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민족의 역사 TÜRKLERİN TARİH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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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의 역사 - 상고대 / 고대 / 중세 / 근현대 ANADOLU TARİHİ Η ΙΣΤΟΡΊΑ ΤΟΥ ΑΝΑΤΌΛΙ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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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년 ~ 1307년까지 존속한 이슬람의 왕조. '룸 셀주크 왕조'라고도 하며 현대 터키어로는 아나톨리아의 셀추크 일족의 왕국이라는 의미의 '아나돌루 셀추클루 데블레티(Anadolu Selçuklu Devleti)'나 룸 술탄국이라는 의미의 '룸 술탄르으(Rum Sultanlığı)'라고 한다. 참고로 룸(روم)은 아랍어로 로마라는 의미. 셀추크는 셀주크(Seljuk)의 터키어[1] 발음이다. 셀주크(Seljuq)는 페르시아어로 Saljūqiyān(살주키연)이라고 부르던 걸 유럽에서 차용해 온 것.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오늘날의 말라즈기르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 전부터 소아시아 동부를 왕래하던 투르크족은 군사적 공백과 동로마 내부 분열을 기회로 본격적으로 아나톨리아 동부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후 투르크족은 아나톨리아를 사실상 장악하다시피 했고 셀주크 제국 왕족인 쿠탈므쉬의 아들 쉴레이만(سليمان بن قتلمش, Kutalmışoğlu Süleyman)이 아나톨리아 서부 니케아를 빼앗아 그곳에서 독립한 뒤, 룸 술탄국을 건국하게 된다. 이 시기에 니케아가 이즈니크(İznik)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다른 터키 도시들도 그렇지만 그리스어 발음을 자기식에 맞게 고친 것이다.[2] 여기서 룸은 '로마'를 뜻하는 말로, 이 지역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당시 이슬람 세계가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
이후 동로마 제국은 트라브존과 북서부 아나톨리아 해변을 제외하고 룸 술탄국에 동방 영토를 내주고 만다. 하지만 이후 동로마에서도 알렉시우스 1세라는 걸출한 군주가 등장하였고 서방에서 1차 십자군이 몰려들게 되자 서부 아나톨리아에서는 물러나게 되고 마수드 1세 시절에는 주로 동방을 정복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이후 12세기 내내 룸 술탄국은 제국 영토였던 지역을 수복하려는 동로마와 서쪽의 십자군과 맞서게 된다.
1180년대 무렵 소아시아 세력권.
마수드 1세 시절에는 서부와 흑해 연안을 제하고 아나톨리아는 룸 술탄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후 1176년에는 이전부터 서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영토를 수복하던 동로마의 황제 마누엘 1세의 군대를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패배시키면서 동로마의 아나톨리아 수복 시도를 저지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내부 분열이 지속되면서 룸 술탄국의 아나톨리아 지배는 공고한 것이 되었으며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올린다.
1190년경의 룸 술탄국.
하지만 이후 십자군의 반격을 받아 룸 술탄국은 곤경에 처했고 1204년에 서방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로마 제국이 4차 십자군으로 몰락하지만 당시 동로마의 잔존 세력인 니케아 제국과 트레비존드 제국이 아나톨리아 서부와 흑해 연안에 각각 버티고 있었으므로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손에 넣진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 13세기 중반엔 당시의 절대 강자 몽골의 침략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고 이는 재건 동로마가 한숨 돌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해 주었다. 1243년 쾨세다으 전투에서 대패한 룸 술탄국은 이후 몽골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후 일 칸국의 칸들이 룸 술탄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했다. 이런 과정에서 룸 술탄국 각지의 가지와 토후들이 사실상 독립함에 따라 내부 분열로 인해 룸 술탄국은 점점 위상을 잃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수복 이후 소아시아 세력권(1263년).
이렇게 룸 술탄국이 유명무실해지고 그 와중에 고질적인 투르크족의 내분이 심화되어 왕족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중간에 일 칸국이 개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술탄을 내치고 자신들이 원하는 술탄을 복위시키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각지의 토후들은 통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 후 룸 술탄국의 마지막 술탄이 죽자 일 칸국은 신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고 총독을 파견한다. 그리하여 룸 술탄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13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과 맞닿은 북서부 국경에 가까운 비티니아 지방에 위치한 가지 군후국의 족장 오스만 1세의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오스만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역대 술탄
여기 기록된 이름/발음들은 현대 터키어 식으로 읽은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튀르크인들은 중세 튀르크어를 썼지만, 르네 그루세에 따르면 당시 코냐(또는 콘야)의 궁정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는 페르시아어였다. 특히 룸 군주의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카이후스라우(كيخسرو), 카이쿠바드(كيقباد), 카이카우스(كيكاوس) 따위의 인명들은 이란의 전설에서 따온 것이다.
쿠탈므쉬의 아들 쉴레이만 샤흐(Kutalmışoğlu Süleyman Şah) | 1077 ~ 1086 | 이즈니크에서 룸 술탄국의 창설 |
클르치 아르슬란 1세(I. Kılıç Arslan) | 1092 ~ 1107 | |
멜릭샤흐(Melikşah) | 1107 ~ 1116 | |
뤼크네딘 메수드 1세(I. Rükneddin Mesud) | 1116 ~ 1156 | |
클르치 아르슬란 2세(II. Kılıç Arslan) | 1156 ~ 1192 | |
그야세딘 케이휘스레브 1세(I. Gıyaseddin Keyhüsrev) | 1192 ~ 1196 | 1차 재위 |
쉴레이만 샤 2세(II. Süleyman Şah) | 1196 ~ 1204 | |
클르치 아르슬란 3세(III. Kılıç Arslan) | 1204 ~ 1205 | |
그야세딘 케이휘스레브 1세(I. Gıyaseddin Keyhüsrev) | 1205 ~ 1211 | 2차 재위 |
이제딘 케이카부스 1세(I. İzzeddin Keykavus) | 1211 ~ 1220 | |
알라에딘 케이쿠바드 1세(I. Alaeddin Keykubad) | 1220 ~ 1237 | |
그야세딘 케이휘스레브 2세(II. Gıyaseddin Keyhüsrev) | 1237 ~ 1246 | |
이제딘 케이카부스 2세(II. İzzeddin Keykavus) | 1246 ~ 1260 | |
알라에딘 케이쿠바드 2세(II. Alaeddin Keykubad) | 1249 ~ 1257 | |
클르치 아르슬란 4세(IV. Kılıç Arslan) | 1248 ~ 1265 | |
그야세딘 케이휘스레브 3세(III. Gıyaseddin Keyhüsrev) | 1265 ~ 1284 | |
그야세딘 메수드 2세(II. Gıyaseddin Mesud) | 1284 ~ 1296 | 1차 재위 |
알라에딘 케이쿠바드 3세(III. Alaeddin Keykubad) | 1298 ~ 1302 | |
그야세딘 메수드 2세(II. Gıyaseddin Mesud) | 1303 ~ 1308 | 2차 재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