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라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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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티무르사파비
왕조
아프샤르 왕조잔드카자르팔라비이란
이슬람
공화국
셀주크 제국
일 칸국카라코윤루
(흑양)
아크코윤루
(백양)
영어: Khwarezmian Empire

페르시아어: خوارزمشاهیان (Khwârazmshâhiyân, 훠라즘셔히연)
우즈베크어: Xorazmshohlar davlati (호라즘숄라르 다블라트)

1 개관

호라즘 왕조는 1077년에 성립되어 1231년 멸망한 서아시아이슬람 왕조이다. 호라즘 지역에서 발원했으므로 호라즘 왕조라고 한다. 왕가는 튀르크계 굴람(맘루크) 출신이었으며, 행정 체제와 사회 문화는 페르시아식이었다. 원래 셀주크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셀주크 세력이 카라 키타이에 패망한 이후에는 카라 키타이에도 복속되었다. 1160년대 이후 독자 세력을 키워 1190년대에 셀주크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란 지역을 장악했으며, 1200년대에는 고르 왕조카라한 왕조, 서요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트란스옥시아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정복하여 동부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제국칭기즈 칸과 전쟁을 벌인 끝에 패망하였다.

페르시아어로는 화레즘샤히안(화레즘 왕국)이라고 하는데,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이기 때문에 표기가 제각각이다. 보통 "화레즘"으로 쓰이지만 콰레즘이나 코라즘, 호라즘이라는 표기도 자주 보인다. 일단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호라즘"을 표제어로 쓰고, 본문도 호라즘으로 통일한다.

2 역사

2.1 초기 역사

호라즘은 아무다리야 강 하류의 비옥한 저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북으로는 아랄해, 동으로는 키질쿰 사막, 서로는 우스튜르트 고원, 남으로는 카라쿰 사막과 접한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일부로 간주되며, 현대 국경으로 보면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 동북부에 해당한다. 트란스옥시아나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고대부터 여러 이란계 종족들이 살아왔고, 페르시아 지역의 제국들에 직간접적으로 복속된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발전했다. 아랍 이슬람 세력의 대정복 이후에도 호라즘은 시리아이라크의 아랍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반독립적인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10세기 이전까지 호라즘의 지배 세력은 아프리그 왕조(Afrighids)라고 불리는 토착 이란계 왕조였는데, 그 기원은 사산 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8세기 경 아랍 세력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점령에 그쳤고, 이후에는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발흥한 페르시아계 왕조인 사만 왕조에 복속된 상태로 계속 존속할 수 있었다. 9세기 경 기존의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0세기 말 호라즘 내부의 다른 귀족인 마문(Ma'munids) 가문이 왕위를 찬탈하고 아프리그 왕조를 몰아냈으나, 곧 사만 왕조를 계승한 튀르크 굴람 왕조인 가즈니 왕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017년 호라즘은 가즈나 왕조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가즈나 왕조 역시 1040년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세력에 패해 호라산 일대를 전부 빼앗겼으며, 호라즘 지역도 이 때 셀주크 제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호라즘 지역의 지배자인 "호라즘샤"의 지위는 셀주크 술탄이 파견한 총독들의 차지가 되었다.

2.2 아누쉬테긴 왕조

1077년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의 직속 굴람이었던 아누쉬테긴 가르차이가 호라즘샤로 임명되었다. 아누쉬테긴이 언제까지 통치했고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097년 말리크샤 1세의 후임 술탄인 바르키야루크가 보낸 총독이 바로 죽자 아누쉬테긴의 아들 모함마드 1세(쿠툽 알 딘 아르슬란테긴 모함마드 빈 아누쉬테긴)가 후임 호라즘샤로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보통 아누쉬테긴이 임명된 1077년을 (아누쉬테긴 계열) 호라즘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모함마드 1세는 1127년까지 살았으며, 재위 기간 내내 셀주크 제국의 속국 상태를 유지했다.

