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

1 개요

6.25 전쟁(한국 전쟁)의 별칭. 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반세기를 넘어서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전쟁이다.아시아판 100년전쟁 찍을 기세
앞부분에 America's를 붙이면 미영전쟁을 칭하는 호칭이 된다.

2 원인

6.25 전쟁은 참전국의 수나 사상자의 규모, 전투기간으로 따지면 2차대전 이후의 전쟁 중에서는 매우 커다란 전쟁이었으며, 베트남 전쟁에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미국에서 관심이 없는 것에는 몇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 미디어의 발달이 아직 미흡해, '미디어 전쟁'으로까지 불린 베트남 전쟁에 비해서 언론의 관심이 적었다. 전쟁 보도의 대부분은 여전이 2차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영화관 뉴스[1]와 신문, 라디오가 주력이었다. 1950년대에는 TV가 일반 가정에 막 보급될 무렵이었고(사실 TV방송이 시작된건 1939년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과 높은 TV가격으로 보급이 미진했다.), 컬러방송은 1950년에 시작되었기는 하지만 컬러방송이 중단되다가 송출방식을 변경하여 1954년에 재개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1960년대가 되어서야 전국적인 보급이 이루워졌다.
  • 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에 비해 지속기간이 짧았다. 2차대전은 미국이 직접 참전하기 전부터 유럽에서 소식이 쏟아져 들어와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전쟁이었으며 베트남전은 한국전쟁의 5배는 오래 끈 전쟁이다. 그리고 유럽은 유럽계 이민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인들 입장에서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수 없었던 지역이였고, 베트남전도 처음 수년간은 크게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았으며 한국전처럼 참전 3년 즈음에 끝났으면 관심은 훨씬 덜 했을 것이다. 지속기간과 관련해서 전쟁의 경과 또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한국전의 진행 양상을 보면 1950년 6월 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돼서, 9월에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전선이 밀렸다가, 10월에는 서울을 포함한 기존 영토를 거의 수복하였고, 11월에는 중국의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둥 처음 수개월은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밀리기 시작해서 이듬해인 1951년 2~3월경에 1.4후퇴 이후 최남단까지 밀렸다가 다시 반전되어서, 전쟁이 발발한지 만 1년이 지난 1951년 여름 경에는 전선이 완전히 고착화되어 버린다. 실제로 이때부터 휴전까지 약 2년간은 전선에 거의 변화가 없이 능선과 고지를 뺏고 빼앗는 지리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물론 치열한 전투도 여럿 있었으나, 전쟁에 연루되지 않은 일반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 만한 전개는 3년간의 전쟁에서 뒤의 2년간은 거의 없었던 셈. 개전 초 월 1~2천명대였던 미군 사상자 수도 1951년 이후부터는 월 700명 선으로 내려간다.[2] 베트남전에서 미군 사상자가 해가 지날수록 늘어났던 것과는 큰 차이점.
  • 휴전으로 '어정쩡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승패가 명백한 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다루기가 애매하다.(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쉬는 중이다.) 흔히 2차대전은 미국의 영웅같은 면모가 부각되고, 베트남전은 미국의 자성하는 성찰이 부각되어 다루기 쉬우나, 한국전쟁은 감동으로도 성찰용로도 다루기 어쩡쩡하다. 이기지 못한 전쟁을 미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전쟁에 미국이 참전한 것이 별로 비판받을 건덕지가 없다. 물론 전쟁 중 일어난 피해(예를 들면 노근리 학살사건)은 비판돼야 하겠지만, 적어도 참전 경위 자체는 정당하다는 의견이 다수이다.
  • 미국 입장에서 본 한국은 경술국치 이전에는 중국의 위성국같은 포지션으로 사실상 민간교류가 전무했고, 일제강점기중에는 일본과 같았으며, 해방 후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극동의 듣보잡 나라여서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사실상 '처음 보는 나라' 취급. 게다가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 대해 한국이 끼치는 영향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미미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많지 않았다.
  •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구급 대전쟁을 겪은지 5년밖에 되지 않았었던 점도 크다. 2차대전은 총력전이었던 만큼 사회 전반적인 참여도나 관심도가 타 전쟁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미국이 한국전에 투입한 병력(30만)은 2차대전 미군의 전사자(40만)보다도 적다. 2차대전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던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큰 관심거리가 못되는 '국지전'이었던 셈이다.
  • 규모 면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비교할 만 한데, 참전병력/전사자는 각각 30만/3만7천, 54만/5만8천으로 베트남전쟁이 약 두배 많지만 수백만명 참전/40만명 전사인 2차대전과는 확실히 다른 급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베트남 전쟁은 위에 언급된 것과 같이 한국전쟁의 5배는 더 끌었던 전쟁이라는 점. 한국전쟁의 3년 1개월에 비해, 베트남전쟁은 무려 19년 반동안 계속되었던 전쟁이다. 베트남전쟁은 전장에서 돌아온 베테랑들이 PTSD로 고생하면서 사회문제화 되고,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한 살육을 비판하는 평화 반전주의 운동이 일어나며, 이게 또 동시대의 문화적 미디어의 발달로 끊임 없이 음악, 영화 등을 통해 재생산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기억되게 된 전쟁이다. 특히 동시대에 일어난 히피문화가 베트남전쟁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다. 베트남전쟁이 한국전쟁처럼 2~3년안에 끝났더라면 충분히 한국전쟁과 비슷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
  • 베트남 전쟁도 종전 후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그다지 미디어에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즉 오래돼서 자연히 묻힌 감도 있다.

