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성 전투

寧遠之戰
Battle of Ningyuan

Battle of the Eternal Castle

"짐은 25세부터 병을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는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 누르하치

1626년, 명나라원숭환(袁崇煥)과 후금누르하치(努爾哈赤)가 영원성(寧遠城)을 놓고 벌인 공성전. 이 전투가 명나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명의 요동 방어선은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비록 1641년 산해관 외곽의 지역이 모조리 홍타이지에게 함락당했지만 은 결코 오삼계(吳三桂)가 지키는 산해관(山海關)을 자력으로 넘어오지는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영원성 전투
날짜
1626년
장소
중국, 랴오닝(遼寧省) 흥성(興城)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명(明)(淸)
지휘관원숭환누르하치
병력2만16만
결과
명군의 방어 성공
기타
후금의 진격 저지, 요동 방어선의 확립

1 사르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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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년에 사망한 홍치제(弘治帝)의 치세를 끝으로, 16세기의 명나라는 악명높은 명나라 F4 등의 등장으로 모든 부분에서 내리막선을 타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 전세계적으로 보아도 가공할 규모와 체제를 가지고 있는 명나라였기에 급격한 붕괴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으로 나중에 가면 뭔짓을 해도 살아나기 어려울 만큼 착실하게 붕괴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숭정제가 욕을 덜 먹는다

그 무렵, 만주 지역에서 여진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이성량(李成梁)의 후원을 받고 힘을 키운 누르하치는, 마침 조선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공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틈을 타 세력을 무서운 속도로 확장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한성까지 점령하는 난리통이 벌어지자 명나라도 이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이후 조승훈, 이여송(李如松) 등을 파견하여 조선을 돕는 등 이쪽 방면에 모든 센서를 총동원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에 대해 감시가 느슨해지자, 그 틈을 이용해서 마구마구 세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589년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을 모조리 통합했고, 1599년에는 하다부를 복속시켰고, 1607년에는 후이파부를 멸망시켜 해서 4부 가운데 2부를 병합했다. 그리고 다시 6년 뒤인 1613년에 우라부가 멸망했다. 단순히 부 하나를 멸망시키는데 그런 시간이 든것이 아니라, 그러는 사이에도 만주는 내부적 역량이 차곡차곡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것은 오직 예허부 뿐. 예허부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명나라는 유격 마시남(馬時楠)과 주대기(周大較) 등에게 1천명을 주어 보내는 등 공개적으로 누르하치의 반대편을 들기 시작했다. 아직 명나라와 싸우기엔 시기상조여서, 이때 누르하치는 일곱 개의 성 등을 함락시키고 일단 물러났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는데 1616년 정월, 누르하치가 드디어 가한, 즉 칸(Khan)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었다.

점점 노골적인 행태가 되어가는 누르하치의 모습에, 명나라는 경제적 제한 조치로 대항했다. 유목민족이라고 해도, 여진족의 주수입원은 어디까지나 수렵과 교역이었다. 인삼이나 가죽을 팔 곳이 없어진 누르하치는 크게 곤궁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자 누르하치는 무순으로 진격하여 유격 이영방(李永芳)을 항복시켰고, 후퇴하는 군대를 추격하려온 장승음의 1만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때, 모래 먼지가 명나라 군대를 덮쳤고 후금 군대는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1619년 임진왜란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병부시랑 양호(楊鎬)를 요동 경략에 임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게 해, 누르하치를 완전히 눌러버리려고 시도하였다. 사실 이때 군대의 규모나, 파견한 시기를 생각해보면 재빠른 조치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세한 전투의 경과는 사르후 전투 항목 참조. 결과적으로 전투는 명군의 대패로 끝났고, 후금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났다.

