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세대

1 개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이해찬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대입제도 변화를 예고했을 때 그 대상이 되었던 학생들을 일컫는 말.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이 1999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학생들부터 대입제도를 바꾸려고 했기에, 200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1]들(현역 기준 02학번)이 이해찬 1세대, 2003년에 졸업한 학생[2]들(현역 기준 03학번)이 이해찬 2세대가 된다. 입시 정책의 유사성 때문에 1985년생과 빠른 1986년생(1-2월생)까지를 이해찬3세대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나, 2002년도 수능전설을 고1때 옆에서 지켜봄으로 인해 충분히 대비할 여유가 있어서 잘 언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후술할 내용에 의하면 아무리 대비할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이후의 여파가 계속괸 점과 85년생 바로 아래 학년부터 교육과정이 바뀐 점 때문에 넓게 보면 2004년에 졸업한 학생까지 이해찬 3세대로 간주할 수 있다.

이해찬은 1999년에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대학교 입시 목적으로 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시행되던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고사,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하는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다. 당초에는 중학교에서도 시행되던 연합고사와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까지 폐지하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하려 하였으나, 교육계의 반발에 부딪혀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고교 교육 정상화 차원의 새로운 대입제도를 마련해 당시 교육부에서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으로 바뀐다."고 발표했다. 또한, 야간자율학습을 비롯한 각 학교별 입시 준비 대책을 일률적으로 지침을 내려 통제했다. 그리하여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들은 그 이전 세대들보다 상대적으로 편한 분위기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공부를 덜 하는 분위기로 변하게 되었다.

이해찬 세대에 대한 비판은 교육부 장관으로서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한 이해찬에 대한 반발로서 과장된 면이 있다. 특히 교원 정년을 단축하고, 촌지신고센터를 만들고, 학교운영위원회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이 기득권을 일부 빼앗긴 교사들의 많은 반발을 가져와서 이해찬이 교사 사회의 공적이 되었고, 학력저하는 공적 이해찬을 까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사실 이해찬 장관 시절에 실시된 교육과정 등 정책의 많은 부분은 훨씬 이전부터 계획되어 온 내용이었다.

2 예기치 않은 격렬한 반발

이런 저런 이유로 수시 전형이 도입[3]되기는 했으나 결코 특기 하나만 잘 하면 대학에 가는 제도변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찬 1세대가 응시한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이전 몇 년과 비교했을 때 가장 어렵게 출제됨으로써 학생들의 점수가 폭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물론 꾸준히 공부했던 학생들에게는 개이득.

이 때 KICE의 난이도 조절 실패와 더불어, 소위 '이해찬 세대'들의 학력저하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학력이 낮다는 건 단순 수능점수로 비교해 볼 때, 그 전 세대에 비해 낮았다. 이 때 당시 학생들과 재수생들과 비교, 같은 난이도의 시험을 본다고 할 때 절대로 이 때 학생들이 재수생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성적을 낼 수 있을거라고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4] 그 이유는 수업내용도 쉬운 수능에 맞춰져 있었는데 그에 반해 재수생들은 어려운 것도 대비하여서 더 어렵게 했다. 이 때 수능점수의 큰 특징이 재수생 강세였는데, 그 이유가 수능 난이도가 말 그대로 미친 난이도라서 이런 특징이 나타났다. 2001년까지 쉬운 난이도의 수능 때문에 느슨한 분위기의 학업 분위기 등이 조성되며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학은 개나 소나 다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도 이 시기였다.

