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랄 웃 딘

1 잘랄 웃 딘 밍부르누

Jalāl al-Dīn Menguberdī. جلال الدين منكبرتي

1199 ~ 1231

'젤랄 웃딘', '잘랄 앗 딘' 등으로도 불린다.
호라즘 왕조의 마지막 술탄(제8대 술탄)이자 칭기즈 칸에 끝까지 대항하였던 호라즘의 영웅.


(우즈베키스탄의 25숨짜리 동전에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1.1 왕국 멸망과 첫 승리

제7대 술탄인 알라 웃 딘 무함마드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궁정 내부 대립으로 인해 왕국 남부지방인 가즈니(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동쪽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이 지역을 다스렸다.

1219년 여름, 칭기즈 칸이 전군동원령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기습침공하게 되는데, 잘랄 웃 딘은 몽골군의 약점인 수전(水戰)을 주장하였다. 강 어귀에서 몽골군이 강을 건너는 틈에 생기는 헛점을 타 공격, 침입을 막자는 것이어다. 만일 이 전략을 택했다면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치거나 상당기간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는 전쟁수도인 강화도를 그렇게 지켰고, 바다 건너 일본태풍 덕에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몽골군은 강 주변에서 위험천만한 순간들을 여러 차례 맞았으며, 몽골군의 막장 종특은 끝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지형극복기술이 크게 발전한 현대에도 자연하천은 강력한 방어선이다.

그러나 술탄은 시르다리야강을 중심으로 각 요새에 호라즘의 전병력(약 40만명)을 분산시켜 방어선을 만드는 전략을 채택한다. 경쟁 부족과 외척들의 반란을 걱정해서 일부러 병력을 집결시키지 않고, 분산방어전략을 채택했다는 설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술탄의 방어전략은 대실패로 끝났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각 아들들과 자신이 이끌고서 1220년 초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게 되는데, 1년도 안 되어서 국경의 요새와 도시들이 무너지고 몽골군은 수도 우르겐치로 집결했다.
술탄 알라 웃 딘은 수도가 함락되기 전에 피신했다가 1221년 초에 카스피해의 한 섬[1]에서 병사하고 만다. 수도 우르겐치 또한 1221년 4월에 함락되었다.

술탄은 죽기 전에 아들 잘랄 웃 딘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잘랄 웃 딘은 1221년에 수도인 우르겐치로 돌아와서 술탄에 즉위함과 동시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가즈니로 돌아와서 지역의 유력세력을 규합함과 동시에 병사를 모은다. 주력은 터키 용병 및 아프가니스탄의 토착민들.

동년,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시키 쿠두크(忽都忽)[2]가 이끄는 몽골의 선봉부대를 격파하면서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파르완 전투). 이 전투는 몽골군이 패배한 최초의 전투이기도 하다.

1.2 패배와 절치부심

그러나 칭기즈 칸은 파르완에서의 패배에 손자인 무투겐까지 전투중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는 소식에 격노한다. 분노가 극에 달한 칭키즈 칸은 자신이 직접 사마르칸트에 진주중이던 본대를 이끌고서 이 지역으로 들이닥치고, 도시의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이 지역을 황폐화시켜버린다.

호라즘 세력은 각지에서 연패하면서 인더스강 근처까지 밀려가게 되는데, 1221년 11월 25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삼면에서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겪는다.

여기서 그가 한 선택은 폭풍우로 불어난 20척 아래 인더스강에 말을 타고 뛰어들어 강 건너편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본 칭기즈 칸은 감탄하면서

"저런 아들을 둔 아비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로다"[3]

라며 크게 칭찬하고, 더 이상 뒤를 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실제로는 나중에 추격대를 보냈지만 인도의 기후에 시달리다가 금방 돌아와버렸다고.
이렇게 해서 그는, 소수의 부하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인도로 도망칠 수 있었다(인더스 강변 전투).
하지만 잘랄 웃 딘이 돌아올 것을 염려한 칭기즈 칸은 아들 오고타이에게 지시하여 잘랄 웃 딘의 본거지인 가즈니를 완전히 박살내 버린다.

