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클레멘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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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Roberto Clemente Walker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
생몰년도1934년 8월 18일 ~ 1972년 12월 31일
국적푸에르토 리코
출신지캐롤라이나
포지션외야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54년 브루클린 다저스 자유계약
소속팀피츠버그 파이리츠 (1955~1972)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구결번
1 4 8 9 10
빌리 마이어랄프 카이너윌리 스타젤빌 매저로스키폴 웨이너
20 21 33 40 42
파이 트레이너로베르토 클레멘테호너스 와그너대니 머토재키 로빈슨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로베르토 클레멘테
헌액 연도1973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93.38% (1회)[1]
1966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올랜도 세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71년 월드 시리즈 MVP
브룩스 로빈슨
(볼티모어 오리올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진 테네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당신에게 세상을 좋게 바꿀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Anytime you have an opportunity to make a difference in this world and you don't, then you are wasting your time on Earth.)

로베르토 클레멘테라는 선수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를 한 마디로 요약해 줄 수 있는 그의 명언.

1 소개

모든 별 중에 가장 환하게 빛날 별
원조 호세 페르난데스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야구선수.

메이저리그의 1세대 카리브해/중남미 출신 선수 중 한 명으로, 통산 타율 0.317과 3,000 안타, 외야수로서 12회의 골드글러브MVP 1회 수상 등 공수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선수였으며,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든 중남미 출신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 중남미 출신 선수들 중에서 21번을 달기는 희망하는 선수라면, 거의 100% 그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봐도 좋다. 예를 들면 새미 소사.

통산 성적은 타율 .317, 240홈런, 3000안타, 출루율 .359, 장타율 .475, OPS .834, 순장타율 .158, BB/K 0.5, wRC+ 129, 1305타점, 1416득점을 기록했다.

2 선수 시절

원래는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했지만, 다저스가 제일 먼저 인종차별을 철폐하는데 앞장서는 바람에 다저스에 너무 좋은 흑인 및 히스패닉 계열 선수가 많아서 자리가 없어 마이너리그에서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규정상 일정 금액 이상 계약금을 받은 선수는 무조건 메이저리그 엔트리에 올려야 했고, 이를 어길 경우 룰5 드래프트에 나와야 했던 규정 때문. 결국 다저스는 그를 출전시키지 않고 그의 존재 자체를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숨기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바로 LA 다저스에서 흑인 차별을 없앴던 전설적인 명 단장 브랜치 리키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단장으로 취임해 그를 지명해 자신의 팀으로 데려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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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배드볼 히터로 머리부터 무릎까지 모든 공을 다 친다는 평을 들었던 선수였고, 실제로도 선수 생활 끝까지 이 배드볼 히터의 성향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설적인 안타왕인 조지 시슬러의 지도로 무거운 방망이를 쓴 후, 정확하게 볼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0년과 1971년 두 차례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피츠버그에 안겨주기도 했고, 본인은 꾸준히 3할 타율을 유지하면서 3000안타까지 도달했다. 아울러 역대 최고 수준의 우익수 수비를 자랑하기도 했다. 풋아웃과 '엘 바주카'로 불릴 정도의 엄청난 강견을 바탕으로 한 어시스트 같은 고전적인 스탯부터 Total Zone Runs 같은 세이버메트릭스 지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역대 우익수 지표에서 정상권을 기록하고 있다. 스즈키 이치로조차 클레멘테에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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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중남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서 맞서던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은 반드시 본명인 로베르토로 불리기를 원했고, 엉뚱한 별명이 붙을 경우 이를 정정하기 위해 언론과 맞서는 것도 불사했다. 아직 흑인 차별의 잔재가 남았던 시절에 비 미국인이자 흑인으로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중남미 출신의 흑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스타플레이어로서 자존심을 세우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끝까지 투쟁한 인물이기도 하다. 덕분에 중남미 출신 선수들 모두의 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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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사망을 다룬 피츠버그 지역지 헤드라인.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영광보다도, 비극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최후로 인해 후대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팔팔한 현역이던 1972년 10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12를 기록했으며 통산 12번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더불어 시즌 마지막 안타를 정확하게 통산 3,000번째 안타로 장식하며 사실상 명예의 전당행도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해 연말, 그는 전세 비행기에 식량 등의 구호물자를 가득 싣고 니카라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니카라과에 구호물자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탄 비행기는 악천후 속에 추락하고 말았고, 그를 포함한 구호팀은 전원 사망하였다. 그리고 전미가 울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였다.[2][3]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3,000번째 안타는 바로 자신의 생애 마지막 타석에서 나온, 마지막 안타였다. 물론 그 시점에는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3 명예의 전당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그는 루 게릭 이래 최초로 5년간의 유예기간 없이 바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고, 92.69%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러면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미국 외 출신으로 들어간 첫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

