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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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손학규 (孫鶴圭)
출생일1947년 11월 22일
출생지미군정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학력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종교장로교
가족이윤영, 슬하 2녀
소속 정당무소속
의원 선수4
의원 대수14, 15, 16, 18
경력서강대학교 교수
민주자유당 대변인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민주당 대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역대 대한민국 경기도 도지사
30대 임창열31대 손학규32~33대 김문수
역대 보건복지부 장관
32대 이성호33대 손학규34대 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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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경기도지사 시절

공식사이트

1 개요

한국정치인. 전 학생운동가, 민주운동가, 교수.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과 제31대 경기도 도지사를 지냈고, 과거 민주당 대표를 역임하기도 한 나름 거물급 정치인이다.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강진군에서 은둔하며 지냈으나, 꾸준히 복귀설이 흘러나왔고 2016년 4월 총선 직전 더민주의 공식 복귀 요청으로 정계복귀가 유력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이후 복귀 타이밍을 못잡다(...) 2016년 10월 20일 공식적인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동시에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고, 개헌론을 언급하였다.

2 정치 투신 이전

1947년 11월 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1]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다가 초등학생 때 서울 사대문 안으로 이사갔다.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에서 교편을 잡던 아버지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렵게 자랐으나,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경기중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65학번 삼총사'로 불리우게 되는 대학 동기 친구들 김근태, 조영래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 및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다가 정학을 당하기도 했고, 특히 사카린 밀수 사건을 극렬 비판하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아 정선 함백역 일대의 탄광촌에서 광산노동자로 숨어 지내기도 했다.

졸업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참여하다가[2] 박정희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유신 정권하에서는 늘상 수배중이었던 상태여서 결국 1978년 어머니의 장례식에 몰래 참석하려다가 붙잡혀 또 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진상 조사를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갔으나, 박정희저격당하면서 가까스로 풀려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80년 그의 노동운동을 후원하던 NCCK의 도움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유학을 떠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7년 귀국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원장이 되어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했다.[3] 1988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90년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 최장집 교수 등의 진보적 소장학자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 즉,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학계를 모두 경험했다는 게 그의 강점이다.

종교는 개신교(장로교)이며, NCCK 계열의 운동에 투신한 전력을 미루어 보아 장로교 중에서도 기장 교단 출신으로 보인다.[4]

3 정치인 경력

3.1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1993년 김영삼의 제안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고 199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명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명시 을 선거구에서 재선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임창열 후보에게 패배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조세형 후보를 꺾고 3선 의원이 되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경기도 도지사로 당선되었다.

2006년 김문수에게 경기도지사 자리를 넘겨주고, 이명박, 박근혜와의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표어가 "'경제 대통령' 이명박, '민생 총리' 손학규, '책임 당대표' 박근혜"였을 정도로 당내에서 대중적 지명도는 높은 상태였다. 그러나 앞의 두 사람에 비해 진보(내지 중도) 색채가 강한데다, 영남권에 확고한 지역 기반을 지닌 박근혜, 영남권과 수도권에서 세를 불려가던 이명박에 비해 당내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5] 한나라당에서 민주계의 입지가 약화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등 소신 있는 행보를 보였던 손학규가 당에 남아 개혁을 도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셈. 때마침 김근태 등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은 민주화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손학규에게 함께 분열로 자멸해가던 여권을 재편하자고 요청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소신 있는 행보를 보였던 손학규가 참여하는 여권 재편을 지지했다. 결국 손학규는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여권 재편에 나서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에 이명박은 손학규에 대해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냉소적인 한마디를 남겼다.

