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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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지아와 함께.

이름송종국 (宋鍾國 / Song Chong-Gug)
생년월일1979년 2월 20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대가리(…)[1]
종교개신교
포지션오른쪽 풀백
신체조건177cm / 77kg / O형
가족2남 1녀 중 막내
등번호수원 시절 8번
울산 현대 14번
프로입단2001년 부산 아이파크
소속팀부산 아이파크(2001~2002)
페예노르트(2002~2005)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5~2010)
알 샤바브 FC(2010)
울산 현대 호랑이(2011)
톈진 터다 (2011)
국가대표60경기 / 3골
2001년 K리그 신인상
양현정(전북 현대 모터스)송종국(부산 아이콘스)이천수(울산 현대 호랑이)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대 주장
이관우
(2007)
송종국
(2008)
곽희주
(2009)
200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우성용
FW
산드로
MF
신태용
MF
서정원
MF
송종국
MF
남기일
DF
우르모브
DF
김현수
DF
김용희
DF
이영표
GK
신의손

1 소개

대한민국 역대 수비수 중 최고의 단기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2]
한국 축구의 최전성기였던 2002년 히딩크호에서 황태자라 불렸던 선수
피구지우개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축구 해설자, 방송인.

4강 신화를 기록했던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호의 황태자라 불리며 활약했다. 필드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2002년 월드컵에서 전 경기에 교체없이 출장[3]했으며 대표팀의 마지막 골까지 기록했다.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일찍이 붙박이 주전으로 발탁되어 탁월한 볼관리, 완급조절, 강철체력, 슈팅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였다. 특히 당시 지네딘 지단과 함께 세계최고 미드필더라 불린 루이스 피구를 꽁꽁 묶은 역대급 수비력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이후 한국축구를 이끌어 간 것은 박지성, 이영표였지만 2002년 당시만 보면 가장 두드러진 선수는 송종국이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감독도 가장 먼저 송종국을 데려가려 했지만 이미 다른 팀과 계약을 해버려 그 다음 생각했던 박지성, 이영표를 데려갔을 정도. 2002년의 좌영표 우종국 라인은 대표팀 역사를 통틀어 최정상급 윙백라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전성기가 짧았던 것이 무척 애석하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 최전성기에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준 선수이다.

2 선수시절

2.1 K리그 데뷔(2001)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2001년에 부산 아이파크에서 프로데뷔를 하게 된다. 당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K리그의 떠오르는 수비수로 활약하였고, 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며 2002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부동의 오른쪽 윙백으로 활약하게 된다.[4] 특히 포르투갈 전의 '피구 관광'으로 이영표와 더불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터키와의 3,4위전에서는 '유럽가고 싶어요'라는 어필인지 공격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래서 비록 차두리의 엉덩이 어시스트몸에 맞긴했지만 득점을 하기도 했다.

단일 월드컵 최장시간 출전 세계 기록을 갖고 있었다. 2002 한국-일본 월드컵의 687분. 이운재와 타이기록이지만 골키퍼가 아닌 필드 플레이어로 국한시켜보면 단연 유일하다. 게다가 송종국은 단일 월드컵에서 출장할 수 있는 최다 경기인 7경기에 모두 나와 풀타임을 뛰었고, 거기에 한국은 2002 월드컵에서 연장전을 두 번이나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쉽게 깨질 기록은 아니다. 그리고 2014브라질 월드컵이 열리는데 이처럼 월드컵 내내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02월드컵 이후 한국선수들의 유럽이적돌풍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선수는 박지성, 이천수도 아닌 송종국이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네덜란드의 아르옌 로벤이 7경기 690분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아르옌 로번은 7경기(연장전 2경기) 모두 선발 출장하여 풀타임 소화하며 3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쳤다.노장의 투혼

2.2 유럽 이적(2003년)

파일:Attachment/Song Feyenoord.jpg

2002 월드컵이 끝난 후 부산에서도 그 기세를 이어가며 맹활약, 결국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이 400만 달러의 이적료로 영입해가게 된다. 당시 페예노르트 외에도 자그마치 아스날이 임대 영입 제안을 했었으나 주전 보장이 용이하고 완전 이적 조건을 내세운 페예노르트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5] 최근과는 달리 그 때만 하더라도 에레디비지에는 유럽 수위의 리그로 통했고 페예노르트 또한 01/02 UEFA컵을 우승하고 02/03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 강호였기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선택이었다.

