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

1 명나라의 인물

李宗城
생몰년도 미상

명나라의 인물. 자는 규약(葵嶽). 이신공의 아들. 명나라의 개국공신인 이문충의 후손이다.

남직예 봉양부 우이 사람으로 부귀한 집안의 자제였지만 겁이 많았으며,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천거를 통해 도독첨사에 임명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심유경의 공작으로 거짓 강화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책봉하기 위한 정사가 되어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595년 4월에 한양으로 들어왔고 일본군에게 사람을 보내 바다를 건너 돌아가라고 재촉했으며, 9월에 부산에 도착해 고니시를 만나려고 했지만 고니시는 만나러 오지 않고 일본으로 귀국했다가 관백(히데요시)에게 보고해 결정이 내려진 후에 사신을 맞이하겠다고 했다.

어느 사람이 일본에서는 봉작을 받을 의사가 없는데다가 자신들을 유인해 가두어 욕을 보이려고 한다고 하자 이종성은 이를 두려워해 밤 중에 평복 차림으로 변장해 일본군의 진영을 탈출해 함께 온 사람과 짐들을 모두 버린 채로 도망갔다. 일본군에서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 이를 알아내 이종성을 쫓아 양산의 석교까지 이르렀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종성이 달아나면서 뒤를 이어서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부사 양방형이 정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종성은 큰 길로 다닐 수 없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경주를 통해 서쪽으로 도망쳤다.

2 조선의 인물

李宗城
1692년 ~ 1759년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이다. 백사 이항복(恒福)의 5세손이다.

소론의 대신이었다.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53년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던 김상로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잘 보살폈다. 이후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야사로 왕통이 어지럽혀질 뻔한 일을 막은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평소 알고 지내던 궁궐 수문장[1]에게 "어느 노비가 보자기로 싼 음식 바구니를 들고 올텐데 이유를 불문하고 그 바구니를 칼로 베어 버려라"라고 엄히 명했다. 이종성의 말대로 한 여자 노비가 바구니를 가져오자 수문장은 단칼에 베어버렸는데, 그 안에는 한 갓난아기가 죽어 있었다. 알고 보니 궁 안의 한 후궁이 자신이 왕의 아들을 임신한 척하고 바깥에서 아기를 데려와서 왕자로 삼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이를 이종성이 알고 막은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이종성의 혜안에 감탄했다고 한다.

3 대한민국의 정치인

3.1 1889년생

李宗聖
1889년 00월 00일 ~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해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다.

3.2 1924년생

이종성(1924) 문서로.

3.3 1948년생

李鐘成
1948년 05월 24일 ~

2004년 제16대 국회 임기 말에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승계하였다.

4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이종성(축구선수) 문서로.
  1. 이 수문장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하루는 이종성이 평복 차림으로 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우연히 기골이 장대하고 대범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무과에는 급제했으나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와서 벼슬을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종성은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저동(苧洞) 사는 이 중추부사가 사람에게 공정하다고 하니 그에게 부탁하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주저하다가 혹시나 해서 이종성이 알려준 집으로 가서 중추부사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중추부사 대감이 바로 이종성이었다. 무례를 범했다며 용서를 구하자 이종성은 오히려 젊은이가 마음에 들어서 이리 한 것이라며 그를 궁의 수문장으로 일하게 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