이 문서의 전 버전은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았더라면 자연스레 현 시점의 대권 후보로 각광받지 않았을까 전망하는 시각으로 쓰여져 있었는데, 사실 친이계와 친박계 모두에게 '적대' 당한 손학규가 한나라당에서 버티는 선택을 했더라도 버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을거란 시각도 만만찮다. 변절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꽤 보수화됐다고 평가받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새누리당내 입지가 어떤가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3.2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결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을 주도하였다.[6] 그러나 막상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당내 경쟁자들로부터 출신을 이유로 공격받았고,[7] 대권 후보 경선에서 정동영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결과는 보수 후보인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 이와 같은 경력은 야권 정치인 손학규에게 굴레가 되어 내내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후 통합민주당의 초대 당대표가 되었으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출마했다가 종로에서만 3선에 성공한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게 패배하고, 당 또한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 강원도 춘천시의 모처에서 칩거했다. 손학규가 정계를 떠나 있던 기간은 민주당이 '뉴 민주당 플랜'을 위시해 정책상으로는 상대적으로 우경화가 진행되는 시기이지만 무상급식 전면화, 대학등록금 인하, 남북평화협정 전환, 생활형 밀착정책을 내새워 2010년 지방선거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만에 빠져 제대로 포지셔닝을 하지 못했고 2010년 7월28일 재보궐선거에서 참패를 당한다.

이에 2년만에 칩거를 깨고 2010년 10월 인천에서 열린 전당 대회에서 다시 당대표로 선출되어 보편적 복지,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8] 정계에 복귀한다. 정계 복귀 이전 100일간의 '희망 대장정'에 나서서 전국 방방곡곡의 민심을 둘러봤는데, 이때 손학규가 만들어낸 몇몇 재미있는 짤방들이 '손학규의 대모험'이라는 시리즈로 묶이며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손학규 대표 취임 이후 무상복지 3+1(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반값등록금)을 내세우는 등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색채를 보였다. 오히려 민주자유당 출신이라는 과거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진보적인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손학규 대표 당시 민주당이 모델로 삼은 건 영국의 노동당이었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해당 지역구는 당시 경기도의 강남으로 불리는 보수 정당 강세 지역으로, 민주당에는 거의 사지로 분류되던 곳이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오세응 후보가 당선된 이후 20년간 한나라당계 정당이 의석을 챙겼던 곳인데다가, 상대 후보도 유력 정치인인 강재섭 한나라당 전 대표였다.[9] 거의 반강제로 출마했으나, 기적적으로 당선되었는데, 이를 두고 손학규의 영향력 약화를 위해 친노에서 사지로 밀었다가 당선되면서 영향력만 늘었다는 평이 많이 나왔다. 야권 차기 대선 후보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등, 이때까지가 민주당 대표 손학규의 황금기였다.

오세훈 서울특별시장무상급식 시행을 두고 실시했던 주민 투표가 개표되지 못하며 사임하면서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가 이뤄지게 되었다. 무소속의 안철수, 민주당의 박영선의 대결 구도로 보였던 야권 단일화 구도는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후보직을 양보[10]하며 요동쳤다. 이후 벌어진 단일화 투표에서 박영선이 패배, 서울시장 선거에 민주당 간판이 보이지 않게 되자 대표인 손학규의 책임을 묻는 당내 여론이 제기되었다. 손학규는 열심히 박원순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선거 결과는 박원순의 승리로 끝났으나, 안철수라는 강력한 후보자가 야권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민주당은 문재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통합당과 합당하면서 민주통합당이 출범하였고, 손학규는 당대표직을 사임한다.[11]

2012년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다시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에 도전장을 내었지만,[12] 손학규는 정책이나 슬로건이 좋다는 평만 들은 채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2위로 경선을 마무리했다. 자세한 사항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선출 과정 참조.

3.3 2014년 재보선 낙선과 정계 은퇴

대선 직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을 받아 독일로 건너갔다가 2013년 9월 귀국했다. 이때 2013년 하반기 재보궐 선거 일정과 맞물렸기 때문에 출마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2014년 상반기 재보선에 또다시 '지도부 책임론'의 일환으로 경기도 수원시 병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이 지역은 무려 50여년간 새누리당계 정당의 텃밭으로, 전임인 남평우 - 남경필[13] 부자가 2대 24년에 걸쳐 지역구를 관리해 온 곳이었다. 분당 저리가라 해야 할 정도의 험지였던 셈. 더군다나, 당에서 너무 대놓고 전략공천을 했기 때문에(...) 지역주민들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포로 출마했다는 인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게 석패하였다. 이튿날인 2014년 7월 3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라남도 강진군 모처의 초막에 칩거했다.