4 사회공헌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매년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이 큰 선수에게 시상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으로 남아 있다. 이 상은 현재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타고 싶어하는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4]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의 프로야구 리그도 그의 이름을 따 로베르토 클레멘테 프로야구 리그.

히스패닉계의 영웅인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등번호인 21[5]메이저리그 전체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재키 로빈슨의 딸이 이에 반대[6]해서 무산되었다. 그의 등번호 21번은 참고로 1회와 2회 WBC에서 푸에르토 리코 대표팀이 영구결번 처리했다. 아울러 당연히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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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홈구장인 PNC 파크 바로 옆을 지나는 다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리지(Roberto Clemente Bridge)로 명명되었고, 파이리츠의 전 구장인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이 있던 자리에 로베르토 클레멘테 기념 공원이 조성되었다.
PNC 파크의 우측 펜스는 클레멘테 월(Clemente Wall)로 명명되고 있다. 펜스의 높이는 그의 등번호에서 딴 21피트(약 6.4m)이다.


이것은 뉴욕에 있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동상. GOYA 푸드에서 협찬해서 조성된 로베르토 클레멘테 주립공원에 있다.

그리고 정확히 33년뒤에 아들인 로베르토 클레멘테 주니어가 33년전 아버지가 준비했던 구호품과 똑같은 구호품을 가지고 니카라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엉망이 된 동남아가 더 도움이 급하다고 하여 그는 동남아로 구호품을 가지고 직접 가서 전해줬다.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야구선수의 길을 가지않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는듯.

2015년, 클레멘테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를 축복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 후술하겠지만 비행기 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으로 5년 유예 기간을 면제받았다.
  2. 사실 이전부터 니카라과에 구호품을 전달해줬는데 니카라과를 통치하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일당과 그 휘하의 썩은 관리들이 그걸 싸그리 먹튀해가는 일이 벌어지자 열받은 클레멘테가 자신이 직접 전세기 타고 전달하려 했다고 한다. 이것이 알려진 후 더더욱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3. 원래는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절친한 후배인 톰 워커라는 선수도 같이 갈 예정이었지만 클레멘테는 미혼인 그에게 가족과 연말을 보내길 권했고 톰 워커는 클레멘테가 구호물자를 싣는 것만 도와주고 돌아오게 되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톰 워커가 결혼한 후 낳은 아들이 피츠버그에서 준수한 타자로 활약했던 닐 워커이다.
  4. 2005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였던 존 스몰츠의 수상소감. "이 상은 지금껏 내가 받은 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이다. 사이 영 상을 받을 때 보다 더 영광스럽다."
  5. 재밌게도 메이저리그 전체 영구 결번인 42의 정확하게 반이 되는 숫자다.
  6. 재키 로빈슨은 야구계의 유색인종에 대한 대우를 바꾸게 한 독자적인 위치에 있고,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훌륭함은 인정하지만 그의 영구결번을 인정하면 그 기준에 대한 또다른 논란이 생길것이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