 김좌진의 유족인 김두한의 남동생 김철한 쪽 유전자와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유전자 검사를 제의했고, 위연홍은 잠적해 버렸다는 김을동의 주장에 대해, 김철한 쪽에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즉, 사실상 김을동의 주장을 수긍한 셈.

이로 인해 인터넷에서는 국회의원이며 여당핵심 인사인 김을동이 실은 김좌진 장군의 가짜후손이며, 자신의 권력으로 진짜 자손인 위연홍을 몰아냈다는 주장이 떠도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위연홍이 오히려 의문점이 더 많다.

  • 김좌진 장군의 후손에 김을동만 있는게 아니다. 김좌진 장군의 자식에는 김두한도 있으며, 첫째 정실 부인의 자녀 그리고 셋째 부인의 자녀도 있다. 즉, 위연홍이 만약 유전자 검사를 원했다면 왜 굳이 김을동만을 고집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결국 언론플레이를 위해서 나름 약간 유명인사인 김을동을 지목한게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 위연홍은 2005년 한국에 온 이후, 2006년세계일보 기자가 기사를 내면서 많은 후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김좌진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한 판결이 난 것이 2008년 3월인데, 김을동의 국회의원 초선 당선이 2008년 5월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처럼 김을동이 국회의원으로서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기다.
  • 세계일보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기사를 내면서 도움을 주었고, 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과 홍성군 의회 지역유지들도 후원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안동김씨 문중과 연결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정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란 근거가 빈약했다면, 그 많은 자손 중에 한 명과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된다. 근데 굳이 김을동이 안 만나줘서 유전자 검사를 못 한다김을동 탓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 그리고 위연홍이 실제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한국에 왔다면 굳이 김을동이 위연홍을 방해할 이유도 없다. 위연홍이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라고 인정받는다고 한들 도대체 김을동이 손해보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김을동이 아무리 권력이 있다 해도 그걸 이용해서 위연홍을 몰아낼 이유는 없다.

한 마디로 말해, 이걸로 김두한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쓰잘데기 없는 짓이다.

4 김두한을 둘러싼 수정 전쟁

사실 위의 구질구질한 친자설은 근대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김두한을 까고 싶어져서 벌어지는 일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미 이전부터 김두한 본인의 행적 자체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왜곡, 축소, 은폐된 상태란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 위키백과의 김두한 항목을 한번 읽어보고 위의 내용들과 비교해보자. 무엇이 문제인지 감이 올 것이다. 깨알같은 중립성 논란 틀과 이해당사자 작성 경고 그런데 사실 한국어 위키백과 정도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미 오프라인으로 출간된 각종 백과사전과 인명사전은 어이가 가출할 정도의 상태. 예를 들어, 두산백과사전의 김두한 항목,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김두한 항목 등을 보자.

대놓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하였다.'거나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따위의 헛소리를 적어놓았고, 김두한의 문제가 될 만한 행적은 단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으며, 노동운동이나 반탁운동에 종사했다는 식의 사실상 미화된 내용만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의 잡쓰레기 인명사전들은 이 내용을 그대로 베껴 축약한 것이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나마 어느 정도 김두한의 행적을 사실에 가깝게 기재한 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김두한 항목 정도가 유일한 상황.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2015년대 이후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김두한의 행적이 대한민국흑역사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 누구라도 김두한의 행적을 살펴보다 보면, '그렇다면 김두한에게 지시한 것은 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점에 마주칠 수밖에 없는데, 김두한은 여기에 대해 별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가 딱히 의리를 지켜 비밀을 유지했다기보다, 그저 자신이 역사적 인물들과 어느 정도 대등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다보니 자신의 위에서 자신에게 지시를 내렸던 사람에 대해선 언급할 필요성도 기회도 없었던 것. 그렇다고 해도 대체로 몇몇 이름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이범석이야 그렇다쳐도 이승만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게거품을 입에 가득 문 일단의 사람들이 어디선가 갑자기 몰려오기 시작한다. 이승만까지는 그렇다 쳐도 끝판왕인 김 선생님이 등장하는 순간, 진보와 보수 모두가 침묵하는 순간이 찾아든다.