다만, 재수생 강세현상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해찬 세대의 학력저하 근거로 재수생 강세를 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평가원 통계자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재수생 강세는 그 이전 세대에도 계속 있었다. 수능이 쉬워지면서 서서히 공부하는 강도가 갈수록 낮아저 갔기 때문이다. 물론 재수를 한다고 해서 로또 수준의 대박을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02년만의 일은 아님을 평가원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이 때가 그 전에 비해 두드러지도록 강하게 나타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논의로, "재수생 강세 현상이 02학번 때 유달리 심했는가?" 하는 문제점이 나오는데, 수능 난이도와 점수분포가 해마다 다르므로 연도별 재수생과 고3의 점수 격차는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다. 결국, 이해찬 세대와 그 이전 세대의 학력격차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는 마땅히 찾기 힘든 실정이다. 때에는 쉬운 수능이 정착한 지 몇 년이 흐른 시점이라 재수생들도 쉬운 수능이 익숙해진 상태여서 02 수능은 재수생 혹은 그 이상에게도 근래 최고 어려운 수능이었다. 하지만, 재수생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렵게 공부한 사람들도 있던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이 세대는 고등학교 선생님[5]들 조차 "공부 안 한 녀석들이 왔다."고 기피했던 세대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얘기를 더 하자면, 그 전년도와 레벨이 다른 난이도로 인해 부작용이 심각했다. 수능점수 때문에 너무 쓸 데가 없어서 미친 척하고 서울대를 넣었는데 인원미달로 합격통지서를 받은 놈이 있다는 소문[6]이 돌 지경으로 하향지원이 심각했다. 이 때, 수능은 400점 만점이었는데 모의고사 대비 100점 넘게 떨어진 학생들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었다. 이런 학생들이 자살을 했다거나, 자살 소동을 피웠다는 언론 보도나 소문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이런 것은 수능 끝난 입장에서 들어도 의외로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다. 자기 학교나 자기 반에서 그러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거의 모든 학생이 피부에 와 닿았다는 게 문제다. 이들 상당수는 재수하러 갔고 일단 학교 써 놓고 편입을 알아 보기도 했다. 남자같은 경우 그냥 군대 간 케이스도 많았다. 심지어는 수시를 합격하고, 수능 점수가 안 나와서 대학에 떨어지고 울며 겨자먹기로 재수의 길로 들어서는 학생들도 많았다. 참고로 서울대 수시 합격자의 수능 커트라인은 340점 정도였는데, 대개 서울대로 원서를 낼 학생들은 380~390점대 이상으로 점수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냐면 서울대 갈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 그저 남들 점수 하락 폭 만큼 점수가 떨어져서 재수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어떤 교사도 이런 결과를 예상 못 했기에 일단 수시에 합격한 학생들은 대게 놀았다. 그리고 결과는 망했다.

때문에, 수학능력시험 끝나기 무섭게 정말 혼돈의 카오스가 눈앞에 펄쳐졌다. 논술준비고 면접이고 뭐고 당장 원서를 넣어야 하는데, 도무지 어디다가 원서를 넣어야 될지 모르겠는 상황이 닥쳤다. 수능 성적이 좋든, 망쳤든간에 그 해 수능을 봤던 모든 학생들이 말이다. 원서를 쓰기 위한 모든 자료 및 데이터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정말로 현실에서 펄쳐졌고, 결국 학생들은 혼돈의 상황 속에서 안전만을 추구했고 하향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대학가서도 안전을 위해 공무원에 올인 하는 안전추구 세대 탄생, 농담이 아니다.

이 결과로 일어난 하향지원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도무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동기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었고, 상당수 학생들이 미래의 진로에 큰 혼선을 빚었다. 하향지원한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포기하고 다시 재수생의 길로 들어서거나, 편입을 알아 보는 사람도 꽤 많았다. 이 때 고3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더 좋은 학교 갈 수 있는 애들이 원서를 너무 쓰지 않는다."라면서 답답해 하기도 했다.

차라리 수능이라도 적당한 난이도로 내놓았다면, "단군이래 최저 학력이네, 뭐네." 하는 욕의 80%~90%는 안 들었을 지도 모른다. 설령 진짜로 낮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전년도까지의 성적과 구분이 잘 안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상당수 혼선도 피해갔을 것이다. 설령 혼돈의 카오스가 펄쳐졌어도 적어도 이것보다 자살자는 덜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이로 인한 여파는 2003년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이 뒤 몇년간 수능은 재수생들의 강세였는데, "특기 한가지만 잘 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라는 분위기 아래 공부한 것은 당시의 고등학생들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이 발표될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 중에서는 교육부의 그 말만 믿고 상대적으로 이전 세대보다 느슨하게 공부를 시켰는데, 후에 입시정책 등을 알아보니 그게 아니라서 뒤통수를 맞은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2002년도 수능 이후 몇 년간 수능 본 학생들은 해놓은 공부가 없는 데 해야 될 공부는 자비심없이 많아지는 상황이 닥쳤다. 게다가 예상대로 이 뒤 수능들의 난이도도 별로 줄어들지 않아서...

3 이해찬 세대가 남긴 것들

한줄요약 : 이제부턴 정말 공부뿐이야.

기성언론, 교사들, 그리고 일방적으로 그런 주장만 들어온 학부모나 학생[7]의 인식하는 "단군이래 최저학력"은 지나치게 축약돼서 제대로 된 내막을 전달하지 못한다.

