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론

北伐論

1 소개

조선시대 효종 연간과 숙종 초년에 청나라를 치기 위한 일련의 논의.

2 등장 배경

소중화사상에 입각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만주족 오랑캐(청나라)에게 당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변변한 방어대책 없이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의 병력과 은화 900만 냥 이상의 군사비를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난 이후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화되었다. 동시에 조선에서는 명의 '재조지은(再造之恩)'-(조선을) 다시 재생시킨 은혜-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란의 후유증 극복에 힘쓰면서 외교적으로는 명과 신흥강국인 누르하치의 후금 사이에서 비교적 유연한 정책으로 또다른 전쟁을 피하는 데 애썼다.

서인 세력은 폐모살제의 죄와 칭제 문제를 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켜 집권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미책을 통해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칭제건원하고 조선에 대해 명과의 국교단절과 신속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국왕이 후금의 왕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하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 조야에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북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장차의 복수설치를 위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을 정비 개편하였으며,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지방군으로 전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속오군 역시 증강되고 훈련이 강화되었다. 군비 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 송준길, 김집, 이완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김자점은 천하의 개쌍놈답게 역관과 내통해 북벌 준비에 관한 일, 인조의 묘비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한 일 등을 청나라에 모조리 일러바친다. 영의정 이경석의 활약 덕분에 위기모면.[1] 북벌준비는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것이라고 변명했다. 청나라가 무섭긴 무서웠던지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허락해 달라고 보낸 주문을 보면 안습.

"이제 준동하는 왜인의 동태가 정말 우려스러운데, 혹시 위급한 일을 당하면 어찌할 계책이 없으니 오직 대국에 호소하여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길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동래와 서울과의 거리는 10일도 채 안 걸리는 길이고, 서울에서 황경(皇京)과의 거리는 까마득히 머니, 소방에서 사신을 선발하여 보내 호소하고 대국에서 군대를 조발하는 동안에, 어떤 성지와 어떤 군대로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까."

- 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8일 신유 1번째기사

쉽게 말해서 구원군 도착하기도 전에 저희 털리니까 자위권 차원에서라도 좀 봐주세요. 물론 왜란과 호란을 연달아 겪은 조선 입장에선 아주 근거 없는 부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벌론을 통해 양성된 군대가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나선정벌에 참여하게 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양성한 조총 부대에 의해 청은 러시아를 격퇴시키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2]

3 북벌론의 논의 및 분석

효종이 과연 실제로 청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론을 계획한 것인가 하는 부분은 오늘날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며, 현대에 와서는 북벌론은 조카[3]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차지한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이 내부 지지를 얻고, 인조대에 청의 통제를 받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조선의 군사체계를 다시 재정비하며 방위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언급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은 조선은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청은 각지의 성곽 복구 및 강화에 간섭하면서 조선의 방위력 재건을 통제하였다. 효종은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동법 등과 같이 내부 제도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다수의 성곽과 포대를 구축하고[4][5] 부족한 정통성을 북벌론을 통해 강화하여 지방 산림층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지방 산림층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조정에 입사하였으며[6] 이후로 조정에서는 종종 북벌에 대한 논의가 나오게 된다. 다만 이런 북벌론을 이용한 군사력 증강은 산림의 지지는 얻었을 지언정 실무 관료층 및 현실정치에 이미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던 대신들의 지지는 얻지 못한 듯 보인다. 특히 이들의 중심 인물인 김육은 대표적인 북벌반대론자로, 이점에 있어 효종과 종종 충돌했다.[7] 다만 기축봉사를 예로 들어 '서인들은 말만 앞섰고 효종은 약간이라도 군비를 증강시켰다!'는 식의 주장이 종종 나오나, 기축봉사의 후반부를 가지고 송시열이 '정신만 갈고 닦자'고 했다는 주장을 펴지만, 정작 그 앞부분을 보면 "하물며 우리나라의 포수는 바로 천하의 정예병으로 저들에게는 아직 없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의 급선무는 오직 군사를 훈련시키고 장수를 선발하여, 군량을 비축하고 군율을 엄격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여 송시열도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즉 이는 그저 단장취의에 불과하다.[8]

세월이 흘러 숙종 초에도 윤휴, 허적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를 두고,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이는 1674년 청에서 오삼계의 난, 일명 삼번의 난이 일어나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이 곧 안정을 되찾고 윤휴 일파가 1680년 실각함에 따라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위세로 보면 현재 천조국 수준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으므로 성리학자들도 현실적으로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76년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을 때 호응해서 북벌을 감행했다고 해도 삼번은 의외로 쉽게 제압당했으며[9] 당시의 사림층은 무리한 외정보다는 내치를 우선시하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말로는 북벌을 외쳤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사실 숙종 연간의 청 공격은 가능성이 높았을 수도 있겠으나 당시 황제가 강희제인데다가 그 외 조선의 여러 내부 문제까지 겹쳐서 사실 북벌을 감행했다가는 중원을 재진압한 청나라에 의해 병자호란은 저리가라 할만큼 처절한 보복을 받고 조선왕조는 멸망하였을 것이며 심지어는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게 병탄되었을 가능성조차 있었으니 북벌을 안한게 천만다행인 셈이다.조상들은 현명했다

어떤 의미로는 짜고치는 고스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기 충분하고, 실제로 조선 후기에 이미 북벌론은 허생전 등에서 볼 수 있듯 명분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반대로는 북학론이 있다. 이렇게 생긴 북학론은 19세기에 개화파 세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조정차원에서 청사신에게 뇌물까지 먹였다(...)
  2.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의 조총 사격은 개개인이 조준해서 사격하는 방식이었으나 러시아군은 집단적으로 화망을 형성하는 식으로 운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서양에서도 조준사격을 주로 하는 경보병 부대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전열보병의 카운터 병과 중 하나였다.
  3.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의 아들들.
  4. 병자호란 이후 인조 치세 동안 청은 조선의 군사력 정비에 간섭을 하였으나, 중국 내로 입관하여 중화의 중심이 된 후인 효종 치세부터는 이러한 간섭이 많이 느슨해졌다.
  5. 실제로 정벌보다는 장기적인 방어전에 가까운 이유가 주로 강화도에 보루를 세우거나 남한산성을 보수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6. 병자호란 이후 지방 산림층에서는 인조 정권을 '오랑캐에 굴복한 조정'으로 여기고 입사하지 않으려 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때문에 인조는 인재난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이 입관에 성공하면서 이런 풍조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인조 말년쯤 되면 이들은 조정에 나올만한 명분이 있으면 나올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효종이 내세운 북벌론은 이런 명분을 제공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육은 죽을때까지 계속 효종에게 신임받고 중용되었는데, 이는 효종의 북벌론이 실질적인 북벌 계획과는 거리가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로 꼽힌다.
  8. 송자대전의 기축봉사 부분 참조.
  9. 사실 세력을 따지면 삼번은 충분히 청을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손발도 안맞는데다 청의 황제는 강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