그러는 한편, 김두한 본인 및 관련 행적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대부분의 내용들을 김두한의 자신의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상당한 문제. 참고로 RISS에서 올라와 있는 학위 논문 및 학술지 논문 중에서 김두한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논문은 딱 1편이다.[7] 위로가 될 지 모르겠으나, 이정재는 0편이다. 길고 아름다운 본 문서 및 김두한/창작물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김두한은 근 50년 가까이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아온 인물로 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김두한 관련 논문 한두 편 쯤은 얼마든지 쉽게 뽑아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학자들의 연구 주제 선정이 잘난척 하느라 너무 거시적인 부분에 치우쳐 김두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 당연히 역사학자김두한을 제대로 다룬 사람은 전무하며, 한홍구가 한겨레 21에 기고하던 역사 칼럼에서 김두한을 다루고 다른 칼럼들과 함께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한 정도가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경우로 확장하더라도 한성대학교 대학원의 범죄학 관련 교수인 조성권이 《한국조직범죄사 : 조직범죄와 정치권력》라는 저서에서 김두한을 다룬 것이 전부.

이로 인해 현재까지 김두한의 행적은, 1963년에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김두한편"에 99% 근거하고 있는데, 문제는 둘 다 그 내용의 진위여부가 의심스럽고 믿기 힘들다는 점.[8] 무엇보다도 김두한이 과장, 거짓말, 왜곡, 은폐, 축소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문제이다. 노변야화 김두한편을 직접 보면 알겠지만, 진행자였던 권오기[9]김두한이 계속해서 허풍을 치자 '믿기 힘듭니다만', '계속해서 두들겨 팼다는 얘기 뿐이군요'라며 태클을 걸어올 지경이다. 사실, 김두한은 쓸데없이 말재주가 좋았다. 거짓말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리고 시정잡배의 뻔한 허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다들 넋을 잃고 재밌어 했을 정도였으니...

특히 진행자였던 권오기가 2002년에 이에 대해 남긴 인터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진행자였던 권오기의 인터뷰. 일단 이 인터뷰는 필터링을 해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 이 인터뷰가 2002년야인시대 인기를 등에 업고 동아일보사가 《노변야화 김두한편》을 《조선제일의 협객 김두한이오》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과정에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김두한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또한, 언론사 사장과 장관까지 지낸 사람답게 표현 또한 점잖고 완곡하다는 것에 주의.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김두한이 거친 사람이지만 말재주가 뛰어나고 의외로 똑똑한 사람이라는 내용이다. 또한, 김두한 회고록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언급을 하였다.

"머리로는 ‘저게 거짓말이다’ 싶은데도 믿게 되고. 적어도 ‘본인은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싶으니까요. 왜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과장됐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걸 잊고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즉, 권오기 본인 역시 당시 김두한의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허풍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말재주가 워낙 뛰어난 탓에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김두한의 이야기가 이전에 모종의 과정, 즉 1963년의 자서전 집필 과정 도중 상당 부분 창작되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즉 관련 기록들이 김두한의 육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김두한의 이야기 자체가 왜곡된 부분이 너무나 많고 그의 말재주가 좋아 여기에 현혹되는 사람들까지 속출한 상황 때문에 현재 남은 김두한의 기록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태클을 걸어야할지 난감할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역사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차검증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 김두한을 빠는 사람도 까는 사람도 김두한의 회고록에 의존할 뿐, 그 이상의 진실에는 가닿지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김두한의 이야기 중 과장되거나 허위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저 위에서 간략하게나마 일일이 설명했으니 따로 더 적지 않는다.