이 당시 부산 아이콘스 측은 송종국이 달고 있던 24번을 영구결번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는데 그 당시만 해도 김주성(16번)과 같이 부산에서만 계속 뛴 선수에게만 이뤄진 영구결번을 달랑 2년 정도 뛴 선수에게 준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 논란을 무시하고 24번을 영구결번하기는 했으나, 송종국이 국내 복귀 후 수원으로 이적해버리자 결국 슬그머니 영구결번이 없어졌다(…). 2002년의 축제 분위기에 구단마저 휩쓸려서 발생한 어이없는 촌극이었다.

페예노르트 이적 후엔 바로 주전으로 풀타임 활약을 펼치며 인상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특히 02/03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 유벤투스전에서 폭풍 활약은 지금까지도 많은 축구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인생 경기 중 하나. 당시 파벨 네드베드, 에드가 다비즈,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릴리앙 튀랑, 다비드 트레제게 등이 활약하던 유벤투스는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팀이었으나 월드컵을 마치고 곧장 날아온 동양의 한 무명 선수에게 측면을 탈탈 털리며 힘겨운 원정 무승부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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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예노르트 시절. 바로 옆에 반 페르시도 보인다.[6]

이후 페예노르트는 유럽 대항전에서 낙마하였으나 송종국은 이후로도 팀내 붙박이 주전 자리를 굳힌 채 성공적으로 시즌을 마무리 한다. 송종국 축구인생에선 이때가 최고 정점이었고 이후로 차츰차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다. 그 다음 시즌에도 초반엔 나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자신을 기용해준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 감독의 사임과 신임 루드 굴리트 감독과의 불화, 잦은 부상 및 재활, 꽤 오래 머물렀음에도 네덜란드어를 잘 못하던 현지 부적응, 그리고 2003년에 결혼한 김정아 씨와 불화건으로 가정생활에서 문제를 보이며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결국 마지막 시즌에는 제대로 출장조차 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며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2.3 K리그로 복귀(2005년)

그렇게 쩌리 신세를 지고 있던 선수를 데려간 구단이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의 오른쪽 풀백으로 꾸준히 활약하기도 했고, 특유의 멀티포지션 능력 덕분에 필요시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수비수까지 다양한 포지션에서 뛰었다. 2002년의 그 실력이나 위상은 아니었지만 멀티 능력을 살려 그럭저럭 활약하였으며 2008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국대의 오른쪽 윙백으로 2006 독일월드컵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02년 월드컵때 가장 각광받던 선수였으나 그동안의 폼저하로 위상이 많이 변했다. 왼쪽 풀백에서 김동진이 맹활약하자 이영표를 오른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이어진 07년 아시안컵에도 선발되었지만 세간의 인식을 뒤집진 못했다. 이 대회에서 송종국과 오범석이 번갈아서 오른쪽 풀백으로 나왔는데 오범석이 공수에서 고른 활약으로 김치우와 함께 전체적으로 답답했던 대표팀의 성과물로 주목받은 반면 송종국은 정말 공수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뻥크로스나 날리며 답답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결국 허정무호 출범 이후 대표팀 주전경쟁에서 사실상 낙마하게 된다.

2.4 알 샤밥으로 이적(2010년)

계속된 부진에서 탈피할 기미가 없어 수원에서 입지가 줄어들던 2010년 6월, 윤성효 감독으로 수원의 감독이 바뀌는 와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샤밥이 거액의 주급으로 이적을 요청해왔고, 결국 알 샤밥으로 이적하였다. 2010년 알 샤밥은 AFC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 역시 4강에 오른 성남 일화와 자웅을 겨루게 되었고 송종국은 1,2차전 두 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결과는 1차전 홈경기 4-3(승), 2차전 원정경기 0-1(패)로 결승 진출 실패.