모함마드 1세의 아들인 아트시즈(알라 알 딘 키질아르슬란 아트시즈 빈 모함마드)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처음 10여 년 동안은 셀주크 제국에 순종했으나, 그 뒤에는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1138년 아트시즈는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을 약탈했으나,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호라즘으로 쳐들어오자 도망쳤다. 산자르가 돌아가자 아트시즈는 곧 돌아와 새 총독을 죽였고, 산자르에게 다시 복종하기로 합의했다. 1141년 산자르가 카트반 전투에서 야율대석이 이끄는 카라 키타이(서요) 군대에게 패하자 아트시즈는 그 틈을 타 다시 호라산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트시즈는 산자르의 반격을 받아 호라산에서 쫓겨났고, 카라 키타이 군대가 호라즘까지 쳐들어오자 막아내지 못하고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 때부터 호라즘샤는 셀주크와 카라 키타이에 이중으로 복속되게 되었다. 1153년 산자르가 오우즈 반란군괴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자 아트시즈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호라산을 넘보기 시작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1156년에 죽었다.

아트시즈의 아들 일 아르슬란(타즈 알 딘 일-아르슬란 빈 아트시즈)은 부왕에 비해 훨씬 운이 좋았다. 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산자르가 죽었고, 약해져 있던 셀주크 제국은 산산이 분열되어 더 이상 화레즘샤의 활동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기회 삼아 일 아르슬란은 호라산의 오우즈 반란군이나 트란스옥시아나의 카라한 왕조 잔당 등을 상대로 영토 확장을 꾀했지만 뾰족한 성과는 없었다. 카라 키타이에는 계속 연공을 바쳤는데, 말년에 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쳐들어온 카라 키타이 군대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던 중 병사했다. 그의 치세부터 호라즘은 실질적인 독립 왕국이 되었는데, 카라 키타이에 대한 복속은 계속되었지만 연공 납부 이외의 내정 간섭은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까지 호라즘의 영토는 호라즘 지역에 한정되었다.

2.3 영토 확장

일 아르슬란이 죽은 뒤 두 아들들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대립이 발생했다. 술탄 샤(잘랄 알 딘 술탄-샤 빈 일-아르슬란)가 먼저 어머니의 지지를 얻어 수도인 구르간즈(현 코네우르겐치)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카라 키타이의 군사 지원을 받아낸 테키쉬(알라 알 딘 테키쉬 빈 일-아르슬란)가 쳐들어오자 그대로 도망쳤다. 이후 술탄 샤는 호라산 지역에서 셀주크 제국의 잔당이나 고르 왕조 등에 의탁하며 호라즘 본토의 테키쉬와 대립했다. 테키쉬와 카라 키타이의 관계가 악화된 틈을 타 술탄 샤와 카라 키타이가 테키쉬를 협공하기도 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술탄 샤는 호라산 지역에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데 만족했다. 테키쉬는 1193년 술탄 샤가 죽을 때까지 그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지만, 술탄 샤가 죽자 그의 세력을 큰 힘 들이지 않고 흡수할 수 있었다. 호라산 일대의 패자가 된 테키쉬는 1194년 바그다드칼리프 알 나시르와 함께 마지막 셀주크 술탄 투으룰 3세를 공격해 제거하고 이란 서부까지 진출했다. 1200년에 숨을 거둘 당시 테키쉬는 이란 서부, 호라산, 호라즘 일대를 아우르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최강자였다.