3 미디어

픽션에서도 그다지 소재로 쓰이지 않아서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특히 하필이면 오! 인천이라는 괴작의 존재가 있어서….

물론 그래도 영화에서 꽤 다뤄졌다. 하지만 서부전선, 태평양 전쟁,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걸작들에 비해서는 인지도나 완성도가 한참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중심소재가 아닌 경우도 많다.

원한의 도곡리 다리Heartbreak Ridge(단장의 능선)는 수작이지만 최고의 전쟁영화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며 야전병원 매쉬(M.A.S.H)는 배경만 한국전쟁이지 실은 베트남 전쟁을 풍자한 것이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1962년판)는 오프닝에만 한국전이 아주 짧게 나오고 대부분 배경은 미국이며, 그저 공산주의와 대립을 위해 설정으로만 나왔을 뿐이다.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바우트 원(Bout One)작전의 책임자인 딘 헤스의 자서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1957년작 영화 배틀 힘(Battle Hymn, 전송가)의 경우 위의 영화들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만 수익금을 한국 고아들의 복지 확충을 위해 기부하기로 하고 만든 영화라 일반적인 상업영화는 아니다.

2014년에 영국에서 간만에 한국 전쟁 관련 영화가 하나 나왔다. 제목은 퀸 앤드 컨트리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로한은 한국으로 안 온다... 존 부어맨 감독.

한국중국에서는 당연히 상당히 강하게 박혀 있다. 2004년 한국 최초 천만 관객 영화 2편 중 하나인 태극기 휘날리며도 있고, 2007년 중국 영화 순위 1위를 차지했던 대작 집결호에서도 국공내전에 이어 한국전쟁이 다뤄지고 있다.

4 언급

클린트 이스트우드그랜 토리노는 주인공이 한국전 참전경력이 있고 중요하게 나오지만 역시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이렇게 드라마나 영화에서 멀쩡한 노인에게 '알고보면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고 해두는 설정은 의외로 자주 나오고 있다.[3]

아무래도 참전자들이 대부분 죽을 때가 된 제2차 세계대전보다는 덜 오래되었고,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우울한 측면' 혹은 '부끄러운 측면'이 없는 전쟁이기 때문인듯 하다. 또한, 한국 자체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경향도 있다.