3.4 정계 복귀 관련 설왕설래

"은퇴하신 게 아니라니까요! 정치를 은퇴했으면 저처럼 아파트에 살아요. 왜냐하면 정치를 은퇴했기 때문에 이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야 된다든가 이런 거 할 필요가 없잖아. 그냥 평범한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편하게 살면 돼. 와이프한테 잘 해 주면서." - 유시민[14]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4.29 재보궐 선거에서 전패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지도력이 손상되자, 친노무현계에 대응하는 야권 리더로서 차기 대선 주자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안철수 의원 등 비노계의 여러 의원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야권 재편이 가시화되자, 야권 대선 주자로 평가받는 손학규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렸다. 정작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여러 기자들이 강진에 찾아가서 그에게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선거가 다가오자 야권에서 장작으로 다시 쓰려고 손학규 행보만 쳐다보는 행태를 다시 보이자 김부겸 전 의원이 한 소리 했을 정도.[15]

20대 총선 기간 중인 2016년 3월 30일, 측근으로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이찬열 의원(경기 수원 갑)과 김병욱 후보(경기 성남 분당 을)을 격려 방문했다.# 총선후 정계복귀의 신호탄이라고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방문 당시 더민주 측에서 보다 광범위한 지원 유세 동참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사양하며 곧바로 강진으로 내려갔다.

더불어민주당뿐만 아니라 국민의당의 여러 후보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송태호 동아시아미래재단 이사장을 대신 보내서 김성식 전 의원을 도운게 대표적인 예.

정치권의 호사가들은 손학규 전 지사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의 뿌리인 호남에 칩거하면서 양쪽의 러브콜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것은 20대 총선에서 양당이 참패해 문재인 - 안철수 두 마리 용이 사라지고 나면 19대 대선에 출마할 마땅한 후보가 없게 되니[16] 그때 자신이 나서서 사실상 추대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행보라고 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설령 당내 세력 기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그 약점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종인 대표가 20대 총선 지원 유세에 힘을 보태달라고 도움을 청했을 때에도 손학규 전 지사는 끝내 동참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을 얻어 보란듯이 부활에 성공했고, 국민의당도 38석을 얻어 제3당으로서 견고한 위치를 점했다. 이에 따라 두 야당의 간판 대권주자인 문재인, 안철수 모두 입지가 더 튼튼해지는 반전이 일어났다.

특히 '나는 정계를 떠난 몸이다'라는 이유로, 중요하고 또 중요한 20대 총선에서 당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던 탓에, 나중의 명분 싸움에서도 '총선에서 좀 도와달라고 했을 때에도 정계 은퇴했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총선 이기고 대선 시즌 오니까 정계 복귀를 하냐'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게 됐다[17].

한 마디로 '최고의 타이밍을 노리다가 마지막 버스마저 놓쳐버린' 꼴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총선 후 한 달 여가 지난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항쟁 36주기 기념식에서 "정치의 새 판을 짜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를 두고 언론과 정계는 '사실상의 정계 복귀 선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민주 최강의 대권 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가 굳건한 당내 입지, 여론조사 선호도 1위에도 불구하고, 정작 야권의 심장부인 호남에서 지지세가 약화된 점을 파고들겠다는 계산인 걸로 보인다. 좀 정치에 관심 있는 위키러라면 알겠지만 복귀에 대한 반응이 여야 지지층을 불문하고 별로 좋지 않다

이를 두고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김홍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 교수는 "국민들께서 이미 20대 총선을 통해 새로운 판을 짜 주셨는데 무슨 새 판을 또 짠다는 것인가?"라며 손 전 지사에게 쓴소리를 했다.#

"손학규의 구차한 ‘셀프 복귀’"(주간동아 2016.6.1)

정계 복귀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본인의 평생 소망이었던 대권을 잡기엔 명분 싸움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처한 지라 이렇게 한 번 찔러보기만 하고 결국 다시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국민의당에서 그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친안계(친안철수계)에게 눌려 있었던 호남계가 안철수라는 대권 주자가 구심점으로 서 있는 친안계와는 달리 자신들은 이렇다 할 대권 주자가 없다는 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손학규 전 지사를 데려오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호남계의 리더격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은 손학규 전 지사에게 '더민주에 계속 있으면 친노 & 친문에게 눌려만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손 전 지사를 데려오고 싶다는 의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18]

여하튼 국민의당의 끈질긴 구애에도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정치 관련 발언이라고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광주 세계 웹콘텐츠 페스티벌 개막식에서 손 전 지사와 만나 "서울로 올라오셔야죠"라고 인사하자 "이제 올라가야죠"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다.

