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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榮淳
1923년 00월 00일 ~ 1995년 03월 29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 정치인, 변호사. 대한민국 제9대 검찰총장. 제15대 법무부 장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국회의원.
딸이 장정숙 20대 국회의원이다.
2 생애
1944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고 서산여자중학교, 대전여자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법무관 과정 3기를 수료하였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복무하였다.
1961년 박정희가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자, 대령 신분으로 39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제9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62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1963년 예편하였다.
예편 직후 40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제15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64년 감사원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1]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청양군-홍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 원내부총무로 임명되어 신민당 원내부총무이자 인접 지역구(예산군) 국회의원이던 한건수와 자주 교류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청양군-홍성군-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한건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법사위원장 시절 국회의원의 변호사 겸직 허용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개진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였다. 제9대 국회의원 시절 예산중앙고등학교(현재의 예산전자공업고등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청양-홍성 지역에서만 무려 13년 동안 국회의원직을 역임한 셈이다.[2] 1979년 12월 민주공화당에서 김종필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민주공화당 총재보좌역에 임명되었다.
1980년 7월 18일 신군부에 의해 영장도 없이 태평로 구 국회별관에 위치한 합동수사본부 조사실에 불법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재산을 강제 헌납당했다. 무려 37일이나 불법구금되었다가 8월 23일 석방되었다. 석방되기 5일 전인 8월 18일 "일신상의 사정에 의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코저 하오니 청허하여 주시옵기를 앙청하옵니다."란 사퇴서를 제출하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전두환 정권 이후에는 변호사 업무에 전념하였다. 청주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를 지냈다.
1995년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