2.5 울산 현대로 복귀(2011년 2월)

이후 반 시즌만에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고 2011년 2월에 K-리그의 울산 현대 호랑이로 복귀, 김호곤 감독 밑에서 새로이 싹 바뀐 울산의 수비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경렬이도 가고 범석이도 가고~

2.6 중국리그로 이적(2011년 7월)

울산에서 주전을 먹고 뛰던 중 갑작스럽게 울산으로부터 7월 5일자로 자유계약으로 풀리게 되고 바로 중국의 텐진 터다로 이적하게 된다. 울산 측의 설명으로는 송종국과의 계약옵션에 따라서 연봉 및 계약기간에 대한 협상을 벌였으나 서로 이견이 있어서 결국 자유계약으로 풀어주게 되었고 중국의 텐진 터다가 영입하게 되었다고. 송종국의 영입에 있어서는 전 수원 삼성 소속이자 현 텐진 소속인 리웨이펑의 추천이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2012년 1월 10일, 텐진 터다로부터 자유계약으로 풀리게 된다. 잘 하긴 했지만 나이가 있어서 새로운 한국인 미드필더로 아시아 쿼터를 채우려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밀리게 되었다는 듯.*

2011년엔 국대에 발탁될수도 있다는 기사가 종종 떳지만 예전 송종국이 해 오던 롤을 차두리가 잘 소화해주고 있으며 백업으로 오범석, 최효진등이 있기에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지못했다.

2.7 은퇴(2012년)

2012년 3월 27일 은퇴를 선언하였는데 그 이유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도저히 선수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송종국의 어머니는 운동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을 바쳤는데[7] 갑자기 쓰러지고, 송종국이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결국 충격을 받은 송종국[8]은 축구를 더이상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은퇴를 하게 되었다. 항간에는 '이제 갈 데가 없어서 은퇴하는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실제 여러 구단에서 입단 제의를 받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2.8 플레이 스타일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자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CM 2002년 당시 종국의 포지션(미드필더 이하 전 포지션 소화가능)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필요 시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점이 '멀티 플레이어'를 중시하는 히딩크 감독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02년 이후 오른쪽 풀백으로 많이 회자 되지만 처음 대표팀 초년병때는 '포스트 홍명보'라고 불리며 스위퍼로 주목받았었다. 호리호리한 외모와는 달리 체력이 좋아서, 짧은 기간동안 경기가 이어지는 토너먼트 중에도 자기 폼을 잃지 않으며 꾸준히 활약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었으며, 몸싸움을 피하지 않는 악착같은 수비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한국선수 답게 양발을 잘 구사했다.

2002년 전성기때는 오버래핑 능력이 매우 출중했고 측면에서 중앙으로 들어가며 날리는 중거리슛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페예노르트 시절 부상과 폼저하를 겪으면서 공격적인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맨위의 프로필에서 엿보이듯이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다. 2001년에 프로데뷔해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2~2003년에 정점을 찍었으나 그 이후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완만하긴 하지만 내리막길 일변도였다. 한살 위 김남일이나 4살아래 이천수가 실력 만큼은 K리그에서 최고로 인정받으며 상당한 족적을 남긴데 비해[9] 괜찮은 선수이긴 했어도 탑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3 해설로 데뷔

은퇴 이후 한동안 TV조선K리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안 그래도 수원 경기 많이 해 주는 채널인데 중립적이지 못하고 친 수원적 해설을 한다고 얘기가 있다.

1년차에는 발음이 꽤 부정확하고, 말의 리듬과 높낮이가 안정되지 못하고, 긴장한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명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조금 횡설수설 전달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2년차에 접어든 2013년에는 해설 외에도 방송 짬밥이 많이 쌓였는지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으며 농담과 선수 사생활, 왕년 전성기 영원히 고통받는 피구 등을 언급하는 류의 완급 조절도 능숙하게 시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킥 오프 후 20분 정도 지나고 경기 상황이 급박해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간다.

2013년에 TV조선에서 K리그 중계를 중단한 이후에는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김성주가 MBC와 축구 중계 캐스터 계약을 맺은 덕분에 아빠! 어디가?에 이어 김성주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최근에는 예능 쪽으로 활동이 활발하다. 스타주니어쇼 붕어빵, 댄싱 위드 더 스타 시즌 2, 라디오 스타에도 출연했으며, 고정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가 대박이 나자 지아 아빠로 유명해지고 국민 딸바보로 등극하불멸의 국가대표 시즌 2에도 고정출연하게 되었다.