2016년 9월 20일 전남 강진군 군민 초정 강좌에서 나라를 구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던지겠다며 셀프 정계 복귀성 발언을 하였다.#

3.5 정계 복귀

2016년 10월 20일 드디어 "만덕산이 내려가라 한다"며 공식적인 정계 복귀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명운이 다한 6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제7공화국 시대를 여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밝혔다. 즉, 개헌론을 꺼내든 것. 그런데 영 타이밍이

앞으로 손학규가 자기 세력인 김성식 의원이 있는 국민의당에 입당할지, 이재오를 중심으로 하는 늘푸른한국당 창당에 참여할지, 아니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개헌을 매개로 할 신당을 창당할지 향후 정치적 행보가 주목된다.

손학규가 정계 복귀와 함께 더민주를 탈당하자, 대표적인 손학규계 의원 중 하나인 이찬열 의원도 다음날인 21일, 더민주를 탈당하였다.[19] 하지만 다른 손학규계 의원들은 탈당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내보인 상황.

4 평가

민주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만큼 보수층으로의 확장성도 있고,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도지사를 역임했다는 점에서 수도권에서의 득표력도 기대해볼 만하며, 도지사장관 재직 경험을 통해 행정 능력까지 입증했다는 점에서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받아왔다.

다만 어디에서나 당내 세력 기반이 강한 편이 아니어서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손꼽힌다. 썰전에서 이철희 소장이 말하기로는, 손학규는 대통령감이지만, 정치에 무른 편이라고 한다. 이유는 너무 신사라서 즉 정치 투쟁에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 20년 있었던 사람에게 신사라서 투쟁에 밀린다는 말은 그냥 립서비스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고, 야권의 여론을 주도하는 코어 지지층에 인기가 부족한 스타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제 70대에 들어선 고령이라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으며 하지만, 사진을 보면 너무 정정해 보이긴 한다. 보수층과 수도권에서 먹히는 강점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2014년 7.30 재보궐 선거새누리당의 신인 김용남 후보에게 깨졌다는 점[20]에서 실제 확장성에 의문이 있기는 하다.

5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3199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광명시)[21]
민주자유당41,683 (44.9%)당선 (1위)14대 국회의원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광명시 을)
신한국당31,544 (42.7%)당선 (1위)1998.4.6 사퇴
(경기지사 선거 출마)
1998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한나라당1,303,340 (45.7%)낙선 (2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광명시)
한나라당65,887 (47.4%)당선 (1위)2002.5 사퇴
(경기지사 선거 출마)
2002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한나라당1,744,291 (58.4%)당선 (1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
통합민주당31,530 (44.8%)낙선 (2위)
2011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성남시 분당구 을)[22]
통합민주당41,570 (51.0%)당선 (1위)18대 국회의원
2014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수원시 병)[23]
새정치민주연합27,979 (45.0%)낙선 (2위)정계 은퇴 선언