2 웅정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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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정필(熊廷弼)

사르후 대패의 책임이 있는 양호는 당연히 해임 후 처형되었고, 후임으로 부임된 사람은 웅정필(熊廷弼)이었다. 웅정필은 1598년(萬曆 26년)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어사(御史)로서 요동(遼東)에 파견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서 근무했다. 요동 사정에 밝은 인물을 기용한것이다. 웅정필의 자는 비백(飛百)이고, 호(號)는 지강(芝岡)이다. 호광(湖廣) 강하(江夏, 지금의 湖北 武昌) 출신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병법에 밝았으며,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2.1 싸우지 말자

웅정필의 요동방위전선에 대한 가장 큰 생각은 우선 싸우지 않는 것이었다. 웅정필의 생각에 지금은 싸우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안그래도 명군 자체가 쇠퇴현상이 심했는데, 바로 직전에 대패를 당했고, 그 전의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만주 팔기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고 무기, 마필 등은 어지러워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던 반면 누르하치의 부하들은 그 위세가 대단하고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했으므로, 지금 당장 싸우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상황이며, 최소한 웅정필은 그리 판단했다.

웅정필은 어지러운 군심을 다독이고 쥐어짜서 18만의 대군을 만들어낸 다음, 각지에 배치하고 연락망을 만들고,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작은 공격은 방어력을 이용해서 막아내고 큰 공격은 서로가 바로바로 구원을 올 수 있도록 하였는데, 소규모 유격대를 조직하여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군사훈련을 계속 시키는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누르하치도 적의 이런 태도에 잔뜩 긴장해서 1년이 넘게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다.

일단 적을 저지해내는 임무라는 측면에서 웅정필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문제는 통쾌하게 적을 물리치는 싸움이 못 되니, 눈에 띄는 전공이랄 것은 없고 또한 이는 내부에서 공격당할 때 책임을 돌릴만한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당초에, 웅정필은 자신이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내부에서 흔들어댈 것을 걱정하여 만력제에게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놓고 현장에 나왔다. 그런데 만력제가 그 사이에 죽어버렸기 때문에, 쉴드를 쳐줄 사람이 사라졌고 사방에서 웅정필을 마구 쪼아대기 시작했다.

고조(顧慥)와 요종문(姚宗文) 등의 관리들이 웅정필이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고, 변방에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한다고 고발했다. 결국 웅정필은 일이 이렇게 되자 물러나게 되어버렸고, 후임은 원응태(袁應泰)라는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관리로선 제법 유능하다는 평가는 받았으나, 관리로서의 유능함과 장수로서의 유능함은 당연히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순식간에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지고, 50여개의 요새와 70여개 성이 무너져 내렸다. 눈 깜작하는 사이에 요하(遼河) 동쪽에서 명나라의 영역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졌다. 망했어요

2.2 싸우자

화가 난 내각 대신 우일경이 웅정필을 내각 대신으로 보냈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것이라 말했고, 다급해진 명나라 조정은 웅정필을 다시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임명했다. 내가 일 망친 다음에 네가 수습하라는 식 그리고 왕화정(王化貞)을 요동순무(遼東巡撫)로 기용했는데……이 인사조치가 문제를 일으켰다. 웅정필은 싸우지 않는 것을 전략으로 내세우는 인물인데 비해, 왕화정은 큰 공을 세울 비책을 노리는 성향이었다. 둘은 각자 조화가 되기는 커녕 여러모로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왕화정의 비책이란 당초에 무순에서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던 이영방에게 사람을 보내 내통을 권유하고, 피도(皮島) 즉 가도(椵島)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의 뒤를 치겠다는 이야기를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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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종(孫承宗)

게다가 심지어 몽골에서 40만 대군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안되지만, 이런 헛소리를 깊이 믿었던 왕화정은 이렇게 되면 승리야 뻔한 일이니, 자신이 공을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요동순무인 자신은 요동경략인 웅정필의 밑에 있는 처지니, 공을 독점하려면 웅정필과 불화 하여 이를 소문을 내야만 자신의 의사로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

거기다 왕화정은 위충현과 친하기도 했기에 이런 점도 믿고 있었다. 수비를 중히 여기는 웅정필은 "이것은 꿈과도 같은 소리다." 꿈 깨쇼 하면서 충고를 했지만 왕화정은 웅정필이 자신이 세울 공을 시기한다고 믿었기에 별로 중하게 듣지 않았다.

