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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 | ||
1934년 ~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기간 | 1956년 ~ 1988년 | |
임관 | 육사 12기 | |
최종계급 | 대장 | |
최종보직 | 육군참모총장 |
대한민국 육군의 제3야전군사령관 | ||||
7대 정호용 | → | 8대 박희도 | → | 9대 최세창 |
대한민국 육군의 참모총장 | ||||
25대 정호용 | → | 26대 박희도 | → | 27대 이종구 |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가, 종교인(불교)이다. 12.12 군사반란 가담자 중 한명으로 전두환 하수인. 개인적으로 아주 독실한 불자라고 한다.
2 일생
2.1 어린 시절
1934년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직속선배가 김수한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다.
2.2 군인 시절
1956년 3월 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했다. 한 기수 선배인 전두환과는 생도시절부터 깊은 친분을 쌓아온 사이로 전두환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1960년대 중반에 하나회에 가입했다.
하나회에서 박희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에서는 그 노태우 바로 옆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1975년 준장에 진급하자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추천으로 1공수특전여단장에 부임했다. 사실 박희도가 준장에 진급한 것도 정병주 장군이 진급심사에서 박희도를 준장으로 진급시키는데 크게 도움을 줬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박희도가 1공수특전여단장에 부임한 지 1년만인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노재현 당시 합동참모본부장에게 시켜서 박희도를 몰래 만난 뒤 보복작전을 지시했다. 작전명령은 판문점 뒤에 있는 북한의 불법초소 4개를 완파하는 내용이였다. 이에 박희도는 김종헌 소령을 특공대장으로 임명한 64명의 특공대원을 특전사 1여단에서 차출해서 권총과는 별개로 개인화기를 지참시켰다. 이에 주한미군 겸 유엔군사령부[1] 사령관인 리처드 스틸웰 미 육군 대장이 이에 분노하여 박희도를 몰아세웠다. 그러자 박희도는 오히려 성질을 내며 "이보시오, 지금 이게 스포츠인 줄 아시오?"라며 스틸웰 대장에게 반박하고 당초 계획대로 개인화기를 지참하고 작전을 실행했다. 미국 측에서 대단히 분노하여 박희도를 보직해임 시킬 것을 강요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측을 잘 달래서 이 사건을 무마시켰다. 사실 먼저 쳐들어온 쪽이 북한이었고 작전지시를 내린 사람이 박 대통령 본인이었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게 무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의 비호를 받은 바 있는 박희도는 이번에는 진짜 위기가 찾아왔다. 1978년 북한에서는 무장공비를 파견하여 서산앞바다에서 군사기밀을 캐가고 1공수특전여단의 위수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닌 뒤 임진강을 건너 복귀하는 데에 성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인하여 박희도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이세호 대장에게 격렬하게 문책을 받았고 쪼인트를 까이는 등 말이 아니였다. 이세호는 머리끝까지 빡쳐서 박희도의 군복을 벗겨버리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때 또다시 정병주가 나서서 이세호에게 그래도 대통령이 특별히 지시한 작전을 완수한 지휘관이고 하니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진짜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버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박희도는 군복을 벗고 징역을 살 위기를 정병주가 보호해줘서 겨우 넘겼다.
그러나 1년 후 박희도는 이렇게나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는 최고의 은인인 정병주를 배신했다.
1979년 1공수특전여단장(준장) 신분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였다. 박희도는 당시 국방장관인 노재현 장관을 납치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불법점거했다. 그렇게 하여 반란을 진압할 요소를 초기에 제거함으로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쪽도 못쓰게 만들어버렸다.
박희도는 이 공로로 그 해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26기계화보병사단장에 부임했다. 그 이후 1년도 못가서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11기 선배 정호용의 후임으로 특전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당시 박희도, 보안사령관 박준병, 수경사령관 박세직을 일컬어 제5공화국 군부 실세 '쓰리박'으로 군부 내에서 무소불위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 후 제3야전군사령관을 거치고 1985년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했다. 육군참모총장 시절인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전두환의 군맥 제거에 의해 1988년 6월 임기를 6개월 앞두고 보직해임 후 현역부적합 판정을 받아 전역했다.
박희도는 12.12 쿠데타의 주역이면서도 정치인이 된 적은 없었으며 계속 군인으로만 남았다. 두 차례 총선 출마를 시도하긴 했지만 한 번(14대 총선)은 공천이 거의 유력했다가 탈락했고 한 번은 12.12쿠데타 단죄로 불발.
2.3 예편 이후
1994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12.12 쿠데타에 대한 혐의로 인하여 징역을 살다가 석방되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상임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2014년 12월 대한민국불교도총연합 상임고문 자격으로 통합 진보당 해산 촉구를 주도했다.- ↑ 이전 문서에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이라고 썼는데, 한미연합사는 1978년에 창설되었다. 그 이전의 주한미군 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 자격으로 한국군과 주한미군에 대한 총괄 작전권을 행사했다.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