6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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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63년 서울시로 편입. 그러나 손학규 본인서울 출신이라는 지역 정체성보다는 경기도 출신이라는 지역 정체성이 강했기에 선거 홍보용 책자에서는 출생지로 줄곧 '경기도 시흥'으로 표기했다.
  2. 이때 같이 활동하던 사람이 소설가 황석영, 도시산업선교회의 박형규 목사.
  3. 이 시기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4. 언론에서는 기장 교단 소속인 서울제일교회 집사로 보도하고 있다.
  5. 실제 손학규의 탈당 시 한나라당에서 단 한 명(이찬열)만이 손학규의 뒤를 따랐다. 도지사 출신 유력 정치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딜레마인데, 잘 수행하면 국정 운영 능력이 검증됐다고 평가받지만, 당내 기반은 약해진다.
  6.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교감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애초에 경력 자체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두루 거치며 김근태에 버금가는 야권의 성골에 해당하기도 했고, 정견상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다. 거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참여 정부로부터 상처를 꽤 많이 받았던 대북송금특검 당시, 손학규가 소속 정당이 달랐음에도 특검 철회를 주장하는 등 소신 있는 행보를 보인 것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7. 이는 지금까지도 손학규를 공격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한나라당에서 나오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8. 교수 시절 최장집과 교류했다는 기술을 보았을 텐데, 이 역시 최장집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최장집은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손학규를 지지한 바 있다.
  9. 이전 항목에는 친이계로 표기되었는데, 이명박한테 쥐어박힐 뻔한 사람을 어떻게 친이계로 볼수 있는지 의문.
  10. 사실, 양보가 아니었다.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는 안철수를 대신해서 윤여준이 대신 출마선언을 해줬는데, 그 주 주말에 부산 본가를 다녀온 안철수가 없던 걸로 하겠다고 한 것. 이에 놀란 윤여준이 거듭 설득해도 완고하게 버티자 '그러면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는 이벤트라도 만들자. 그만두더라도 모양새는 좋아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해 양보라는 그림이 그려진 것.출처 표기 요망
  11. 민주당 내 반대 인사들을 누르고 야권통합을 강경하게 밀어붙인 인물이 바로 손학규였다. 다만 통합하면서 통합 지분을 시민통합당 측에 거의 퍼주다시피 하면서 범친노세력이 매우 강성해졌고 이후 전당대회 등을 거치며 본인의 영향력은 쪼그라들다시피 했다.
  12. 당시 박근혜 후보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를 각각 선거 구호로 내세웠다.
  13. 현 경기도지사.
  14. 썰전 160회(2016년 3월 31일 방영)에서 손학규 은퇴와 관련해 한 발언으로 출연진 모두가 이 말을 듣자마자 수긍한다.
  15. 사실 김부겸도 따지고 보면 한나라당 출신 딱지 떼려고 사지인 대구에서 박박 기고 있는 상황이니 동병상련이 생길 만한 상황이다. 그나마 김부겸은 이제 꽤나 대접 받고 다니지만, 손학규는 뭐...
  16. 물론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 등이 있지만 모두 중요한 광역단체장 자리를 맡고 있다. 대선 출마를 위해 직책을 희생할 경우 운이 나쁘면 경남도지사 사퇴 후 긴 침체기를 겪었던 김두관 의원 꼴이 날 수도 있다.
  17. 종전 서술에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에서 손학규 측근으로 분류되던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손학규 측근이랄 사람은 사실상 없다. 한나라당에서 탈당할 때에도 함께한 국회의원은 없었다.
  18. 그간 호남계는 대권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당권도 안철수 측에게 거의 다 내준 상태였는데, 김수민 & 박선숙 리베이트 사건이 터져 안철수 & 천정배 체제가 붕괴되고 박지원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들어서자 당권을 장악할 기회를 잡게 됐다. 당권을 잡았으니 이제 대권에서도 욕심을 내볼 만한 형편이 된 것이다. 하지만 호남계에는 경쟁력 있는 대권 주자가 한 명도 없다. 박지원 본인은 너무 고령일 뿐더러 구시대 정치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전남 강진에서 칩거 생활을 하며 겉으로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본인 고향도 아닐 뿐더러 더민주국민의당의 뿌리이기도 한 호남에서 칩거하며 '백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메세지를 넌지시 남긴 손학규 전 지사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19. 그 역시 과거 한나라당 소속이었다가 2007년 손학규를 따라 탈당했다.
  20. 물론 상술한 대로 수원 병 선거구는 故 남평우 - 남경필 부자의 근거지였던 곳이라 어느 야당의 인물이 출마했어도 이기기 힘든 지역이었다. 그런데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후보가 당선되며 마침내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입성하게 됐다.
  21. 전임자 윤항렬 의원 작고
  22. 전임자 임태희 청와대 대통령실장 임명으로 사퇴
  23. 전임자 남경필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로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