둘의 대립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왕화정이 군대의 명칭을 평요(平遼)군이라고 하자 이 지방에서 오래 근무했던 웅정필은 요동 지역의 遼자를 사용하는게 사람들의 불쾌감을 줄 것을 우려해 동쪽을 평정한다는 평동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자 왕화정은 곧바로 성을 내는 판국이었다.

또한 웅정필은 쌍방의 실력과 전력을 분석한 뒤 군사를 삼면으로 나눠 광녕을 막고, 등주, 내주, 천진에 수군을 배치하고, 산해관에 경략을 특설해 세 곳을 통제하는 형태로 가자고 했지만 왕화정은 요하 지역에 전군을 배치, 6만 군대로 일거에 승리를 거두자는 주장만을 고수했다. 이러한 불화는 결국 누르하치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고, 1622년 정월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서로 진격해 들어갔다.

요서로 접어든 누르하치는 광녕은 일부러 공격하지 않고 전초인 서평을 공격해 서평을 지키던 나일관을 전사시키고 3,000명을 죽였다. 왕화정은 손득공(孫得功)의 조언에 따라 3만 군대를 그에게 주어 서평을 구원토록 하려고 했는데, 정작 이 손득공이 적과 만나자마자 명군이 패배했다고 소리 지르며 말에 채찍질을 하며 달아났다. 대장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당연히 병사들은 당황하여 제대로 싸움다운 싸움도 못해보고 패배했다. 사실 손득공은 이미 저쪽으로 넘어가버린 사람이었다.

손득공은 광녕으로 돌아와 의도적으로 후금군이 가까이 왔다고 하며 성 내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왕화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사무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적이 와서 다급하다. 어서 피해야 한다." 는 소식을 듣자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깜빡 거리며 앉아 있었다. 왕화정에게 이런 말을 한 참장은 다짜고짜 그를 말 위에 태워 서쪽으로 도망보내 버렸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손득공의 인도에 따라 무사히 광녕성에 입성했고, 왕화정을 200여리 추격하다가 그만두었다.

결국 이영방의 내통도, 모문룡의 교란도, 몽골의 천지를 가를 듯한 40만 대군도, 무엇 하나 없었던 것이다. 왕화정이 개꼴이 돼서 웅정필을 만나자, 웅정필은 쓴웃음을 지었다.

"6만 군대면 금나라 군을 일거에 무찌르겠다는 사람이 아니오? 그래, 이젠 어찌 할 셈입니까?"

그제서야 참회를 한 왕화정이지만 무슨 도리가 생길리가 없었고, 둘은 아무 방법도 없이 산해관으로 들어갔다. 이 일은 고작 20여일 만에 결판이 난 싸움이었고, 요동 전지역을 완벽하게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왕화정과 웅정필 모두 체포되어 죄를 추궁받았다.

굳이 죄를 따지자면 왕화정의 죄가 더욱 컸고, 다만 웅정필은 상관이라 책임도 따라온다는 측면은 있었으나 애시당초 그가 무엇을 해볼 방법이 없었으니 상관이라 해도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위충현 등으로 인해 책임을 혼자 덮어쓰고 참수되었다. 웅정필의 목은 변방의 9곳(遼東, 薊州, 宣府, 太原, 大同, 延綏, 固原, 寧夏, 甘肅)으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처형이 집행된 것은 1625년의 일이었다. 웅정필은 마지막 절명시를 남겼다.

"이 혼이 다시 살아나길 바랄 쏘냐? 절필하고 탄식하니 그 한숨 소리에 날이 밝구나."