그러나 이 급격한 영토 확장이 완전히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간의 고르 왕조는 여전히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 호라산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화레즘샤는 카라 키타이에 대한 복속 상태를 완전히 청산할 수 없었다. 또 테키쉬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캉글리족 여인과 혼인하는 등 화레즘 북쪽의 스텝 유목민 세력을 적극 끌어들였는데, 이들은 이슬람화도 거의 되지 않은 데다 난폭하고 잔인해서 새로 정복된 서부 이란-호라산 일대 주민들의 증오를 받았다. 셀주크 세력의 말살을 위해 동맹을 맺었던 칼리프 역시 호라즘의 급격한 확장을 경계했고, 결국 갈등이 격화되어 전쟁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점들은 이후 모함마드 2세 시대의 급격한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1200년 테키쉬가 죽자 이란 서부 지역 주민들이 화레즘 주둔군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켰고, 호라산에서는 테키쉬의 조카가 고르 왕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새로 등극한 모함마드 2세(알라 알 딘 모함마드 빈 테키쉬)는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1204년에는 호라즘 본토로 쳐들어온 고르 왕조의 샤하브 웃 딘(모함마드 고리)과의 싸움에서 패하기도 했지만 결국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206년 샤하브 웃 딘이 죽은 뒤로 고르 왕조는 내전으로 분열되어 무력해졌다. 고르 세력의 위협이 약화되자 모함마드 2세는 트란스옥시아나로 눈을 돌려 카라 키타이와 본격적으로 적대하기 시작했다. 사마르칸트의 카라한 왕조 세력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대신 카라 키타이 국내에서 나이만 족장 출신인 쿠출루크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틈을 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카라 키타이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모함마드 2세는 카라한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수도를 구르간즈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겼으며, 1215년 고르 왕조가 완전히 멸망하자 아프간 북부와 가즈니 일대까지 차지했다. 호라즘 왕조는 역대 최대의 영역을 확보했으며,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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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정복 활동이 마무리된 것은 몽골 침입에서 채 5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호라즘샤는 점령한 지역들에서 그리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동부 이슬람 세계는 셀주크 제국이 붕괴된 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 안정된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못하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가 지속되었고, 화레즘샤에게는 이를 다스릴 만한 여유가(혹은 능력이) 없었다. 또 테키쉬 시대부터 이어진 칼리프와의 갈등은 갈수록 격화되어 아예 시아파 출신의 대립 칼리프를 세우고 호라즘 군대가 바그다드를 향해 진군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비록 1218년의 이 공격은 자그로스 산맥의 혹독한 겨울 날씨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이슬람 세계 내에서 호라즘샤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결국 호라즘샤는 외형만 거대한 조각이불 같은 불안한 상태로 전근대 역사상 최강의 전쟁 기계와 격돌하여 처참히 무너지게 된다.

2.4 대몽 전쟁과 몰락

모함마드 2세의 군대가 자그로스 산맥에서 철수하던 1218년 시점에 칭기즈 칸몽골 제국이 서요를 차지하고 있던 나이만의 쿠출룩을 패망시키고 호라즘 제국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시기 모함마드 2세와 칭기즈 칸의 의도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어난 사건들만 보면 호라즘 치하의 오트라르 영주 이날추크(غایرخان)[1]가 칭기즈 칸이 보낸 사신과 무슬림 대상들을 학살했고,[2] 이에 분노한 칭기즈 칸이 사신을 보내자 모함마드 2세가 직접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남성성의 상징인 수염을 깎는 모욕을 준 뒤 돌려보낸 것이다.[3] 칭기즈 칸과 모함마드 2세 둘 모두 상대를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모함마드 2세의 모욕에 격노한 칭기즈 칸이 전 병력을 동원해 호라즘을 침공하게 된다.

외형적으로는 호라즘 제국이 몽골 제국에 크게 뒤쳐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의 영토 확장 부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대부분의 영토는 6~70년에 이르는 혼란기를 거친 끝에 군사적으로 막 제압된 상황이었으므로 아직 국가의 통치력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칭기즈 칸이 엄청난 속도로 군대를 몰아쳐 새 수도인 사마르칸트 등 트란스옥시아나의 핵심 도시들을 격파하자 호라즘 세력은 바로 지리멸렬해졌다. 몽골군의 위력을 본 모함마드 2세는 전면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주했으며, 몽골군에 저항한 도시들은 외부 지원 없이 자력으로 저항하다 점령된 뒤 학살당했다. 이란 서부 지역으로 돌면서 병력을 모아 보려던 모함마드 2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한편 모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의 추격대는 추격 도중 러시아인들의 땅까지 도달하는데 이것이 이후 깊은 악연을 맺게 된 러시아와 몽골의 첫 대면이었다.