이해찬의 정책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당시의 정책이 삽질만은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일단, 옛 본고사 시절과는 달리 시험과 경시대회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전문성과 창의성을 배양하는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서울대학교에 가는 1%만을 위해 나머지 99%가 좌절하는 이른바 "최상위권을 위한 교육"보다는, 제각기 다른 특기를 가진 학생들에게 다양한 진로를 열어주는 교육이 더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는 있었다. 다만 그 잘한다는 기준이 학생들 생각보다 한참 높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연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안도 미키 정도는 돼야 잘 한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뜻했으니까. 뭐라고? 세계 1등까지는 할 필요없고 전국 3등정도 할 수 있는 실력 참 쉽구나(...) 그 전에는 세계 1등을 해도 대학 못 갔다는 이야기인가 결국, 이해찬 세대의 교훈은 진짜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길이었음을 상기시켜준 것이었다.

물론 인서울지잡대의 간극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까닭이 유독 이해찬 세대에서만 기인하는 문제점은 아니다. 이러한 양극화는 특정 세대의 부진이 문제라기보다는, 김영삼 정권 시절 사립학교 자율화 법안이 생겨난 후 김대중 정권 들어서 더욱 확대 개정된 대학 설립 자유화가 더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아니, 대학가고 싶다고 소원을 빌길래 대학을 많이 만들게 해줘서 이루어줬는데 그 결과 00년대 이후부터 어중이 떠중이 대학들이 지방에 난립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대학 진학'보다는 '어떤 대학'이냐를 지상과제로 삼기 시작했다. 이처럼 "개개인의 스펙보다 명문대학 출신 졸업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병폐개선을 선행하지 않고서야, 정책의 실패만을 탓할 수는 없다."라는 것이다.

일단, 이해찬 세대를 겪은 당사자들이 전후 세대에 비해 대학입시에 있어서 혼선으로 갈팡질팡하고 곤혹을 치렀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대학 진학이 더욱 까다로웠던 60~70년대 기준으로 보면 80~90년대 세대들에게도 "학력이 떨어진다."라는 비판이 가해졌던 적이 있었다. 물론, 농사 짓는 사람들이 태반이라서 대학 진학률이 떨어졌던 당시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겠지만, 이런 문제점이 굳이 이해찬 세대만을 기형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해찬 세대가 지나고 한참 뒤인 08년도 수능을 치른 08학번 세대들 역시 이른바 수능 등급제라는 괴랄맞은 정책으로 인해 겪은 혼란이 결코 이해찬 세대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 70, 80년 세대보다 오히려 90, 00년 세대가 미국의 유수한 명문대들을 더 많이 진학했다는 것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교육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낙인을 찍을 수도 없다..라는 주장도 있지만, 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국민소득이 올라 자비유학이 많아졌고, 군미필자와 미성년자의 해외여행, 유학 제약도 크게 줄었다는 차이가 있다[8]. 교육제도탓을 하지 말자는 의도라면 오히려, "콩심은 데 콩난다"는 속담이 적절한 묘사일 수 있다. 고등학생의 상위 20%미만이 대학진학하던 시대에서 고등학생의 상위 40%미만이 대학진학하던 시대가 되고, 다시 고등학생의 상위 60%이상이 대학진학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입학생의 평균 지능과 학습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해찬 시절의 정책으로 미미한 논술 비중과 수능 영역별 반영 덕에 상대적으로 수험 부담이 경감되기는 했었다[9]. 결과적으로는 정책시행 이후 온갖 영역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고질적인 병폐인 사교육이 범람했고 소득별 학력격차도 벌어졌다.참고자료. 물론, 이에 대해서도 정작 성실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불이익을 본다는 역차별 논란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농어촌은 교육여건이 매우 낙후되어 있는 까닭에 특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어려운 것은 나만 어려운게 아니다.

당시 언론의 비판은 크게 두가지 논조를 띄었는데, 첫째, 학력저하로 신입생들이 대학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므로 수능의 변별력을 강화해야한다는 것. 둘째, 특목고 학생들이 내신의 과도한 반영으로 말미암아 대학 진학에 손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나름대로 당위성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대학의 서열화'를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10].