2013년 11월에는 축구 시뮬레이션 게임인 풋볼데이의 CF에 출연했다. 1인 4역으로 감독, 행정가, 팀 닥터 등을 연기했는데 그중 압권은 자그마치 아랍 구단주(...). 능청스러운 아랍어 연기가 일품이다. CF 영상

2002년 월드컵을 보았던 세대들에게는 저 사람이 정말 피구를 막았던 그 송종국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송에 잘 적응하고 있다. 토크쇼에 나오면 아예 저 피구 막았다는 이야기를 곰탕마냥 우려먹는 기믹을 얻었을 정도(…) 안정환이 라디오 스타에서 농담으로 '방송 많이 하더니 변했어'라고 하기도 했다.

현재는 2014 브라질 월드컵 중계를 위해 브라질 현지에 입성해서 열심히 해설을 하는 중. 주로 김성주 캐스터, 안정환 해설과 호흡을 맞추고 있으며 자신보다 방송경력이 짧은 안정환을 해설중에 틈틈히 돕는중이다. 해설을 할 때는 자신이 주로 섰던 포지션인 미들과 수비를 중점적으로 보면서 말을 하는 편. 해설 외적으론 안정환에게 딴지를 걸어주는 역할(…)이며 두 사람의 주고 받는 드립이 MBC 중계를 보는 유일한 이유라고 말하는 팬들도 있다.

6월 18일, 홍명보호의 첫 경기인 러시아전을 중계했으며 안정환 해설과 괜찮은 호흡을 보였다. 대체로 선수들을 격려하며 상황을 조근조근 짚어주며 해설을 하고 있었으나 이근호의 선제골 이후 5분도 안되서 실점하는 과정을 보고는 드물게도 큰 소리로 "이러면 안 되죠!"라며 발언하는 모습을 보였다.[10]

알제리전에도 어김없이 안정환 해설과 호흡을 맞췄지만 아주 눈알이 썩어 문드러질 정도의 처절한 경기력에 단단히 빡친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첫 번째 실점부터 두 수비수가 공격수 하나를 못막고 정성룡이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는 상태로 골을 먹히자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몇 분 채 지나지 않아 코너킥 상황에서 실점을 하자 안정환 해설과 함께 정줄을 놓아 버렸다. 세 번째 실점 상황에서는 기가 찼는지 허탈하게 웃기 까지 했다. 본인은 2002년 월드컵 때 혼자서 루이스 피구를 막고 포르투갈을 털었는데 수비수들이 공격수 하나를 못막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히 선배로서 빡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송종국의 표정이 어두워질 때 안정환 해설은 아예 포기한 모양인지 10분 동안 침묵하기도 했다.

방송 사고 날까봐 긴장한 김성주 캐스터
입모양이 마치 '이 ㅆㅂ…'이라고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건 기분 탓입니다

이 경기 후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내가 지금까지 우리 애들을 너무 아끼기만 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쓴소리도 좀 해야겠다" 라는 뉘앙스로 인터뷰를 했다.

여담이지만 딸 송지아가 러시아 VS 벨기에 전에 에스코트 키드에 깜짝 발탁되기도 했었다. 관련기사

월드컵이 끝난 후인 2014년 7월 23일 [[MBC SPORTS+|]]에서 인천 vs 포항 경기의 해설을 맡으며 오랜만에 K리그 경기 해설을 했다.

4 그 외

4.1 가정사

결혼이혼을 두 번 했다. 축구계의 로맨티스트?

첫 번째 부인인 김정아씨는 이영표의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이영표의 부인이 다니던 교회 신도이자 송종국의 팬클럽 회장이었고 연을 이어오다 2003년 6월에 결혼에 골인 했다. 하지만 2005년 5월에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루머들이 종종 나오는 편. 결혼생활은 1년 정도였으나 대부분이 불화로 점철되었다는 카더라 통신도 존재하며, 위자료 문제로 심적 부담이 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때 송종국은 네덜란드에서 뛰던 시절이라 송종국도 심적으로 부담이 심했던 상태였다고.