한편으로 본인의 모순투성이 행보가 단단히 한 몫을 하였다. 특히 말년에 진보계와 약간의 연결이 되었고,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국회 오물 투척사건으로 인해 신민당에 영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미 야당에는 김두한과 함께 우익활동을 한 인사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으로 인해 야당세력조차 김두한의 이전 행적에 대해 별다른 태클을 걸지 못하고 침묵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보수와 진보 모두 김두한의 이전 행적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것. 심지어 김두한에 어설프게 접근하다보면, '어라? 나중엔 반독재투쟁을 했네?', '어라? 나중에는 사회 약자들을 위해 꽤 진보적인 행적을 보이네?'라며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성까지 존재하는데, 김두한의 이런 야릇한 행보에 대해서는 역시 저 위에서 간략하나마 일일이 설명했으니 따로 더 적지 않는다.

여기에 1970년대 1980년대를 거치며 반공정서가 심해져가자, 김두한의 주요한 과거 행적들은 아예 대중들에겐 어둠 속에 묻혀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10] 이런 틈을 타 김두한의 유족들과 친지들은 김두한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강조하고 각종 기념사업들을 벌였으며, 돈 몇 푼이나 벌려는 영화제작자들이 허접한 김두한 전기 영화들을 계속 제작함으로써 이러한 물결에 합류, 결국 오늘날 김두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공식 기록들은 잔뜩 왜곡된 채로 남아버린 것이다.

한편으로 직계 후손인 김을동이 정치계에 투신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역 정치인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김을동의 아들인 송일국이 연예인이 되고, 그의 아들들 또한 인기를 끌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한 기자의 일침 이 기자 역시 김두한에게 불리할 수 밖에 없는 반도의용정신대 문제나 해방 직후의 행적들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참고로, 위연홍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해서 김두한 가짜 아들설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기자가 소속한 세계일보이다.

후대에 와서는 어찌되었건 김두한이 깡패였기에, 김두한이 깡패 주제에 이승만박정희에 자꾸 개기고 대들었기에, 김두한이 태평양 전쟁 시기에 징용 문제를 위해 일제에 부역한 일이 있기에 등 다양한 이유로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4.1 회고록 피로물든 폭풍전야와 라디오출연 노변야화

1963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가 출간되었다.[11] 이 책은 사실 김두한이 1918년생이라고 알려져 있으므로 대략 45세 정도에 나온 책이다.

그리고 1969년 10월 13일부터 시작된 동아방송 라디오출연 육성증언인 노변야화 [12]가 있다.

그러나 김두한은 글자를 쓸 줄 몰랐으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45세의 나이에 주색잡기로 찌든 사람이 즉석에서 10대 이전의 기억을 서술한다면 그게 정확하리라고 보기 힘들다. 게다가 1969년의 노변야화는 무려 50세의 나이에 6살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이 회고록과 노변야화 내용은 실제 역사와 틀린 부분이 꽤 있다. 이 책대로라면 김두한일제강점기에 항일 운동을 하고 한국전쟁이나 정치무대에서도 대활약한 엄청난 인물이 된다. 즉, 뻥이 상당히 가미되었고, 실제 역사와 틀린 부분이 많다. 이 두 개의 자료 안에서도 서로 말이 다른 경우도 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책과 노변야화는 김두한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주장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다. 김두한김좌진 장군 아들이라고 신문에 실리거나, 김좌진 가문에 인정받은건 1930~40년대의 일이다. 1960년대는 그것과 무관한 시절이다. 김두한김좌진 장군의 자손임을 의심받던 시대가 아니다.

