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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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夏祥
1795년 ~ 1839년 9월 22일

가톨릭 성인. 축일은 9월 20일. 본관은 나주(羅州),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 1801년 신유박해순교정약종(丁若鐘)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부친인 정약종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체칠리아(柳∼)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정철상(哲祥) 가롤로가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정혜(情惠) 엘리사벳과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峴)[1]의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趙曾伊)의 집에 의지하며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를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한양으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천주교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상대로 성직자 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9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請願)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왕국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 “저희들은 교황성하께 2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2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2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 신부님을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인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동정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의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Capellari)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소속의 전교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Brugiere) 주교의 조선 전교 자원이 있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2]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로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迎入)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3]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 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로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 교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로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로 정하상은 생명의 극(極)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에 대한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2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

서강대학교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다. 통칭 J관. 수원가톨릭대학교에도 하상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1. 당시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마재부락. 현 남양주시 와부읍 일대.
  2. 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등극
  3.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지만, 김대건최양업은 무사히 살아남아 신부가 되었다.