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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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U-18 감독
임중용 (林重容 / Lim Joong-Yong)
생년월일1975년 4월 21일
국적대한민국
포지션수비수
등번호20번
신체조건184cm / 78kg
학력재현중-강동고-성균관대
소속팀부산 아이콘스 (1999~2002)
대구 FC (2003)
인천 유나이티드 (2004~2011)
스태프인천 유나이티드 코치 (2011)
인천 유나이티드 U-18 코치 (2013~2014)
인천 유나이티드 U-18 감독 (2015~ )
응원가동요 - 우리 모두 다 같이[1]
200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박주영
FW
마차도
MF
김두현
MF
이천수
MF
이호
MF
조원희
DF
임중용
DF
유경렬
DF
조용형
DF
김영철
GK
김병지

1 개요

인천의 수호신
영원한 인천의 캡틴
레전드 선수에서, 이제는 U-18의 감독으로 인천의 역사를 다시 쓰는 명장 후보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이자 K리그 클래식 인천 유나이티드전설.
인천 유나이티드의 창단멤버이면서 오랫동안 인천 유나이티드의 주장으로 활약을 했고,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까지 인천 유나이티드와 함께한. 인천 축구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그야말로 인천 유나이티드의 레전드라 할수 있다. 실력 자체도 K리그 수준급의 수비수였지만 무엇보다 임중용이 대단했던건 특유의 프로정신과 리더쉽이었다.

2 부산 시절

부산팬이나 임중용에게나 부산 시절은 흑역사나 다름 없었다.

인터뷰나 비상 영화를 보면 임중용은 김호곤 감독 밑에서 출전 기회를 별로 못 얻었다고 한다.

비상 감독인 임유철 감독과의 인터뷰

27경기동안 교체멤버로 끌려다니면서 1경기밖에 못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비상에서도 자기 잘못이라고는 하지만 감독이 별로 기회를 못 줬다고 하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이거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DC의 국내축구 갤러리의 부산 팬들은 K리그 홈페이지에서 임중용의 출전기록을 제시하면서 김호곤 재임기간동안 1경기밖에 못 나온건 거짓말이고 20경기 이상을 나왔으며 그 동안 구멍노릇 하고 동료 선수들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김호곤 감독 시절 영입했다던 연세대 제자라는 선수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국가대표였던 혼혈 선수 장대일, 그리고 지아 아빠로도 유명한 송종국이다. 못 하는 선수 빼고 잘하는 선수 기용하는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부산팬 입장에선 자기 잘못도 있으면서 부산만 나쁜놈 취급하는게 영 아니꼽다는 것..

여하튼 이런 상황이다보니 임중용에게 이적제의가 들어왔다. 보내달라고 김호곤에게 무릎꿇어가면서까지 간청했다고 하고 김호곤은 그걸 거절했다고 한다. 참을 수 없었던 임중용은 구단에 말만 하고 팀을 뛰쳐나왔으며 임의탈퇴당했다.

임의탈퇴 당한 이후 1년 4개월간 집에도 있어봤고 아버지를 도와 운전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호곤이 경질당하고 선더랜드 AFC의 전설이기도 한 이안 포터필드가 감독으로 취임하고 나서 임중용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구단에서도 그를 다시 불렀다. 동계훈련에 참석해서 훈련을 하는데 1년반동안 운동을 안 해서 몸이 따라주지 않았고 부산은 임의탈퇴도 풀어주고 그를 놓아줬다.

3 대구 시절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성균관대 시절 자기를 지도한 수원시청 감독인 임고석이 같이 운동하면서 공무원 자격증이라도 따자며 불렀고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제주로 내려가게 된다.

마침 신생팀인 대구 FC도 제주에 전지훈련하러 온 상황이었고 박종환 감독과 호텔에서 만나게 됐고 박종환의 러브콜로 대구 FC의 창단멤버가 된다.

빳따 감독으로 유명한 박종환이라 힘든 훈련을 하게 됐지만 임중용 자신에겐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 악물고 열심히 훈련했다고 한다. 새벽훈련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고 한다. 전반기에는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했고 후반기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대구시절에는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던 거 같다. 부산 팬들도 "부산 있을때 지금 하는 거 반만큼만 하지 그랬냐"고 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시즌이 끝나고 그는 더 좋은 대우를 원했다. 신인들과 받는 연봉이 비슷했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28이라 창창한 나이였으니 불만이 많을법도 했다. 그래서 재계약을 원했고 협상까지는 했으나 구단은 오히려 연봉을 깎으려고 했다. 그래서 기본보다 좀 더 달라고 했더니 재계약 불가 통침을 받았다. 아마 인천 팬들에게는 대구의 이러한 처사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4 인천 시절

이러한 상황에서 전직 부산 단장이었고 그 당시에는 인천의 단장인 안종복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종복은 대구에서 받던 것보다 더 많이 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재기할 수 있게 도와준 하성준 코치와 상담을 했으며 하성준이 '우리 팀에 남았으면 좋겠지만 대우를 원한다면 인천 가는게 낫겠다'라는 말을 듣고 인천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계약이 끝난 후 박종환이 불호령을 내리고 대구 보드진도 더 좋은 조건을 내밀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상황.