말하자면 내용은 본인의 인생사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협객으로써의 활약에 대해서 자랑하는 내용이다.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의 목차만 봐도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소설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책과 증언을 역사학자들이 1차 사료료 간주하여 그 당시 조폭 동향에 대한 연구를 한다면 교차검증해서 과장이나 거짓으로 드러날 만한 내용이 많기 때문에, 이 책은 그야말로 참고서적으로 여겨야 한다. 요약하자면 큰 줄기는 대략 맞는데 디테일이 꽤 뻥이나 오류가 많다는 정도로 생각해 두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일부 내용이 조작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의 교차검증에서 약간의 오류가 발견되는 정도였고멸문한 친정 옹호하는 내용 상당수의 내용이 교차검증에서 들어맞고 현대 의사들이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구체적이며 전문의가 아님에도 잘 묘사했다고 논문이 나올 정도여서 갈수록 존중받는 1차 사료이다.

반면 김두한의 회고록과 자서전 등은 역사적으로 존중받는 1차 사료가 아니다. 구체적인 자료로써 인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두한 회고록이 엉터리 내용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김두한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근거로 쓰기에는 문제가 있다. 김두한의 회고록이 사료로써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해서 그 내용이 100% 허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에서 나오는 김두한이 종로지역 깡패 인 것이나 김두한이 우익폭력집단에 소속된 사실, 정계로 진출한 일도 허위일까? 그것이 허위가 아닌 이유는 다른 구체적인 자료로 확인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뻥이 많다고 해서, 고조선이 가짜라는 근거는 아니다. 환단고기를 신뢰할 수 없다면 환단고기를 참고서적에서 제외하고 삼국유사 등의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고조선을 연구하면 된다.

결론은 간단하다. 김두한의 회고록 자서전 등은 내용에서 뻥과 과장이 많으니 그걸 참고로 삼지말고, 다른 근거를 참조하면 된다. 이 책과 증언을 근거로 김두한의 인생을 판단하지 말고다큐가 아닌 예능으로 생각해라 그냥 재미로 읽거나, 나중에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 때 활용하면 된다.

5 창작물에서

내용이 길어져 김두한/창작물 항목으로 분리.

  1. 정확히는 상하이 조의 짓이다. 심영은 도망치다 총에 맞았기에 김두한의 우미관패거리 중 누가 쐈는지는 알지 못했고, 중환자실에서 계속 '김두한이 이놈..' '김두한 놈들이 오면 내가 죽는다구요!' 라는 대사만 했으니 안되겠소. 쏩시다!
  2. 해명이 되지 않는게, 아동심리학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연도 정도는 정확히 기억한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인데, 50이 되도록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 게 더 문제이다.
  3. 단지, 일제에 대한 쉴드로 '흉적김좌진 죽다'는 식의 타이틀을 붙이곤 하였다. 물론 내용은 대체적으로 중립을 가장한 친 김좌진.
  4. 이 서자가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그 서자의 행적까지 추적하지는 못하였다.
  5. 참고로 이 기사에 언급된 이문창이라는 역사가는 한국 최후의 아나키스트로 불리는 사람이다. 더 쉽게 말하면, 김두한과는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 단, 김좌진은 무정부주의 성향이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김좌진의 만주 행적을 연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6. 단, 문화대혁명 당시 민족주의자 성향의 조선족이 탄압받은 것은 사실이다.
  7. 김두한 창작물 관련 논문은 제외. 그러나 창작물 관련 논문을 넣어도 겨우 3~4편에 불과하다.
  8. 일단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의 경우 출간된지 너무 오래된 탓에 오래전에 절판되었으나, 2003년야인시대의 인기 덕분에 "김두한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 2015년 현재에도 구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소 불충분한 신뢰성을 고려하면 노변야화 김두한편을 참고하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다. 게다가 그의 육성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9. 훗날 동아일보 대표이사까지 올랐고, 통일부 장관 겸 부총리까지 지냈다.
  10. 타임머신이 있다면 한 번 타고가서 1980년대의 3, 40대에게 "여운형이 누군지 아세요?" 하고 물어보자. 대부분 모를 것이며 극소수의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척 할 것이다.
  1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ustri654&logNo=40022738282
  12.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57&r_serial=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