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起龍
(1562년 - 1622년)
동상 |
1 소개
본명은 정무수였는데, 본래 몰락한 집안의 자제였으나 그의 아내 권씨가 관상을 보아 그의 됨됨이를 알고 그를 성심껏 내조했다고 한다. 그가 무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선조가 자다가 꿈에서 종각에서 자는 용을 보았고, 다음날 종각에 가서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기룡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무과에 급제하자 선조가 친히 정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정기룡을 주인공으로 한 박상하의 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가 출판된 이후 사람들에게 60전 60승 무패의 장수, 육지의 이순신 등 조금 과장되게 알려졌다.
광해군 때 통제사에 자리에 오르지만 후궁들에게 뇌물을 써서 승진했다는 소리도 있고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있으나 무죄로 판명되었다.
후에 영조대에 와서 충의공(忠毅公)으로 격상되었다.
2 임란에서의 활약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 이순신, 권율이야 익히 알려져있는 분들이고 정기룡은 당시 나이가 30대의 젊은 장수였기에 이례적이다. 한명련은 출생일이 밝혀져있지않고 이괄의 난에 참여해 참살당했으므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세간에 알려진 약력에 의하면 상관인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필마단기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 공식적인 기록에서 정기룡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4개월이나 빠른 1592년 5월. 참패로 유명한 용인 전투 초기에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2~3일 전 단신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규모 일본군과 마주치자 이를 단신!으로 공격해서 격파한 것이다. 당시 경상감영 아전으로 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아전이 남긴 기록 "정만록"에 실린 경상감사의 장계 사본(실록에는 접수 사실만 보고되고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록에서 원균의 적전도주 이야기가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에서 처음 나온다. 훗날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공훈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전과에 자극받은 타도 감사들이 세력도 약한 경상감영만 공훈을 세우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진격을 서두르다가 용인에서 크게 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감사군(敢死軍)이라는 부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어온 편곤을 무기로 마상에서 편곤을 휘두르면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어내고, 명 황제(만력제)도 그의 실력에 감탄해 총사령관 직책인 총병벼슬을 내려주었다는데 사실 이는 근거가 불분명하다.
2.1 그러나...
정기룡의 전공중에는 그의 개인전공을 집성한 매헌실기에만 나오는 것이 많다. 행장은 개인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는 게 많다. 이에 대해 난중일기나 징비록 등을 들어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둘은 이미 다른 기록과 교차 검증이 완료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실록의 기록에는 정기룡이 조선군에 투항한 항왜병까지 죽인 경우도 있다. 이때의 실록 기록을 보면 왠지 의미심장하다. 정기룡의 승전 중 상당수가 아군을 죽이고 적군이라 속인 전공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중에 이른바 순왜들을 다 잡아 죽이려든 일도 있고. 그런데 참고해야 할 점은 정기룡은 2차 진주성 싸움에 첫 부인인 강씨를 잃어 왜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정기룡의 원심은 실록에서도 확인되는데, 당시 비변사가 "왜적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대로 통솔하기 힘드니 (임란도중 아버지를 잃은) 홍계남이나 정기룡 같은 왜군에 대한 원한이 깊은 맹장에게 통솔케 하자"는 기록이 있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정기룡은 항왜 중 2차 진주성 싸움에 공적이 있는 왜병들을 알아봐 참수했을 가능성이 없잖아 있다.
전후 7년 뒤 1등 공신에 올라서 일부 사람들이 이순신과 비교를 하지만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이고, 이 분은 "선무 원종 공신" 1등인 것이다. 즉, 선무 공신에 들지 못한 후보자라고 할수도 있다. 이 선무 원종공신 1등에는 조헌, 고경명 부산포에서 전사한 정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등이 있으며 3등까지 합해서 18명인 선무 공신과 달리 선무 원종공신은 총 9060명(...)에 달한다. 당연히 수가 적은 선무 공신이 더 끗발이 높다. 실제로 공신에게는 공신전 등이 주어지지만 원종공신에게는 그런거 없다. 후손들에게 음직(음서)의 혜택 등이 좀 주어질 뿐이다.
또 이러면 정기룡은 혈연이나 파당이 없어서 추천을 받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논리로 서인이라도 (그나마도 거의 티를 내지 않았다.)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오성 이항복을 권율이 장인이라서 공신을 준 정말 썩을 놈으로 만들고 있다. 권율과 이항복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이건 애초에 의도도 없겠지만,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물론 이항복이든 이덕형이든 서인과 동인으로 파는 갈렸어도 당파에 연연하지 않는 실무형 관료들이긴 했지만. 호성공신이 엽기적으로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선무공신의 문제는 말 많은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동등한 선무공신 1등이라는 것 뿐이다. 물론 이순신과 권율은 정1품, 원균은 종1품이다. 근데 애시당초 선무공신 책봉 때 원균은 이억기 등과 동일한 2등으로 책봉받았는데, 그나마 이것도 그럴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신료들이 선조 눈치봐서 그렇게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한 술 더 떠서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동일한 1등으로 책봉했다.
3 여담
관련 유적과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으며 최근에는 상주시에서 정기룡 장군을 소재로 뮤지컬도 제작한 것으로 볼 때 상주시에서 상당히 밀어주는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정기룡 장군은 정작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