2002 월드컵의 열기를 등에 업고 2003년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됐지만 시민구단으로서 어쩔수 없었던 열악한 환경과 개판 5분전 팀워크로 만년 꼴찌팀이었던 인천을 임중용은 특유의 투지와 근성으로 언제나 묵묵히 팀원들을 이끌었고 장외룡 감독이 부임한 후 축구선수로서 능력이 만개. 최고 전성기를 누리며 2005년 인천은 전기리그 2위 및 전후기 통합 승점 1위, 창단 첫 플레이오프 진출권까지 획득하는 쾌거를 누린다. 하지만 이내 피로누적으로 일시적 시력 상실이란 축구 선수로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지만 당시 부실한 팀 스쿼드 탓에 출전을 강행. 팀을 리그 준우승까지 이끌었다.[2]

이후에도 인천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자 수비의 핵으로 인천을 이끌었지만 세월앞에 그도 어쩔수 없었다. 자츰 경기에 뛰는 횟수는 줄어들어갔고 허정무 감독 부임이후 등 떠밀리다시피 플레이코치로 보직을 변경하며 은퇴수순을 밟았고 결국 시즌 마지막 상주 상무와의 경기를 끝으로 현역 은퇴. K리그 통산 294경기 출전. 그중에서 인천 유나이티드에서만 219경기를 뛰었다.

아무리 팀의 레전드라 해도 필요가 없으면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게 일상화된 K리그에서 이례적으로 그를 위한 은퇴식이 열렸고 임중용은 팀 동료들의 목마를 받으며 홈 팬들의 환호속에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후 독일 베르더 브레멘에서 1년 6개월 가량 코치 연수를 받았고[3] 2013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 유나이티드 산하 U-18팀인 대건고등학교의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의 길을 걷는 중이다.

2013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대건고등학교가 결승에 올랐지만 2: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2:2 동점을 허용하였고 이후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만다.

풋볼 매니저에서도 만들기 힘든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 덕분에 인천 홈팬들의 임중용의 사랑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팀 역사가 이제 10년을 갓 넘긴 신생팀에서 자랑스럽게 내놓을수 있는 팀의 첫 레전드이니 말이다. 인천 서포터즈들은 그가 은퇴한 이후에도 아직도 그를 기리는 걸개를 내걸고 있으며 그의 등번호 20번은 이후 인천의 수비를 책임지는 최고의 선수에게만 허락하는 등번호가 되었다.[4]

5 은퇴 이후

2011년 플레잉코치로 활동하였고, 2013년부터 인천 유나이티드의 U-18(대건고등학교) 팀의 코치를 맡고 있다. 2015 시즌부터 U-18 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대건고 유스들 중에 뛰어난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한다. [5]

그리고 2015년 U-18팀을 2015 대교눈높이 후반기 전국고등축구리그 왕중왕전 결승에 올려놓는 등, 감독으로서도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6 그 외

에두와의 침두 사건으로 유명하다. 2007년 9월 22일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열린 수원과의 리그 경기에서 에두가 발을 들어서 임중용에게 가격을 했는데 이에 화가 난 임중용이 밀쳤고 에두는 침을 뱉었던 사건이다. 이걸로 임중용은 레드, 에두는 옐로를 받았다. 이후 에두는 FC 샬케 04로 이적하게 되는데 이적하기 전 인터뷰에서 침두 사건에 대해서 사과를 한다.

2008년 전북과의 경기에서 혼절하기도 했다.

베르더 브레멘으로 연수갔던 시절에 인천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팬들이 막 항의했다고 한다.
  1. 우린 너를 영원히 노래해! (임중용!) x2 만세 만세 임중용! x2 우린 너를 영원히 노래해! (임중용!)
  2. 당시 인천 유나이티드의 결승진출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에 더 자세한 일화들이 나와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늘을 찌르던 오만함과 게으름으로 팀 케미를 저해하던 라돈치치를 어떻게든 팀에 녹아들게 하려는 임캡틴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임중용의 말로는 라돈치치는 잘한다고 해주면 거만해지는 성격이었고 자기를 제외한 그 누구도 싫은 소리를 안 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쓴소리를 한 것이라고 한다.
  3. 처음에 브레멘 구단에서 연수 받지 못하고 지역 유소년팀에만 떠돌며 연수를 하다가 인천 창단 때 골키퍼 코치를 했던 미하엘 크라프트가 마침 브레멘의 1군팀 골키퍼 코치로 있어서 그의 도움을 받고 본인도 2군 감독 앞에서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서 브레멘 구단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4. 임중용 이후 정인환이 등번호 20번을 달았고 그가 전북으로 떠난 이후엔 역시 마찬가지로 수비의 핵인 안재준요니치가 20번을 맡고 있다. 참고하자면 당시 정인환을 영입한 허정무는 그를 영입하려고 정인환-안재준 트레이드를 했다.
  5. 연령별 국대에 계속 선수들을 보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진야. 단순히 선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결승전에서 쐐기골도 넣었다. 뛰어난 유스의 비결에 투게더를 강조한 덕분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