한편, 인도로 탈출한 그는 델리 왕조의 술탄인 일투투미쉬에게 몽골과의 싸움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224년에 몽골군의 본대가 돌아간 틈을 타서 이스파한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란지역에 남아있던 수비군에게 공격을 당하고 다시 아제르바이잔으로 도주하였고, 이란 북부의 타부리즈를 본거지로 삼아 조지아(그루지야) 지역을 정복하는 등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근처 지역의 세력을 제압하면서 세력을 확장해갔다.

1.3 영웅의 최후

그러나 여기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대항하기 위한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라고는 해도 잦은 전투를 통해 마찰을 일으키면서 룸 셀주크 왕조아이유브 왕조 등의 인근 세력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1230년에 에르진잔 근교에서 케이쿠바드 1세가 이끄는 룸 셀주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잃게 된다.[4]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몽골의 토벌군까지 들이닥치면서 이 지역을 쫓겨났다.

결국 잘랄 웃 딘은 1231년, 동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지역)로 도주하여 산속을 전전하였으나, 그에게 원한을 품은 쿠르드인에게 습격당하면서 죽음을 맞았다.

몽골 제국과의 전투에 평생을 바치면서, 패하고 또 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던 잘랄 웃 딘은 호라즘의 영웅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1.4 미디어의 잘랄 웃 딘

원조비사에서 원판의 경우 호라즘 제국의 왕자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정치 C 전투 C 지도 A 매력 B로 나름 준수한 편이다. 하지만 국내 정발판에서는 호라즘 대신 고려가 선택국가로 지정되어 버려서 그대로 얼굴 데이터만 남고 삭제되어 버렸다. '원조비사'의 비운의 인물, '잘랄' 이야기
징기스칸 4에도 등장하는데, 그 명성에 걸맞는 우수한 능력치를 자랑한다.
정치 47 / 무력 85 / 지력 63 병과적성 BBBE 전투특기 기병 돌격(최초등장시)
정치 51 / 무력 91 / 지력 74 병과적성 AAAE 전투특기 화공 추가(상승시)
로, 시나리오에 따라 능력치가 상승하여 등장하는 케이스.

재야무장으로 등장할 시에는 플레이어의 국가가 몽골과 적대관계에 있으며 국경을 접하고 있는 경우에 임관을 청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평생 몽골에 대항한 잘랄 웃 딘다운 이벤트라 할 수 있겠다.

2 잘랄 웃 딘 할지

Jalāl-ud-Dīn khaljī, ?~1296.

인도 델리 제왕조(諸王朝) 중 할지왕조의 창시자.
노예왕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1290년에 할지왕조를 창건하나, 1296년에 조카인 알라 웃 딘 할지에게 살해되었다. 위의 잘랄 웃 딘 밍부르누의 아버지 이름이 알라 웃 딘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 아버지 무슨 짓입니까? 왕위를 계승하는 중이란다 아들아

덧붙여 이 사람의 조카이자 원수인 알라 웃 딘 할지는 징기스칸 4에 등장하는데(그것도 전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도문화권 무장 중 능력치 총합이 제일 높다), 정작 이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3 잘랄 웃 딘 루미

잘랄 웃 딘 루미 항목 참조.
  1. 지금은 물에 잠겨서 흔적도 남지 않은 섬이라고 한다.
  2. 칭기즈 칸의 의제로 제일 먼저 몽골 문자를 익혔으며 원조비사 저자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몽골의 법률 여케 쟈사크에 따라 법을 다루는 재판관이기도 했다.
  3. 칭기즈 칸이 부러워한 그 아비는, 나라잃고서 카스피 해의 섬으로 튀었다가 거기서 죽었지만... 어쩌면 당시 자신의 아들들은 서로 싸우고 자기 말을 안들으며 속을 썩여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4. 잘랄 웃 딘을 무찌른 케이쿠바드 1세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현재 터키에서 가장 추앙받는 술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