언론의 주요 구성원들은 이 학벌의 수혜자이자 장차 자식들에게 동일한 기득권을 기대하는 계층이며, 그러한 계층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한다. 그런 이유로 당시 정책에 대한 공격은 그들의 사익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세대들이 미국의 유수한 명문대들을 입학한 것만으로도 단순한 성적으로 모든 대학의 지원 가능성을 결정짓는 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의대는 수능 1등부터 2천등의 인재를 전부 가져가야하고, 정말 최상위권의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한 물리학, 컴퓨터공학, 통계학등 과학분야는 수능 2천등부터 3천등까지의 인재들이 책임지도록 서열구조가 갈리는 것이 사회의 건전함에 부합하는 정책일까?[11] 미국에서 아이비 리그 입학생들의 성적이 SAT 점수 층위와 완벽히 일치하던가?[12] 그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던가? 인재 풀이 사회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분배되어야 하는 당위성은 어디있는가? 적어도 당시 언론들이나 어르신들이나 이런 부분에는 당연히 알면서도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고 모르는 척을 했다. 핀란드의 교육정책처럼 "우리는 인구가 적기 때문에, 이 아이의 재능도 필요하고 저 아이의 재능도 필요하다. 저 아이는 수학을 못 하더라도 체육은 잘하니까 다른 재능을 키워줘야한다."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고, "그저 2000등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놈들은 전부 낙오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유가 뭐겠어? 자기네들이 공부 안 하거든.

물론, 이러한 서열화는 비단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인지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막막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고 대한민국은 특히 부존자원 빈국이라는 특성상 인적자원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지만, 일률적인 점수로 줄세우기는 항상 문제시되었던 부분이고, 그래도 이해찬 시절의 정책이 취지상으로나마 '성적보다 특기를 존중하는 입시'를 표방했던 점에서는 의의를 삼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정책이 갖는 한계는 명확하다. 이 역시도 결국 '입시'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탓에, '학업 위주의 입시' 대신 '특기가 포함된 입시'로 바꿔놓았을 뿐이라는 비판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특기만 가지고 대학에 들어 갈 수 있는 학생 자체가 적었다. 그 탓에 사실상 특기는 입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수능 문제의 난이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모의고사보다 전체 평균이 60점 가량 하락하였고, 특히 중상위권 학생들의 타격이 심하여 수능이 끝나기 무섭게 혼돈의 도가니탕.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입시제도에 피해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버린 셈이다.

결국, 앞서 언급한 명확한 서열로 기득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학부모의 불안감과 갑작스런 난이도 상승이라는 당시 수험생들의 트라우마가 결합하여 입시제도 중에서 역대급이자 최악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낳은 것이다. 이 때의 여론 폭격의 논지는 차라리 수능 등급제가 맞아야 할 비난에 더 적합하다.

다만, 이해찬의 교육방침은 과도한 공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취지에 급급한 나머지 종래와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의 변화,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측면을 무시한 결과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해찬 세대' 교육정책의 특징은 이전 탈법적으로 자행되던 보충수업 팽창 등 비정상적인 현장 행태의 수정 시도에 있었을 뿐, 정기적으로 관리 및 수정되는 교육과정 자체를 변경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다 국가관리 시험의 난이도 조절 실패는 이전부터 끊임없이 벌어진 것으로, 400점 만점 수능 도입 이후에도 상위권 대학의 배치 기준선이 50점씩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령 97학년도의 법-의대 이외의 서울대 학과는 대체로 수능 300점 수준이면 합격을 노릴 수 있었지만, 98학년도는 350점 이하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정책과는 별도로 인터넷 강의가 사교육시장에서 태동하던 시기였다.메가스터디전설의 시작 다만 이때는 초창기라 수강료가 메가빼고... 근데 그 메가조차 지금 인강 수강료랑 비교하면...굉장히 쌌다. 지금은 사라진 JnJ에듀의 경우 2003년도에 강좌당 2만원 안팍정도 되었다 이 저렴한 강의료로 강남, 대치, 노량진 일대의 학원강의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 강의 문서에서 언급한 사교육시장을 축소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가격이 너무 올라서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4 일본의 경우

일본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유토리 세대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80년대의 강압적 교육을 탈피하고 보다 전인적인 교육을 실현하자는 취지 하에서 교육을 받은 세대인데, 물론 이 경우도 취지는 좋았으나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비록, 한국과 같은 극심한 입시 혼란은 없었으나 대신 필수과목에 대한 이수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심지어 일본어에서 필수인 한자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학생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고 한다. 또한, 정서적으로도 이른바 잇쇼겐메이라는 장인정신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들의 통념을 충족하지 못하여, "권리만 알고 의무는 모른다", "직접적인 대화를 꺼리고 휴대기기에만 의존한다",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모른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건 교육과 관계없이 그냥 젊은이들을 까는 주장들 같지만 이는 달리 말해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의식이 서구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어른들은 말이 안 통한다.