웅정필은 1629년에 숭정제 시절에 대학사(大學士) 한광(韓爌)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양민공(襄愍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왕화정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져 결국 그도 1632년에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누굴 죽이고 누굴 회복시킨다 하여도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올 리는 만무하고 잃어버린 땅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이제 명군은 산해관 서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국도를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겼고, 이곳을 성경이라 불렀으니 훗날 봉천부로 불리우게 되는 곳이다. 이제 팔기군은 요하를 건너 요서에까지 진출했다. 산해관만 넘으면 북경은 일직선이니, 일이 시간문제 같아 보이기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누르하치조차도, 거의 일이 목전에 다다른 이 시점에 생각지도 못한 저항에 직면하여 쩔쩔매야 했다. 바야흐로 명나라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 원숭환(袁崇煥)이라는 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3 원숭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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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환(袁崇煥)

누르하치의 군대에게 양호가 이끄는 명나라군이 대패한, 사르후 전투의 광풍이 불던 시기, 35세의 한 문인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소부의 지현이라는 낮은 직책에 임명된 그 남자의 이름은 원숭환. 자(字)는 원소(元素)이고, 호(號)는 자여(自如) 였다. 광동성 사람이었던 이 문인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원숭환은 말했다시피 과거 급제까지 한 문인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병법이나 군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한데다가 일부러 퇴직한 병사들을 만나 변경의 정세가 어찌한지를 묻고, 친구들을 만나도 시를 짓거나 하는 일보다는 군사 전략에 관해 논의하기를 즐겨 했던 인물이었다. 이는 상당히 독특한 일로,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원숭환은 밀덕짓을 하고 있었을 수도…….

이런 원숭한의 모습을 어사 후순(侯恂)이 쓸만하다고 눈여겨 보았고, 그리하여 병부(兵部)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가 되었는데, 이는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당시가 바로 1622년으로, 왕화정과 웅정필이 그야말로 대패를 당했던 시점이었다. 원숭환은 그렇게 불안정하던 시점에 홀로 적의 진영을 염탐하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그리고 대략의 사정을 파악하고 돌아와서 병부상서 손승종에게 이렇게 말을 올렸다.

"군마와 경비만 주신다면 제가 요동 수비를 책임지겠습니다."

3.1 영원성

웅정필 마저도 저리 되었으니, 달리 믿을 사람도 없었기에 천계제는 원숭환에게 은 20만 냥을 내주면서 산해관 밖에 있는 명나라군을 통솔하게 했다. 산해관 밖에 이른 원숭환은 군민을 동원하여 높이 3장 2척, 넓이 2장의 성벽을 축조하고 각종 화포와 화기들을 배치했다. 병부상서 손승종도 몇 갈래 군대를 영원(寧遠) 부근의 금주, 송산 등지로 보내어 그곳을 지키는 한편 영원을 지원하게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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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환의 면밀한 계획으로 영원성이 축성됨으로서 명군은 산해관에서 100km 떨어진 지점까지 방어선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싸움도 면밀하게 분석했다. 지금까지 명군이 연전연패를 했던 것은, 아무리 명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 해도, 후금군의 가공할 기동력 때문에 접전지역에서 계속 후금군이 숫자의 우위를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명군은 소수로 다수와 겨룰 준비를 항상 하여야 했다.

천우신조로, 명말의 한 천재의 선견 지명이 후금군과 싸우려는 원숭환을 크게 도왔는데. 선견 지명으로 명나라의 최후 방어선들을 강화시킨 자가 서광계로 서양문물 도입을 주장하여 완고한 조정을 설득하고 아담 샬과의 인맥을 이용하여 포르투갈로부터 무려 30문의 홍이포(紅夷砲)라는 신무기를 도입하여 11문은 산해관에 19문은 북경성에 직접 설치하였었다. 그러나 환관 위충현의 분탕질에 의해 더 도입은 못하고 지금은 서광계는 조정에서 물러난 상태.

덕분에 원숭환은 영원성을 축조하고, 산해관에만 배치되어 있던 11문의 홍이 대포를 전술적으로 이용하여, 영원성과 산해관의 각 요지에 대포를 재배치하였으며 손원화라는 화포 전문가를 불러서 부하들을 교육시킨다.[1]

빠르게 그 위력을 알아보고 서양의 신무기를 다른 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도입한 한 명의 천재와, 그 신무기를 자신의 부하들에게 완벽하게 숙련시킨 한 사람의 준걸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극동의 괴물을 막아내기 위한 준비가 끝난것이다.

