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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원욱 |
소속 정당 | 더불어민주당 |
선거구 | 경기 화성시을 |
당선횟수 | 재선(20대) |
약력 | - 제19, 20대 국회의원 -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위원 - 국회 창조경제활성화특별위원회 위원 -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중앙당 당직자(지방자치국, 기획조정국 부장)(전) - 열린우리당 전자정당실장, 운영지원실장(전) - 새정치민주연합 화성시을지역위원회 위원장(현) - 통합민주당 18대 국회의원 후보(경기도 화성시을 선거구)(전) -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전) - 노무현재단 기획위원(현) -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실행위원(현) - 녹색연합 정책위원회 위원(전) - 독도수호국제연대 대외협력위원장(전) - 경기도 교육청 경기교육자치협의회 위원(현) - 한국청소년운동연합 화성시 지회장(현) - 삼성희망나눔도시락센터 운영위원(현) - 숲해설가 (산림청 인증) - 기후강사 (화성YMCA) - 사회복지사 2급 |
외부 링크 | 블로그 |
1 개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2 생애
1962년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다만 실제 살았던 곳은 길음동이었다.[1] 부친이 베트남에서 미군 하역 노동자로 일한 돈을 사기로 다 잃어 버린 후에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고 있던 조카들이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달에서 몇 년씩 그의 집에 머물게 했다. 한 달에 쌀이 한 가마니씩 들어 가난한 살림을 더욱 주름지게 해도 어머니는 싫은 내색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한 마당을 쓰던 이웃들과 음식과 정을 나누며 친형제처럼 지내셨다고 한다.
그의 중, 고등학교시절은 서울은행 수위로 일하시던 아버님의 급여로 빠듯한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야 했기에 과외나 학원은 꿈도 못 꾸었지만 초,중,고를 거치며 한번의 지각이나 결석없이 12년간을 개근하며 받은 개근상에서 보듯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1982년 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대법대 입학 후 처음에는 법관을 꿈꾸었지만, 어느날 학생회관 계단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의 진상규명과 군부독재타도를 부르짖는 학생들의 데모 현장을 처음 보고, 거기서 어느 백골단이 한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날 주머니를 뒤져 소주 몇 병을 사들고 텅빈 교정에 다시 들어와 밤새 마시고 토하고, 울고 하였다. 그리고 도저히 고시생의 길을 걸을 수 없어 운동권에 뛰어들게 되었다.
3학년 때인 1984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군부정권 치하에서 열지 못하고 있던 법대의 전통적인 행사인 형사모의재판을 부활시켰고, 국내 대학 최초로 '모의헌법재판'을 개최했다. 또한 법과대학 신문 '正義의 廣場'을 창간하고, 공법학회, 사법학회 등 법학과의 사회참여적인 모임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985년 11월,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목포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형기를 절반 정도 채운 다음 1987년 6.29 선언 이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2]
1987년에 출소한 후에는 1996년까지 어느 인쇄소에서 선반공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후, 1998년에 공채에 합격하면서 당직자로 근무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당직자로는 새천년민주당, 그리고 새년천민주당 분당 당시에는 열린우리당에서 일했고, 다시 열린우리당이 민주당 계 다른 정당에 흡수될 때까지 계속 당직자로 일했다. 이렇게 되면 운좋게 공천 기회를 잡아서 출마하거나, 험지에 나가서 출마라도 해 보거나, 아니면 당직자 몫으로 배정되는 비례대표에 나가거나 하지 않고서는 국회의원이 되기가 쉽지 않은데, 생각보다 기회를 빨리 잡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당이 멸망한 선거였다. 패배가 너무 뻔히 보였던 선거였기 때문에, 당시 한나라당 현역의원이 있어 한나라당이 유리한 곳으로 평가받던 화성시에는 민주당에서 아무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종로에서 출마한 손학규 캠프에 합류하기로 했던 이원욱은 이때 자원해서 화성시 을에 출마를 선언했다. 살아오면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지역에 출마한 결과는 당연히 보기 좋게 낙선이었다.[3]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화성시 을 지역위원장을 계속 맡아 본격적으로 지역구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이 화성시 을 지역은 그 후 동탄신도시의 완성으로 인해 점차 젊은 유권자들이 늘어나는 곳으로 변모했다. 18대 총선 당시 누구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던 선거구는 어느새 민주당계열 정당에게 제법 유리한 곳으로 바뀌었다. 이쯤되면 이 지역의 공천권을 두고 헬게이트가 일어나야 정상이었겠지만,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과정에서 이원욱은 제18대에서 자진해서 희생한 점을 인정받아 비교적 쉽게 공천장을 얻었고, 본선에서도 2위 후보와 25% 차로 격차를 벌리면서 쉽게 당선되었다.[4]
그리고 화성시 인구 증가로 선거구가 3개로 증설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화성시 을에 출마했다. 제20대 선거에서는 국민의당 후보에게 일부 표를 뺐겼음에도 5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넉넉하게 낙승하며 재선의원 고지를 밟았다.[5]
대학교 직속 선배인 정세균의 2012년 대선 후보 캠프 대변인을 맡은 적이 있다. 계파로는 현재 정세균계로 분류되고 있다.
3 트리비아
- 2015년 12월 18일 경기언론인연합회(회장 박종명)가 수여하는 ‘2015년 경기언론인연합회 의정대상’ 시상식에서 ‘국회의원 부문 의정대상’을 수상했다.
- 제19대 국회의 경제표결 분석 결과 더민주 의원들 가운데
의외로가장 보수적인 의원으로 분류되었다.[6]
- 국민의당 문병호 의원이 작성한 친노의원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로 인해 국민의당 지지자들에게 비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돌았으나, 그래도 지역구를 워낙 단단히 다져놓았기 때문인지, 제20대 총선에서 무난히 당선되었다.
- 자신의 지역구인 화성을 지역에 있는 동탄2신도시의 서울역행 M버스 개통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서 협의 끝에 6월 말로 조기개통 약속을 받아내어서 공약 하나를 당선 2주만에 이행했다.관련 기사
4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화성시 을) | 통합민주당 | 19,748 (36.4%) | 낙선 (2위)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화성시 을) | 민주통합당 | 57,004 (55.6%) | 당선 (1위) |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화성시 을) | 더불어민주당 | 43,798 (52.5%) | 당선 (1위) |
- ↑ 지금은 재개발로 신도시가 만들어진 어느 변두리 막다른 골목길 집에서 소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지금은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전형적인 70년대 골목길이었다.
- ↑ 2001년 4월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명예회복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 ↑ 한나라당 박보환 의원에게 패하였다.
- ↑ 새누리당의 리출선 후보를 꺾어 눌렀다.
- ↑ 새누리당의 오병주 후보를 꺾어 눌렀다. 한때는 새누리당에서 얼짱 20대 예비후보인 조은비 후보가 화성 을에 공천을 받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은 60세의 변호사인 오병주 후보가 화성 을에 공천을 받았다.
- ↑ 그런데 이걸 만든 pingkorea가 갖고 있는 진보-보수라는 관념이 그닥 신빙성이 없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