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군인)

李鍾九

대한민국 육군제2작전사령관
21대 오자복22대 이종구23대 민경배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26대 박희도27대 이종구28대 이진삼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27대 이상훈28대 이종구29대 최세창

1 개요

대한민국군인(예비역 대장), 관료. 1935년 11월 21일 경상북도 칠곡군 출생.

1958년 육군사관학교 14기로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으며 보안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1990년 10월 8일부터 1991년 12월 20일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다.

2 하나회의 황태자

12.12 군사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회의 중심 인물로 잘 거론되지 않으나 '하나회의 황태자'라 불린 하나회 최고 수혜자 중 한 명이다. 쿠데타 당시 동해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지방 근무중이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하나회 회장 전두환 등 11기, 12기, 13기 선배들과 후배들을 이어주고 조직을 관리하는 하나회의 총무였으며, 영남 출신이자 전두환의 직계였기 때문에 한국군 역사상 제일 화려한 출세 가도를 달렸다.

동해경비사령부 참모장이라는 한직에 있던 그의 12.12 군사반란 이후 출세 가도는 다음과 같다. 작전 요직인 육군본부 작전처장, 이후 서울에 출동하는 충정 부대의 지휘관으로 요직인 20사단장, 그리고 중장 보직은 명실상부한 군사 정권의 핵심 요직 수도방위사령관과 기무사령관을 둘 다 지냈고, 대장으로 진급한 후에는 제2작전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을 연이어 역임했다. 군사정권 하에서 정권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자리를 모두 꿰차며 거침 없이 승승장구한 것이다.

군사정권에서 육군의 실세 of 실세라 할 수 있는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을 모두 역임한 인물은 군 역사상 이종구가 유일하다. 또한 관례상 육군참모총장 전역 후 통상 어느 정도 공백 기간을 두고 국방부장관에 임명하는데, 그는 불과 전역한지 4개월만에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만큼 하나회의 핵심 인사였으며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전두환계 선두주자들로 꼽히는 하나회 12기 선두주자 박희도나 하나회 13기 선두주자 최세창이 노태우가 집권한 후 전두환계 군맥 정리를 위해 숙청당할 때도, 이종구는 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에 연거푸 오르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이는 노태우 입장에서 하나회 조직의 핵심이며 영남계 보스인 이종구까지 숙청하는건 부담스러웠고, 비록 전두환의 직계지만 고교 후배였던 이종구는 노태우에게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군부 내 막강한 파워에 더불어 본인의 추진력도 강해 보직을 거칠 때마다 예산이 들어가는 많은 개편 사업들을 성공시켰다. 20사단을 기계화 부대로 개편하고, 수도경비사령부를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했으며, 약체화되어있던 제2작전사령부에 후방 군단 2개를 창설하고 방위병 월급제를 도입했으며, 육군 본부에 밀리던 국방부와 합참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했다.

국방부장관 시절 1기수 후임인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진삼과 극렬하게 대립했는데 이 것은 승승장구하던 이종구의 커리어가 끝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전두환계 군맥, 영남계 군맥의 보스라 할 수 있는 이종구와 달리 이진삼은 노태우의 직속 부하 출신으로 노태우계 군맥, 충청계 군맥의 보스였다. 이진삼은 5공화국에서는 노태우에 대한 견제로 한직을 멤돌았으나 노태우 집권 이후 9.9 인맥의 수장격으로 승승장구하여 참모총장까지 오른 케이스. 양 파벌의 보스였던 둘은 육군에 대한 국방부 장관의 권한 문제를 두고 극렬하게 대립했다. [1]

막말까지 주고받을만큼 극심했던 이 대립은 이진삼이 임기 만료 6개월을 앞두고 경질되면서 이종구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보름 뒤에 이종구도 국방장관 직에서 교체된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이대로 이종구를 놔둘경우 지나친 파워를 갖게될 것에 대한 노태우의 견제 의도였던 듯 하다. 이진삼은 참모총장 경질 이후에도 입각하여 체육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이종구는 이후 야인으로 남게 되며 화려했던 커리어를 마친다. 그리고 하나회를 대숙청하고 단죄했던 김영삼 정부 하에서 비리 혐의로 구속당했다. [2]

3 국방장관 시절

그의 국방장관 재임기는 북핵 문제가 처음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하던 시기인데, 1991년 한 간담회에서 "북핵 문제가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군사적인 특수 조치가 요구될 것이다. 그 방식은 엔테베 작전을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발언해서 국내외적으로 한때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북핵 위협에 대한 군사적 선제타격'을 처음 공개석상에서 거론한 사례였던 셈.

하지만 논란이 계속되자, 그해 10월의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전쟁을 막으려고 또 다른 전쟁을 감수할 수는 없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후 국방장관직을 떠나고 나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엔테베 발언'이 "북핵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국내외에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의도된 발언이었음을 인정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이종구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당시만 해도 국방부 장관보다는 육군 참모총장의 권한이 훨씬 컸다. 하지만, 이종구는 국방부 장관이 된 후 국방개혁의 흐름을 틈타 장관의 권한을 확대하려 했다.
  2. 소울 메이트 이진삼도 함께 구속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