원숭환, 그리고 손승종 그리고 관직을 때려치고 낙향한 서광계들은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 내에서 환관 위충현이 전횡을 부려 손승종이 물러나버렸고, 자신의 일당인 고제(高第)를 요동에 보내어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고제는 산해관에 오자 장병들을 모아놓고, 후금의 군대가 강해서 산해관 밖은 지키기 어려우니 명나라군을 모두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키자고 주장했지만, 원숭환은 철수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고제는 원숭환을 설복시킬 방법이 없자 조금 양보하여, 원숭환이 지휘하는 군대만 영원에 남아 있게 했으며 다른 명나라군은 전부 다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켰다.

3.2 한번 더 싸우자

한편, 이 시기 누르하치는 다시 한번 대군을 움직일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1626년, 그는 13만~16만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반면, 이에 대해 원숭환이 이끌고 있는 숫자는 고작 2만 이하. 완전히 사르후 전투 때와는 상황이 180도 바뀐 셈으로, 숫자적으로 보면 가히 대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산해관에 틀어박힌 고제는 전혀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에, 원숭환은 2만 이하의 병력과 함께 동북 최전선의 영원성에서 외롭게 버텨야만 했다.

누르하치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기반으로 원숭환에게 항복을 하라는 권고문을 보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병력이 무려 30만에 이른다고 자랑을 했는데, 실제로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숫자로는 상대조차 안되는 어마어마한 차이임은 달라지지 않다. 애시당초 누르하치는 영원성 따위 보다 그 뒤의 산해관에 마음이 더 가 있었을 것인데, 일단 산해관을 점령해서 화북으로의 입구를 틀어잡고 있다면 당장 관내 진입을 하지 않더라도 외교적인 부분에서 명에 굉장히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병 30만으로 끌고 와서 이 성을 공격하겠다. 이는 필히 깨질 것이다. 너희 관리들이 만약 항복한다면 곧 고작(高爵)에 봉하겠다."

하지만 원숭환은 "놀고 있네"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항복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원숭환은 장병들을 소집해 영원성과 목숨을 함께할 것을 다짐하며 결연한 의식으로 사기를 다잡았고, 성 밖의 백성들은 모두 영원성 내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성 주위를 모조리 초토화시켜 청야 작전을 벌였고, 성 내를 단단히 탐색하여 후금군의 밀정을 색출해 내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준비가 끝나고, 1626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대군이 드디어 도착했다. 숫자적으로도 압도하고 있었고, 계속되는 승전으로 인해 군대의 사기도 절정에 다다른 상황. 한번의 싸움이면 이 가소로운 요새와 풋내기 지휘관이 언제나의 명군처럼 무너질 것은 이치가 자명해 보였다. 그렇게 절망적일 것이 뻔한 싸움이 벌어졌다.

4 영원성 전투

4.1 16만 VS 2만

누르하치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백전노장이었고, 15만 명이 넘어가는 대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명나라군은 아무리 끌어모아도 2만 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총지휘관 원숭환 본인으로 평하자면 단 한번도 전쟁을 치르어 본적이 없으며 애초에 무인도 아닌 종이 위에서나 병법을 논하는(紙上談兵) 문인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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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영원성에 도달하여 공성을 명령한 누르하치가 본 것은 자신의 부하들 머리 위로 수도 없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쏟아지는 불덩어리들이었다.책상물림의 역습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15만이 넘어가는 압도적인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성 전체를 포위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앞의 병사들이 쓰러지면 곧바로 뒤의 병사들이 자리를 채웠으나 영원성에서 발포되는 홍이포의 맹렬한 포격에 모두가 쓸려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 누르하치의 완승으로 끝날 듯 싶던 전투는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이틀날이 되자 전투가 생각보다 어려워 졌다 판단한 누르하치가 직접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공성을 시작했으며, 원숭환 역시 망원루에 올라 수성을 지휘했다. 두 걸출한 인물은 직접 칼을 맞대지는 않았으나 간접적으로는 칼을 맞대고 싸운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노력에도 영원성에서 쏟아지는 홍이포의 포격은 사르후 전투 이후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후금군을 제대로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 단 한 발의 홍이포가 수 십, 수 백의 후금 병사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영원성의 명나라 군대의 무기는 화포와 같은 화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준비해 둔 돌과 화살들이 화포의 공격에 발맞추어 후금군의 머리위로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결국 영원성의 2만 군대가 누르하치의 16만 대군을 밀어내는 데는 고작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단 이틀만의 공성전 동안 후금군은 수 천명이 죽었고, 이들 중 일부는 성에 접근하여 피해를 주기전에 죽었다. 결국 후금군의 사기가 먼저 끝장이 났고 누르하치는 전면적인 후퇴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16만의 대군이 후퇴하자 영원성의 명나라 군은 이를 추격하며 약 30여 리를 뒤쫒아 후금군의 후방을 타격하며 영원성 전투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원숭환의 승리로 끝맺음 되었다.