다만, 이해찬 세대는 고작 3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아 당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80년대 중반 태생 및 그 부모들을 제외하면 영향이 미미한 것에 비해, 유토리 교육은 이보다 몇 배는 훨씬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 2010년이 들어서야 겨우 반발에 밀려서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아직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또한, 유토리 세대란 단어의 의미까지도 보다 확장되어서, 흔히 한국에서 쓰이는 초딩이라는 비아냥처럼 기초 문법도 모른다거나 기본 상식이 부족하거나 하는 상대에게 '너 유토리 세대라서 가방끈 짧지?'하는 식으로 많이 쓰인다.

그리고 이해찬 세대와 유토리 세대는 어감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해찬 세대는 "시대를 잘못 만나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수험생들이 딱하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만, 유토리 세대는 "당국에서 방임해주니까 좋다고 놀더니만 결국 국가경쟁력은 국가경쟁력대로 떨어졌네, 꼴 좋다"고 보는 조롱조의 뉘앙스가 훨씬 강하다. 실제로, 일본 웹상에서 유토리라는 표현은 멍청이라는 말과 동급이다. 이해찬 세대는 정책적 혼선으로 인해 험하게 구르기는 했지만, 적어도 자기발전 및 미래에 대한 진취성을 잃지는 않았고, 유토리 세대와 달리 이해찬 시절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그러니까 유토리 세대에 비하면 이해찬 시절은 '찰나'였던 것이 한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번역물에서는 유토리 세대를 그대로 유토리라 표기하는 경우와 이해찬 세대라고 옮겨놓은 경우가 반반이다. 다만, 이 번역이 당연히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토리와 이해찬 세대의 뜻은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1. 일반적으로 1983년 3월 ~ 1984년 2월 생.
  2. 1984년 3월 ~ 1985년 2월 생.
  3. 수시 전형이 02학번부터 도입되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수시 제도가 02학번 때에 본격적으로 정형화되어 시행된 것일 뿐, 수시전형 혹은 그와 유사한 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서울대는 98년부터 이미 현재의 수시제도와 유사한, 학생부 위주의 고교장추천전형을 실시하고 있었으며("서울대 60년사" 참조) 연세대 역시 2001학년도 입시계획에서 수시모집으로 정원의 30퍼센트를 뽑는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4. 의외지만, 대개 재수를 한다고 해서 성적이 더 올라가거나 인생역전 수준의 성적을 뽑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은 매우 적다.
  5. 각 고등학교마다 고3을 전담마크 하던 선생님들이 알아서 1,2 학년으로 도망간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6. 말 그대로 "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02년 당시 서울대는 정시 최저학력요건(총점 1등급 혹은 총점 2등급 중 2개 영역 이상 백분위 97 이상)이 있어 설사 미달이 나도 그 이하 성적은 붙을 수 없었다. 물론, 다소 낮은 성적으로 붙는 일 정도야 있었겠지만 쓸데가 없다고 말할 정도의 성적을 받은 사람이 붙을 수는 없었던 구조였다. 참고로, 몇몇 서울대 학과는 지원자가 너무 없어서 심각한 문제가 됐었다.
  7. 특히 상위권 학생들. 이들이 훗날 인터넷이나 다른 곳에서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나 교육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계급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곳이라던가.
  8. 일반 국민의 해외여행 자유화가 1989년의 일이다
  9. 이 지적은 다소 문제가 있다. 논술 도입으로 논술전형을 대비하는 신흥 사교육시장이 활성화 되었기 때문이다. 괜히 2008년에 나온 죽음의 트라이앵글의 한 축을 논술이 담당하는게 아니다.
  10. 수험생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인정하고 들어 갈 수 밖에 없다. 학교별 난이도 및 경쟁이 다른 상황에서 학업성취 평가의 공평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내신때문에 불리해 진게 문제였다. 당장의 대학 서열이 가지는 속성때문에 누구나 소위 상위권대학으로 진학하려 하지, 정책따라 손해 감수하면서 차후 불리해질 진학을 하고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수험생은 실험용 쥐가 아니다.
  11. 그런데, 인재를 국가가 임의로 배분한다면 그 때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해친다고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애초에 효율을 바란다면 삼수금지하고 국가가 직업과 학교를 성적과 적성따라 서열맞춰 배분해주고 개인은 거기에 만족하는 사회다.
  12. 그래도 좋은학교가 평균 SAT 점수가 높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