도주 중에 왕위를 계승한 모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 웃 딘(잘랄 알 딘 멩구베르티 빈 모함마드: 원래 이름이라 할 수 있는 "멩구베르티" 부분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라깝인 잘랄 알 딘을 쓴다)는 옛 수도인 구르간즈와 왕조의 거점인 호라즘 지역을 포기하고 가즈니 방향으로 갔다. 아프간 지역에서 병력을 충원한 잘랄 알 딘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나,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몰아 추격해 오자 인도 방면으로 도주했다. 결국 인더스 강변에서 따라잡힌 잘랄 알 딘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궤멸당했으나 잘랄 알 딘 본인은 간신히 탈출해 인도 맘루크 왕조의 수도인 델리로 갔다.

잘랄 알 딘은 맘루크 술탄 샴스 알 딘 일투투미쉬에게 몽골과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일투투미쉬는 거부했고, 잘랄 알 딘이 토착 세력과 손을 잡고 라호르를 점령하자 일투투미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몰아내러 나섰다. 구자라트, 신드 등을 약탈하다 인도에서 쫓겨난 잘랄 알 딘은 1224년 기회를 보아 이란으로 갔고, 몽골군이 일시 철수한 틈을 타 분열되어 있던 이란 일대의 군소 영주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또다시 패배하여 이란에서의 패권이 무너지자 이번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잘랄 알 딘은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지아 왕국을 공격,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한 뒤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곳에서 서방의 무슬림 국가인 룸 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230년 잘랄 알 딘의 군대는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이끄는 아이유브-셀주크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거점까지 잃게 되었다. 살아남아 도주하던 잘랄 알 딘이 쿠르드인 노상강도(혹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하면서 호라즘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3 성격과 의의

위에서 정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 호라즘 왕조는 오랜 정치적 혼란 때문에 몰락해 가고 있던 서아시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제압해 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따라서 세계사적으로 볼 때 그 의의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몽골 침입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자초하여 서아시아 지역의 역사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는 비난을 많이 받는다. (지금도 이란에서는 칭기즈 칸이 그 때 쳐들어오지만 않았으면~ 이란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호라즘을 침공한 근본적 원인이 과연 모함마드 2세의 모욕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서아시아 지역의 쇠퇴가 몽골의 책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당시 서아시아 지역의 혼란했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호라즘의 역량으로는 칭기즈 칸의 힘에 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역사가 짧고 사료가 많지 않아 호라즘 왕조의 정치/사회 구조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대개 셀주크 제국을 통해 확립된 튀르크-페르시아식 국가 체제가 호라즘 왕조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본다. 유력한 튀르크멘 유목부족들과 굴람/맘루크들이 군사력과 정치 권력을 보유하고, 정부 행정과 학술, 문화적 작업을 담당하는 페르시아인 학자-관료 집단을 후원하는 체제이다. 아누쉬테긴 계열 호라즘샤들은 물론 튀르크인 굴람 출신들이지만, 정부의 공식 언어는 페르시아어였다.

4 기타

몽골군이 수도 사마르칸트를 공격할 당시 이들에게 내려진 지령은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사마르칸트에는 기어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오트라르 영주 이날추크는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 몽골군에 붙잡혀서 두 눈에 녹인 을 들이붓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2006년에 한국 공중파를 탔던 드라마 칭기즈 칸에선 끓는 수은을 부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1. 이날축, 이날치크 등으로도 표기된다. 가끔은 이날죽으로도 음역된다(...).그래 내가 사신들을 죽였다 칭기즈칸! 이 날 죽여봐라!
  2. 몽골 제국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우리 교역하자. 그니까 대상 파견 어떠냐?" 루트나 전시의 계산적인 학살 및 파괴 행위를 보면 이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몽골이 최우선으로 노리던 건 인근의 서하국이나 금 제국이었지, 멀리 떨어진 호라즘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서 재반박되기도 한다.
  3. 무슬림 문화에서 남성의 수염을 강제로 자른다는 건 그야말로 고자로 만든 것이나 동등한 모욕이다. 중국에서 만든 드라마에서도 수염을 잘리고 돌아온 사신이 칭기즈 칸에게 짧고 굵게 잘 설명했다. "이슬람교 신자에게 수염은 남자의 증거 그 자체입니다. 대칸이시여! 복수해주십시오!" 그래도 수염은 다시 자라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