후금을 상대로 씻을 수 없는 패배를 거듭하며 이제 중원까지 위협받을 위기에 처한 명나라는 드디어 처음 후금을 상대로 적절한 반격을 날리게 되었고 명나라 조정은 승전에 기뻐하며 큰 공을 세운 원숭환을 병부시랑(兵部侍郎) 겸 요동순무(遼東巡撫)로 임명, 승진시켰다. 또한 영원성 전투를 영원대첩(寧遠大捷)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반면 허약한 상대로 생각치도 못한 패전을 겪은 후금군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평생을 전쟁과 함깨한 백전노장 누르하치는 매우 상심하며 쓰러지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짐은 25세부터 병을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는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여러 날 슬퍼하다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2]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일월록에서 인용한 것에 따르면, 조선 역관(譯官) 한원(韓瑗)이 이때 마침 원숭환을 만나고 있었는데, 원숭환은 적군이 오는데도 태연하게 같이 병법을 논의하고 음식을 먹는가 하면, 후금의 대군이 오자 심지어 "적이 왔다." 하면서 빙그레 웃고는 적을 막아내었다고 한다. 이 일화의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여기 기록된 대포의 위력을 묘사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법 그럴듯 하게 되어있다.

그날 밤 적이 외성(外城)에 들어왔는데, 대개 숭환이 미리 외성을 비워두고 적을 유인한 것이다. 적이 병력을 합쳐 성을 공격하자 또 대포를 쏘니 성 위에서 일시에 불을 켜 천지를 환히 비추고 화살과 돌을 함께 떨어뜨렸다. 싸움이 바야흐로 치열해지자 성 안에서 성첩(城堞) 사이마다 매우 크고 긴 나무궤를 성 밖으로 밀어 냈는데, 반은 성첩에 걸치고 반은 성 밖으로 내놓으니 궤 속에 실상 갑사(甲士)가 엎드려 있다가 궤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서 화살과 돌을 던졌다. 이렇게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성 위에서 마른 풀과 기름과 솜 화약을 함께 던지니 얼마 후에 땅 속에 묻었던 포(砲)가 크게 폭발하여 성 밖에서 안팎으로 흙과 돌이 두루 날아 흩어졌다. 불빛 속에서 오랑캐들을 바라보니 무수한 인마(人馬)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적은 크게 꺾여 물러갔다.

4.2 홍타이지의 패배

원숭환

원숭환이 격파한 것은 누르하치 뿐만이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죽고 후계자가 된 홍타이지는 1627년 5월 11일, 요서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금주(錦州)를 둘러싼 전투에서 홍타이지는 명나라 조솔교(趙率敎)를 상대로 우위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금주를 함락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원숭환은 이미 홍타이지의 속내를 다 뚫어보고, 자신의 주특기대로 미리미리 준비를 해 놓은 뒤였다.