5 사후 관리

어쨌든 미국에서 인식이 이렇게 미비한 탓에 정작 참전 미군들은 PTSD 등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제대로 된 사후관리나 주변의 이해를 얻지 못해 힘든 삶을 산 이들이 많다. 참혹한 전쟁이기도 했던 탓에 귀국한 후에도 악몽에 시달리거나 혼자 살아남았다, 혹은 전쟁이지만 같은 사람을 죽였다는 식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흔한 듯. 이때의 기억 때문에 귀국한 후에 한국에 대해 일절 관심을 끊고 산 참전군인들도 많다고 한다. 감사해야 할 한국으로서도 이러한 이들에 대해 뒤늦게 관심을 가졌기에[4] 무관심과 전쟁 후유증에 고통받다 죽은 참전 미군이 많다.

사실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맞다. 미국 정치판에서 어떤 계산으로 참전했든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났고 미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타지에서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 물론 당시 한국군인들께도 함께. 그런데 정작 한국내에서도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젊은세대들 사이에서는 한국전쟁 발발연도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심지어는 UN군 참전국도 어느나라였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러한 세대의식 역시 전쟁에 대한 무관심에 기여하게 된 원인.

다행스럽게도 한국 정부에서 한국전쟁 참전 미군(및 유엔 다른 참전국가 군인들)을 초청해서 한국 관광을 시켜주는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그깟 관광 따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만 이게 의외로 도움이 되는 듯한데, 이전까지 몇십 년간 전쟁의 악몽으로 괴로워하던 참전군인이 한국에 와서 그 발전상을 보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자신과 동료들의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어떤 군인은 수십 년간 한국전쟁의 악몽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생활하다 의사의 권유로 한국 정부의 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한국의 현재를 눈으로 확인하고 귀국해서 놀랄 만큼 병증이 좋아져 의사가 놀랄 정도였다고. 수십 년간 자신이 죽인 적군의 악몽을 꾸던 한 군인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6 기타

남침이라는 단어의 뜻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남침'의 정확한 뜻(국어사전)은 '남한 침공'이라는 뜻이지만, 가끔 '남한 침공'이라는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남침이 왜 남침이며 어떤 문장구조로 남침인지 명확히 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더 좋은 방법은 이런 어른들도 헷갈리는 한문을 쓰지 말고 직접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실 한문은 문자 자체에 문법 요소가 부족해서 무엇이 어떻게 수식하는지 혼동하기 쉽다. 이 것을 과장하며 사람을 바보처럼 취급하는 언론이 이상한거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똥침은 항문이 침범당한거지 항문이 침략한게 아니다 손가락이 더러워진건 피해가 아니냐 그걸 알몸으로 한다고?? 또는 북진통일의 경우 남한에서 북한으로 진격함으로써 이뤄지는 통일이지 북한이 남한으로 진격함으로써 이뤄지는 통일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발발일은 1950년 6월 25일, 휴전일은 1953년 7월 27일이다.

여담으로 '잊혀진'이라는 표현은 이중피동이라 문법에 맞지 않는다. '잊/히/어지/ㄴ'의 형태에서 '히'와 '어지'가 둘 다 피동이기 때문인데, '잊/히/ㄴ'의 형태로 '잊힌'이라고 써서 '잊힌 전쟁'이라고 써야 맞는다. 따라서 현재 '잊힌 전쟁'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으며 차후 '잊힌 전쟁'으로 바뀔 여지가 충분히 있다.
  1. 당시에는 텔레비전이 크게 발달하지 않아서 뉴스를 영화관에서 영화 상영 전에 방송했다. 대한뉴스도 이런 식으로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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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실제 미국 대도시 교외의 공동묘지에 가면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의외로 있는 편이다.
  4. 국가 차원으로서 미국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야 많지만, 군인 개개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전쟁이 끝난 한참 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