이후 2006년 12월에 탤런트 출신인 박잎선과 결혼해[11] 2007년엔 딸 송지아[12]가, 2008년엔 아들 송지욱이 태어났다. 그리고 두 자녀에게 유해매체를 보여주는 아동학대를 하여 논란이 일었다.#

2015년 10월 6일에 이혼한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친권, 양육권, 살고있는 집은 모두 부인쪽이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SNS에는 벌써 여자친구로 추정되는 여성의 실명과 둘이 찍은 사진이 공개됐다. 아빠! 어디가? 미친 드립

4.2 그 외

동탄신도시에 본인의 이름을 건 스포츠센터를 열고 개인사업에도 도전하고 있다.그런데 위치가 동탄 최외곽인 능동이라... 이것저것 갖출 것은 갖춰놓은 피트니스 센터에 가깝다고. 아주 가까운 곳에 이관우가 개업해서 장사 잘 하던 식당도 있었다.

2002년 월드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린 후에 여자 연예인과 스캔들이 터진 적이 있다. 그것도 두번이나. 라디오 스타에 출연했을 때 본의 아니게 언급을 하게 되었다.[13]

현재 2015 년에는 서울시 송파구 위례 신도시로 이사하였다. 2017년에 근처에 본인의 이름을 건 축구교실을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진짜다. 본인이 스스로 방송에서 출신지를 인증하였다. #
  2. 문제는 전성기가 너무 짧아서 3년을 못갔다.
  3. 이 출장기록은 역대 월드컵 필드플레이어 최장시간 출전 기록이다. 이후 2014월드컵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의 로벤에 의하여 경신된다.
  4. 원래 히딩크 감독은 송종국을 홍명보를 대신할 중앙수비수 겸 멀티 플레이어로 쓰려 했으나 평가전에서 보여준 중앙수비수로서의 모습에서 잔실수가 많다는 점이 드러났고, 이에 다시 홍명보를 불러들이며, 송종국은 오른쪽 윙백으로 돌려쓰게 된다.
  5. 페예노르트로 이적한 후에도 아스날은 관심을 버리진 못했는지 잊을 만하면 송종국과 링크가 뜨곤 했다.
  6. 이 사진은 2003년 6월 23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부산 아이파크와의 친선경기였다. 다만 송종국이 나왔음에도 예상 유료관중 30,000명의 1/5인 6,000명만이 경기장을 찾았다.기사 이 때문에 송종국이 눈물을 흘렸다는 카더라가 돌기도 했다.
  7.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선수들의 식사는 물론 원정 응원과 숙소 청소 등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8. 아내 박잎선씨에 따르면 아직도 침대에서 잠을 안잔다고 한다. 자기가 두 발 뻗고 편하게 자면 어머니한테 미안하다며 맨날 쇼파에서 잔다고 한다.
  9. 사실 이 둘도 실력외 문제로 커리어를 적잖이 까먹었다. 이천수는 자기관리 및 처신문제야 워낙 유명해서 따로 말할 필요도 없고, 김남일도 수원 시절 감독과 충돌하더니 해외진출 시도했다 이역만리 러시아에서 벤치워머로 전락해 고생했다.
  10. 2014 월드컵 당시 방송 3사의 중계진엔 2002년 대표팀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골고루 포진되어 있는데 이들은 월드컵 전의 각 방송사의 특집방송에서 한 목소리로 '자의적으로 파울을 판단하지 말 것, 넥스트 플레이에 집중할 것'을 노래를 부르다시피 하며 후배들에게 조언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11. 이 과정에서 결혼 상대자의 이름을 놓고 혼선이 빚어진 바 있다. 박잎선씨가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쓰던 개명 전 본명(박근영)과 개명 후 본명(박연수), 예명(박잎선)이 모두 달라서...
  12. 태어날 당시 이름은 송은환이었으나 이후 개명했다.
  13. 이천수의 자서전에서 언급된 바람둥이 선배 A가 송종국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MC들이 언급해서, 그걸 해명하기 위해 말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