이를테면 누르하치의 사망 이후 홍타이지가 즉위할 때, 양국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원숭환은 사신을 34명 심양에 파견하여 축하하는 뜻을 보였는데, 기실은 정탐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금주성을 보수하고 성벽을 쌓아 올려 방어력을 튼튼하게 갖추었고, 홍타이지의 공격이 현실화되자 편지를 보내 조솔교 등을 안심시켰다.

"금주성의 병기와 병마로 얼마든지 금주성을 지킬 수가 있다. 적은 무더운 더위를 무릅쓰고 들어왔으므로 절대 오래 지탱해 내지는 못할 것인즉, 금주는 충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수하 조대수에게 기병 400명을 파견하여 구원토록 했다. 홍타이지는 금주 공략이 여의치 않자 아예 원숭환이 있는 영원성으로 와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원숭환이 이미 튼튼히 방어력을 갖추게 한 데다 직접 성 위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이틀만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홍타이지는 또다시 금주로 돌아가 금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전선으로 병사들은 무더위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병사들의 사기가 엉망이 되는것을 본 홍타이지는 당황하여 군대를 뒤로 물릴 수 밖에 없었다.

5 평가

영원성 전투의 의의는 명군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라는 데 있었다. 누르하치가 처음 군사를 떨치고 후금을 개국한 이래, 명군은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하며 요동에서 주춤주춤 물러나고만 있었다. 그러한 후퇴가 산해관에 이를 지경이었는데, 영원성에서 이를 막아내면서 적의 맹공은 이제 저지되었던 것이다.

전략전술적으로 볼 때도 모범적인 사례인데, 일단 자신의 군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보급에 만전을 기하며, 병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끝까지 사기를 유지하는 등 명장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행위를 정확히 수행한 사례다.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이렇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기본을 제대로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만 깨달아도 그런 오해는 삽시간에 깨진다. 당장 이런 조건을 제대로 만들 수 없어서 대부분을 운에 걸고 대충 추스린 병력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하는 일이 전사에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1626년에는 16만 군대를 이끈 누르하치를 막아내었고, 1627년에는 정묘호란으로 기세가 등등한 홍타이지까지 격파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만주족과 싸웠던 어떤 지휘관도 해내지 못했던 공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요동 방어선이 확립되었던 것이 큰데, 실제로 이런 시스템은 원숭환이 죽고 나서도 1641년 홍타이지가 금주 등을 모조리 함락시킬 때까지 이어져 왔다.

덧붙여 홍이포를 도입한 천재 서양문물 빠돌이 서광계는 영원성에서의 승리 덕분에 홍이포의 위력과 함께 서광계의 선견지명이 옳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숭정제 즉위 후 다시 조정으로 불려가서 홍이포의 대량 생산 담당자를 맡는다. 아담 샬의 조언을 받아 이렇게 찍어낸 홍이 대포의 숫자가 첫 해에만 무려 400여문 ㄷㄷㄷ 사스가 원조 천조국, 2차로 150문을 더 생산하여 명나라의 각 함선과 성벽을 홍이대포로 완전 무장 시키며 대 청 방어전선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어내고 명 나라 멸망전에사망한다.

그러나 그 시스템을 확립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도, 그리고 그 무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린 사람도, 결과적으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의 이 되어버리니……
  1. 절대로 원숭환이 홍이포를 도입한것이 아니다. 그 짧은 기간 내에 산해관에 있던 원숭환이 마카오로 내려가 포루투갈 상인과 협상해서 홍이포 30문을 들고 온다는 발상도 말이 안되고.. 원숭환이 도입했다고 왜곡을 해버리면 이후 아담샬과 싸바싸바해서 명나라에 400문 이상의 완벽한 홍이포 전력을 도입시킨 서광계의 공 역시 무위로 돌아간다. 또 홍이포를 도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원숭환의 공을 폄하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무리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충분히 못 다룬다면 결국 의미가 없는건데 그 무기를 충분히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를 불러 열심히 훈련 시킨것 자체로도 충분히 뛰어난 지휘관이다.
  2.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라고 기록되었으나 영원성에서 공성을 지휘하던 중 날아든 포격에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