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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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基榮
1916년 5월 2일 ~ 1977년 4월 11일

대한민국언론인이자 체육인 겸 정치인. 호는 백상(百想). 종교불교다.

1916년 경성부 용산(現 용산구)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초반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고,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해서 한국일보로 바꾸었다. 한국일보 사장 겸 발행인으로 일하다가 1964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입각하였다.

그의 경제부총리 재임 기간은 한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성장의 본격화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때였으며, 이 점에서 후임인 김학렬, 남덕우 등과 더불어 박정희 시대 경제건설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966년 삼성그룹사카린 밀수 사건이 불거지자 국회 오물 투척사건으로 김두한 의원에 의해 똥물을 맞는 봉변을 당했고, 얼마 안되어 경제부총리 직을 떠나야 했다.

이후 IOC위원, 아시아 경기 연맹(AOC) 종신 명예 위원장, 남북 조절 위원회 부위원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서울특별시 종로구) 등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사망하였다.[1]

1954년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기자 공채를 시행하여 한국일보의 기반을 다지고,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여 사장을 겸했다. 거기에 적자에 허덕이던 HLKZ-TV를 인수해서 대한민국 최초(...)로 신방겸업을 하기도 했다.[2] 그리고 의외로 고우영을 메이저급 만화가로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했다.[3] 그러나 경제부총리로 입각하면서 신문 경영에 소홀해졌고, 이틈에 중앙일보가 기자와 광고국 직원을 대량으로 빼가면서 한국일보는 하향세를 타게 됐다고.[4] 현재는 조중동에 밀려 안습한 위치기 됐지만, 그래도 1990년대까지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황석영의 회고에 따르면, 1974년에 처음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 지면에 연재할 당시 자료 조사비로 당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덥석 내줬는데, 황석영 본인은 어쩌다 보니 소문 듣고 몰려든 배고프던 주변 문인들 술 사주고 밥 사주고 하느라 그만 보름만에 다 써버렸고, 다시 장기영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번에는 자료비로 꼭 써라. 안 그러면 다음은 없다"면서 처음보다는 적게 자료비를 내 주고, 자주 가는 술집 명함에 장기영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앞으로는 술이 마시고 싶으면 여기서 내 이름 앞으로 달아놓고 마셔라. 단 자료비로는 술 마시지 마라"라고 했다고.[5]

일간스포츠에서 주최하는 국내유일의 종합예술상인 '백상예술대상'은 그의 호에서 유래했다.

제3공화국에서 배우 백일섭씨가 장기영 역을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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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이후 한국일보는 장기영의 첫째 이들이 물려받았다가 지병으로 일찍 별세 해 동생인 장기영의 둘째 아들이 물려받았다가.... 경영을 말아먹고 편집국을 폐쇄하는 등의 막장행각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14년 동화그룹에 인수 돼 장기영 일가는 경영권을 완전히 잃게 됐다.
  2. 하지만 장기영이 인수한 지 2년 후에 화재사건으로 망하게 되었다.
  3.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고우영은 1990년대 중후반에 한국일보 소속으로 잠깐 시사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4. 1965년 중앙일보 창간 당시 기자와 직원 대부분이 한국일보에서 빼온 인원이었다고 한다.
  5. 출처: 백상예술재단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